‘더 기다려줄게. 너를 향한 나의 기다림으로. 그토록 널 사랑하기에 오랜 시간을 소중히 견딜 수 있었어. 나 익숙해졌어. 어떤 날은 울기만 했었지만. 그래도 그런 아픔이 날 떠난 널, 날 버린 널 더 높게 만들었어…’
이런 글을 읽으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많이 기다렸지만 앞으로도 더 기다릴 수 있다는 내용은 한 편의 애절한 연애편지를 생각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글은 편지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이 열심히 불러대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이다. 인기가수 김민종의 히트곡 ‘아름다운 아픔’으로 평범한 내용이지만, 이런 스타일이 바로 신세대들의 전형적인 사랑 표현이다. 뻔한 얘기 같지만 참으로 감각적이다. 다음은 또 어떤가.
‘나 태어날 때부터 우리 만남이 정해진 것처럼 편안했어요. 참 이상해요. 사랑한단 이유로 그대의 여자 되고 싶은 맘이 간절해져요. 혹시 알고 있나요. 나 그대로 인해…. 믿고 싶어요. 오늘도 감히 난 그대가 있었기에 행복하다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네 명의 예쁜이들, 바로 핑클의 ‘To My Prince’라는 곡이다. 이런 가사를 접하는 신세대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랑의 전율을 느낄 테지만 반대로 어른들의 마음은 심란하다. ‘그대의 여자 되고 싶은 맘’ 운운하는 부분이 어쩐지 편치 않기 때문이다. 가사가 참 직설적이라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룹 이름에다 제목까지 모두 영어로 되어 있으니 거부감이 더할 것도 같다. 요즘 대중가요에 관심이 없는 기성세대의 경우는 팝송으로 오해할 소지도 있다. 한 곡 더 살펴보자.
‘비가 와. 잠도 안 와. 이럴 땐 정말 너 생각이 나. 그러다 복받쳐 올라. 자꾸 눈물이 나와…. 어제 널 닮은 여자 애를 봤어. 물론 네가 아닌 줄 알았으면서도 왜 자꾸 보게 되는 건지, 왜 또 너 생각이 나는 건지. 가끔은 너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외로워, 참 괴로워. 나 아프고 힘들 때 그리고 외롭다고 느낄 때 오늘처럼 비라도 오는 밤이면 우리 같이 듣던 CD-Video. 니가 좋아했던….’
이 정도에 오면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된다. ‘복받쳐 올라’라는 표현이 툭 튀어나오고, 가사에 또 CD-Video는 무엇인가. 악동으로 이름난 힙합그룹 디제이 디오시(DJ DOC)의 ‘비·愛’라는 곡이다. 제목부터 헷갈리는 이런 노래는 내용을 떠나서 어법이 기성세대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가사를 쓰는 걸까? 정말 우리 젊은이들은 누구 말대로 종(種)이 다른 ‘신인류’인 것인가? 어른들 처지에서는 ‘외롭고 괴로운 건 우리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간절할 듯하다.
나이가 들면 마음은 있어도 젊은이들의 모습과 유행을 따라가지 못해 속이 상한다. 그러나 만인이 즐기는 대중가요마저 심란하게 만든다면 뭔가 잘못된 일이다. 즐기고 쉬고 재충전하자는 게 대중가요 본연의 임무 아닌가? 하지만 요즘 대중가요가 어른들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리듬이나 선율, 모든 측면에서 최신가요를 받아들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40~50대 장년층이 신입사원들이나 한창 나이의 여직원과 어울려 노래방에 간다면 ‘왕따’를 각오해야 한다. 어른들은 분위기에 취하고 싶어도 젊은이들이 마이크를 잡으면 외돌토리가 되기 십상이다. 이 시대를 점령하고 있는 힙합댄스, 라틴 댄스, 테크노를 그들이 ‘비수’인 양 꺼내들면 ‘가만히 있는 게 중간’이라고 그냥 물끄러미 ‘애들’이 하는 노래와 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어른들에게 노래방은 더 이상 공동체의 공간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노래는 고문에 가깝다.
이렇게 주눅이 드는 상황을 수차례 경험하면 노래방에 가는 게 부담스러워진다. 만일 회식에서 2차 코스로 노래방이 결정되면 뭔가에 한 대 맞은 듯 겁이 나고 동행하기가 싫어진다.
“뭔 노래방이야. 시끄럽기만 하고, 제대로 얘기도 못 하잖아. 그냥 술이나 더 마시자구…”
이런 푸념을 늘어놓으면 ‘구세대’나 ‘쉰세대’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하지만 회식에서 ‘노래하며 놀자’는 고전적 오락이 대세일 때는 위계질서로도 누르지 못하는 법이다. 결심하고 따라가기로 하지만, 마치 그 꼴은 보신탕 집에 끌려가는 개처럼, 무기징역을 언도받으러 재판장에 끌려 나가는 죄수처럼 비참하고 딱하다.
개중에는 자존심 팽개치고 현실참여가 살 길이라며 애들 노래 한두 곡 가사를 구해 부지런히 연습하는 오기형 기성세대도 있다. ‘내가 스스로 한다’는 이 늙은 ‘DIY’(Do It Yourself의 약자)파들은 ‘나이가 드셨어도 우리 부장님 멋지네요’라는 부하 직원들의 사기진작에 때로 우쭐하지만 그것도 여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요즘처럼 대중가요가 빠르게 바뀌면 잠깐 한눈 파는 사이 까막눈으로 전락한다.
이거 노래 맞아?
자꾸 그러다 보면 요즘 노래에 대해 분노가 쌓인다. “요즘 애들 노래는 대체 왜 그래?” 그 속도와 박자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의 일성이다. 사실 1992년 서태지가 ‘난 알아요’라는 랩을 불렀을 때 기성세대는 당황하는 모습이 뚜렷했다. 젊은이들은 흥겹게 따라불렀지만, 어른들은 그냥 가사만 읽는데도 부담을 느껴야 했다. 리듬이 생소한데다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에 숨이 막혔던 것이다. 반면 능란하게 랩을 지껄이는 젊은이를 보면 정말 다른 ‘민족’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품었을 것이다.
분노는 비단 노래의 빠르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노래방 TV 화면 하단에 깔리는 가사를 찬찬히 보면 뭔가 막힌 듯 답답하다. 너무 감각적이라서 동떨어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때로 너무 야하고 대담해서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게 애들이 부르는 노래야? 이거 노래 맞아? 막 지껄이는 거잖아.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하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
정말 그런지, 우리 ‘신인류’의 노래를 한번 보기로 하자. 요즘 미모와 섹슈얼리티로 인기 절정인 여가수 박지윤의 ‘성인식’(박진영 작사·작곡)이다.
‘그대여 뭘 망설이나요 그대 원하고 있죠. 눈앞에 있는 날. 알아요 그대 뭘 원하는지 뭘 기다리는지. 그대여 이리 와요. 나도 언제까지 그대가 생각하는 소녀가 아니에요. 이제 나 여자로 태어났죠. 기다려준 그대가 고마울 뿐이죠. 나 이제 그대 입맞춤에 여자가 돼요….
그대여 나 이제 허락할래요…. 사랑은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로운 거란 걸 내게 가르쳐줘요…. 하지만 이젠 내게 더 기다려야 될 이유가 없어지는 날이 온 거예요.’
‘성인식’(이 말부터가 스트레스다)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지만, 이 곡의 노랫말 속에는 해석하기에 따라 ‘성인이 된 후의 첫 경험에 대한 갈망’의 은유로 가득하다. 단순히 소녀에서 여자로 변하는 나이의 예쁘고 순수한 사랑표현으로 보기에는 가사가 아주 농염하다.
‘나 이제 허락할래요’는 순정(純情)의 사랑에서 언급될 언어는 분명 아니다. 더욱이 박지윤이 실제 노래하는 모습과 뮤직비디오를 결부지으면 조금 완고한 어른들은 ‘외설’의 딱지를 붙일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 시대 가요시장에 접근할 때 정통의 연가(戀歌)로는 어필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식상한 표현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정통 연가로는 어필이 어렵다
대중음악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 그리고 그 반대편의 정서라 할 이별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랫말의 주종은 사랑과 이별이다. 시공을 초월해 대중음악은 언제나 획득한 사랑의 기쁨과 보답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픔을 담아낸다. 그래서 ‘사랑과 이별이 없으면 대중가요는 쓰러진다’는 말도 나온다. 솔직히 ‘너를 사랑한다’ ‘이제 너와 헤어져야 한다’는 말을 어떤 언어와 감각으로 돌려서 다양하게 표현하느냐가 (작사가의) 문제요, 고민일 뿐이다. 기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요즘 노랫말이 돌아가는 상황을 주의 깊게 보면 그런 말에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다. 과거에 알고 있는 재래식 사랑과 이별 표현법은 결코 아니다. 섹스에 대한 은유와 암시가 시사하듯 오로지 감각으로 뒤범벅된 것처럼 들려온다. 노래하는 가수도 젊고, 리듬과 선율 패턴도 젊고, 가사도 젊다.
‘니가 원하면 뭐든지 했고 니가 싫다면 하기 싫었어. 너의 여자로 태어난 걸 감사했어. 언제부턴가 변해버린 너. 아닌 척해도 느낄 수 있어. 너의 몸에서 그대로 배어나는 여자 향기. 사랑이 나를 눈뜨게 했고 이별이 나를 변하게 했어. 무정한 니가 내 인생을 망쳐놨어….’ -채정안 ‘무정(無情)’
이런 신세대 가요를 들으면 곧바로 기성세대들은 세대차이를 절감한다. 언어술이 발달한 건지 아니면 마구잡이로 치닫는 건지 모르지만, 과거의 노래와는 격세지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때 노래가 좋았어. 순수했고…’
그러나 40~50대 어른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정말 그 시절의 노래가 마냥 좋았고 순수했던가? 반드시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다. 만약 채정안의 ‘무정(無情)’이 배신한 연인에 대한 화풀이가 메시지라면, 저 흘러간 노래 가운데 유사한 계열을 찾아 비교해보자.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순정을 짓밟아놓고 얄밉게 떠난 님아. 떠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가 있을까.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도성 ‘배신자’(이인섭 작사·김광빈 작곡)
1972년에 발표된 이 곡은 지금 생각하면 순수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촌스러움 속에는 강한 자극성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채정안의 ‘무정’에 담긴 ‘너의 몸에서 배어나는 (딴) 여자 향기’와 ‘내 순정을 뺏어버리고’는 자극 수준이 다를지언정 메시지에서는 세대를 구인류와 신인류로 구분할 정도로 큰 편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 가사를 모르는 어른들은 없다. 지금도 가라오케나 카바레에 가면 빠지지 않고 흘러나오는 추억의 인기가요이자 ‘가요무대’를 통해서도 심심치 않게 듣는 노래다. 중년층의 애창가요로 손꼽히는 이 노래의 가사도 찬찬히 살펴보면 결코 순박하다고 볼 수 없다.
‘사나이 벌판 같은 가슴에다 모닥불을 질러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사랑에 취해 있나. 못 믿을 님아 꺾어진 장미화야…. 사나이 불을 뿜는 그 순정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행복에 잠겨 있나. 야멸찬 님아 꺾어진 장미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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