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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자유인이 되는 프로젝트

백수가 자유인이 되는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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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자유인이 되는 프로젝트
고전 평론…. 말만 들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지 않은가? ‘고전’이 뭔가. ‘중요하다 하지만 사실은 거의 읽히지 않는 곰팡내 풀풀 나는 책’ 아닌가. ‘평론’은 어떤가. 현학적인 수사(修辭)가 뱀꼬리처럼 길게 이어지는 평론이라는 장르보다 더 따분한 글이 있기는 한가?

고전평론가 고미숙. 이런 전문직 타이틀을 내세운 분의 글은 어떨까.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의 극치’일 것이라 지레짐작하지 마시라.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펼치면 홍명희 작 대하소설 ‘임꺽정’을 새롭게 해석하는 유쾌·상쾌·통쾌한 언어의 대향연을 만끽할 수 있다. 이런 평론이라면 누구나 질펀한 이야기 몇 마당을 읽는 묘미를 느끼겠다.

먼저 조선시대의 큰 도둑 임꺽정이 주인공인 대하소설 ‘임꺽정’에 대해 살펴보자.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린 벽초 홍명희(1888~1968)가 쓴 역작이다. 신문에 장기간 연재한 작품인데 책으로 묶여 나온 분량이 10권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소설을 ‘민족문학의 최고봉’이라 상찬한다.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시대의 풍속사를 잘 그렸기에 민속, 언어 연구에도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벽초가 북한으로 넘어가 부수상까지 지냈기에 이 작품은 오랫동안 금서(禁書)로 낙인찍혔다. 책을 낸 출판사 대표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래도 몰래몰래 읽혔다.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마력을 지닌 소설이다. 김창현 국문학 박사는 청년 시절 ‘임꺽정’ 읽는 재미에 빠져 끼니를 빵과 두유로 때우며 1박2일 만에 다 읽었다고 한다.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은 고미숙 박사는 연암 박지원 작 ‘열하일기’의 의미를 오늘날 시각으로 분석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저서를 내 이목을 끈 바 있다. 그는 이 스테디셀러에서 220여 년 전에 쓰인 ‘열하일기’에 통통 튀는 요즘 언어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저자의 놀라운 스토리 텔링 재능에 독자는 넋을 잃는다.



저자는 ‘임꺽정’이란 긴 이야기를 주제별로 분류하면서 경제·공부·우정·사랑과 성·여성·사상·조직 등 7개 키워드를 뽑았다.

책 제목에 달린 ‘길 위에서 펼쳐지는’이라는 표현에서 ‘길’은 직업 없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떠도는 공간을 상징한다. 청년 실업, 비정규직, 정리해고, 조기 정년퇴직 등으로 길 위에서 헤매는 슬픈 영혼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첫째 키워드 ‘경제’를 설명하는 장(章)에서는 ‘임꺽정’의 주요인물 대부분이 백수임을 강조했다. 임꺽정은 직업이 백정이지만 그가 소 잡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임꺽정의 처남 황천왕동이는 장기판에 코를 박았고 떠돌이 소금장수 길막봉이는 장사보다는 술 마시고 유랑하는 게 주업이었다. 저자는 이들을 ‘노는 남자들’이라 명명했다. 이들은 친지 집에 빈대 붙어 살면서 여행길에 나설 때는 남의 집에서 하룻밤 과객으로 묵는다. 그러다 청석골에 인디언 공동체 같은 마을을 만든 이후엔 화적질로 밥벌이를 한다.

우정의 경제학

노는 남자들이지만 ‘공부’에 심혈을 기울인다. 글 공부가 아니라 갖가지 재주 수련이다. 임꺽정은 칼쓰기와 말타기, 이봉학이는 활쏘기, 박유복이는 표창, 배돌석이는 돌팔매, 황천왕동이는 달리기, 곽오주는 쇠도리깨질 등의 분야에서 달인 경지에 올랐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양주팔은 백정, 갖바치(가죽신 장인), 스님 등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정진 끝에 생불(生佛) 경지에 오른다.

저자는 “공부를 통해 새로운 경계로 진입한다는 건 낡은 권위와 습속으로부터 탈주하는 일인 동시에 생사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이기도 하다”면서 “‘평상심이 도(道)’라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라고 말했다.

청석골 7두령은 임꺽정, 박유복이, 이봉학이, 길막봉이, 황천왕동이, 곽오주, 배돌석이 등이다. 임꺽정, 박유복이, 이봉학이는 어릴 때부터 어울리던 친구 사이다. 이들은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는 장길산, 홍길동, 일지매 같은 의적이 아니다. 사농공상 신분 시대에 농공상에도 끼지 못하는 천민이지만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인이었고 도둑질은 전업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알바’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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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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