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예술가 사회는 다르다. 이곳에서는 까다로운 사람이 대접받는다. 실제로 앞서가는 예술가 중에는 괴팍한 사람이 많다. 패션디자이너 박항치씨. 그도 이 방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그의 식성은 유별나다. 육고기 중에서 한국사람이 즐기는 개고기와 돼지고기는 입에 대지 않는다. 양고기는 냄새도 맡지 않는다. 닭고기도 삼계탕은 쳐다보지 않지만,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치킨은 곧잘 먹는다. 오리고기는 외면하지만, 베이징덕(북경오리구이)은 먹는다. 돼지고기는 원래 안 먹지만, 고급 소시지와 햄은 즐긴다.
이런 식성을 뜯어보면 일관성이 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생겨난 이 땅의 천한 음식, 곧 이것저것 되는 대로 넣고 끓이는 꿀꿀이죽 방식, 어울리지 않는 재료를 되는 대로 섞어버린 음식이 그에게 걸리면 십중팔구 경을 친다.
본인 천성 탓도 있지만 이런 까다로움은 어릴 적부터 그의 어머니 이정순 여사(84)가 길러준 것이다. 전북 신태인 출신인 그의 어머니는 친정이 1930년대에 승용차를 굴릴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이런 부잣집에서 자란 어머니는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최고였고 유난히 깔끔한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아들에게 학교에서 눈에 띌 정도로 좋은 옷만 입혔다고 한다. 해방 이후, 그렇게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손수 옷감을 끊어다 솜씨 좋은 바느질로 아들에게 옷을 해 입혔다. 어머니 정성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의 감각도 빼어났다.
어머니의 정성은 옷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도시락 반찬을 쇠고기 장조림, 굴비 등 당시로서는 가장 호사스런 음식으로 마련했다. 박항치씨는 어릴 때 몸에 밴 이런 식성 때문에 지금도 순두부 하나를 먹더라도 최고의 음식점을 찾는다. 그가 만약 평범한 직업을 택했더라면, 까다로운 입성과 먹성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되었으니, 어머니가 길러준 까다로운 입성과 먹성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박항치씨는 이제껏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다. 어머니가 곁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니까, 지금도 아쉬울 것이 없단다. 그의 집에서 손님이 찾아왔을 때 대접하는 된장자장면은 어머니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음식이다.
이 음식의 유래는 이렇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그의 고향 전북 김제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없었다. 교육가였던 선친은 당시 문맹 퇴치가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중학교 설립에 나섰다. 그의 선친은 여러 면을 돌면서 학교 설립 기금을 모았다.
그렇게 돌다가 점심때가 되면 사람들을 몰고 집으로 들이닥쳐 밥상을 차리라는 것이었다. 전화가 없던 때니 미리 연락할 수도 없었다. 이때 개발한 음식이 된장자장이다. 이 된장자장면을 만들어내면 모두들 기가 막히게 맛있다며 몇 그릇을 비워내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