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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산은 겸허한 자에게만 정상을 허락한다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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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와 물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꾸리느냐에 등반의 성패가 달려 있다. 군인은 정신력만으로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등반대원도 마찬가지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일사불란하게 현장을 지휘하는 엄 대장을 보니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떠올랐다. 무적의 로마군단은 전통적으로 병참을 중시했다. 나아가 적국을 공격하기 위한 도로를 정비하고, 전쟁터가 될 지역주민의 민심을 얻는 것도 전쟁의 일부라고 여겼다.

네팔의 불안한 정치 상황

로마군의 전쟁준비는 병력, 무기, 군량보급으로 시작해 정신력, 사기라는 불확정 요소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이 때문에 로마군은 개별적 ‘전투’에서는 패배해도 장기적 ‘전쟁’에서는 지지 않았다. 전쟁이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패배할 수 있다. 막연히 정신력만 강조하고 행운에 의존한다면 그 군대는 전쟁에서 계속 승리할 수 없다.

카트만두에서의 최종 점검은 로마군의 병참작전과 흡사했다. 엄 대장은 ‘인간은 최선을 다하고, 산이 허락하면 정상을 잠시 빌린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최선을 다해 계획하고 점검한 후 겸허한 마음으로 등반에 나서는 그를 보니 병참을 중시하는 로마군 지휘관이 떠올랐다.

엄 대장은 바쁜 일정에서도 우리에게 카트만두 주변 관광을 주선해줬다. 이 중 1시간 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굉장한 볼거리였다. 비행기는 계곡을 따라 늘어선 쿰부 히말의 고봉들 위로 떠올랐다. 조종실이 개방돼 정면에서 바라보니 설산(雪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연이은 봉우리가 연출하는 웅장한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햇빛이 비치는 남쪽의 완만한 경사면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밭이 있었고, 드문드문 집도 있었다. 저렇듯 높은 곳에서 사람들은 무얼 일궈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은 등반하면서 만난 포터를 통해 풀렸다.



예정대로라면 3월21일 카트만두를 떠나야 했으나 하루가 늦어졌다. 준비기간도 짧았고, 불안정한 네팔의 정치상황도 원인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사상을 표방한 마오이스트 반정부군이 카트만두로 통하는 주요 도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물자수송에 차질이 생겼다. 1인당 국민소득 260달러의 세계 최빈국 네팔에선 1996년 이후 사망자만 1만3000명에 이르는 내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반정부군은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 5만명의 병력으로 국토의 40%를 장악했다.

게다가 1768년 성립된 ‘샤’ 왕조의 후예 갸넨드라 국왕은 계속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2001년 6월1일 왕실 가족파티에서 당시 비렌드라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가족 9명이 디펜드라 왕세자의 총기난동으로 몰살당하고 왕세자 자신도 자살하면서부터. 왕의 직계가족이 모두 죽었기에 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즉위했다. 그러나 갸넨드라는 사건 당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데다, 현장에 있던 그의 자녀까지 모두 무사했기에 주위의 의심을 샀다. 전임 비렌드라 국왕을 살아 있는 신(神)으로 추앙하던 국민은 ‘사랑에 눈먼 왕세자가 벌인 왕실 가족의 비극’이라는 정부 발표를 불신하고 있다. 오히려 현 국왕을 참극의 배후세력으로 믿는 분위기다. 새로 즉위한 왕이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철권통치로 절대왕정을 추구하자 국민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상황은 엄 대장이 예상한 것보다 좋지 않았다. 도로봉쇄로 김장용 채소 값이 몇 배나 올랐고, 수송용 트럭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현지 셰르파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고, 예정보다 하루 늦게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화물은 카트만두에서 9시간 걸리는 지리(Jiri)까지 트럭으로 싣고 간 다음, 헬기를 이용해 샹보체로 수송하고, 대원들은 비행기로 루쿨라까지 간 다음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천천히 꾸준하게 걸을 것”

로체샤르는 쿰부 히말 지역의 에베레스트 산군(山群)으로 이곳을 가려면 해발 2784m에 있는 루쿨라 공항으로 가야 한다. 30인승 경비행기를 타자 스튜어디스가 쟁반 위에 사탕과 솜을 수북이 담아 내민다. 솜사탕인 줄 알고 입에 넣으니, 스튜어디스가 웃으면서 작게 뭉쳐 귀에 꽂는 솜이라고 알려줬다. 낡고 시끄러운 경비행기로 30분을 날아 산 중턱을 깎아 만든 비행장에 닿았다.

위에서 보니 활주로는 ‘ㄱ’자로 꺾여 있었다. 거의 곡예비행을 하듯 착륙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륙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살펴보니, 비행기가 정지상태에서 엔진출력을 최대한 높인 후 마치 항공모함의 전투기처럼 튀어올랐다. 꺾여 있는 활주로는 전세계에서 여기뿐일 것 같았다. 공항 주변을 살펴보니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사람과 야크(소와 비슷한 동물)만 오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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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 딜로이트 상무 kjun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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