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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최첨단의 모성과 신화 속의 모성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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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 수영하러 가도 되요?”“그래, 귀여운 딸아.옷은 꼭 나무에 걸려무나. 하지만 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 ‘엄마 거위 노래’ 중에서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딸 페르세포네를 지하세계에 빼앗긴 여신 데메테르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엘레우시스의 왕궁에 들어가 보모 노릇을 한다.

2009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제패한 두 명의 엄마가 있다. 일일시청률 1위를 고수하며 ‘아침드라마의 블록버스터’라 불린 ‘하얀 거짓말’의 신정옥 회장(김해숙 분),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의 ‘도준 엄마’ 김혜자.

신정옥은 굴지의 백화점 회장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수퍼맘이다. ‘마더’의 ‘엄마’는 단 한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그저 ‘도준 엄마’로 불린다.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울타리가 되어줄 남편도 없지만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의 마지막 양심까지 희생한다. 신 회장과 도준 엄마는 공교롭게도 ‘최상층의 엄마’와 ‘최하층의 엄마’를 대변하는 듯한 캐릭터로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들이 전혀 다른 계급적 기반을 갖고 있음에도, 서로 각기 다른 세상의 극단에 존재하면서도 소름끼치도록 똑같은 모성의 패턴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발달장애와 자폐 증상을 보이는 아들이 절대로 ‘장애인’ 취급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들을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시킨다. 아픈 아들이 간호사 은영을 사랑하자, 그 여인(신은경)을 ‘아들이 원하는 장난감’으로 인식한다. 신 회장에게 은영은 아들의 보필을 위해 제조된 인조인간과 다를 바 없다. 신 회장의 모토는 “내 아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줄 거야”다. ‘마더’의 ‘도준 엄마’는 형편이 어려워 도준(원빈)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순 없지만, 남보다 ‘조금 모자란’ 아들이 행여 다칠까, 사고 칠까, 핍박당할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신 회장과 도준 엄마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인간으로서는 철저히 실패하고 단지 모성으로만 성공하는 여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으로서 실패했기에 결국 모성의 정당성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 아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에게는 ‘부덕한 인간’이 되고 단지 자기 아들에게만 ‘최고의 엄마’가 되는 이 어머니들 말이다. ‘사회적으로 부도덕하고 가정에서는 수퍼맘’인 어머니들의 서사가 범람하고 있다. 그녀들의 모성은 단지 ‘집착’을 넘어선 수준이며, 더 이상 ‘광기’와 구분되지 않는다.

세상 끝의 엄마들



이제 더 이상 ‘아버지=가부장’이라는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 세상에서, 엄마들은 엄마의 역할뿐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신(新)모계사회’라고까지 불리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가족 지형은 엄마에게 자식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문화의 패턴을 낳고 있다. 게다가 점점 허약해지는 ‘사회적 안전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는 사회적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는 단지 ‘부성의 결핍’에서 도래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유능해도 ‘아이들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마치 유능한 연예인 매니저처럼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풍토가 확산되는 중인 것이다. ‘돈은 내가 벌어줄 테니, 어떻게든 내 아이들을 의대나 법대에 보내달라’는 식의, 부성과 모성의 확실한 분업 시스템이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도 보편화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0교시부터 야간자율학습까지, 이제는 ‘학파라치’의 눈치까지 보면서, 끝없이 사교육시장의 빈틈없는 스케줄에 10대 시절을 헌납해야 한다.

10대들뿐만이 아니다. 대학시절에도 아들딸의 학점과 강의 스케줄까지 책임지는 ‘헬리콥터맘’의 활약은 눈부시다. 다 큰 아들딸의 주변을 헬리콥터처럼 빙빙 선회하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휴대전화’라는 엄마용 리모컨으로 감시하는 엄마들. 우리 아들의 학점이 왜 B-밖에 안 되느냐며 교수에게 항의하는 엄마들, 아들딸의 ‘스펙’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대학생이 되어서도 각종 취업용 사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엄마들은 다 자란 아이들을 끊임없이 ‘캥거루족’으로 길들여간다.

대중문화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수퍼맘’은 바야흐로 ‘모성’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아가는 듯하다. 모든 면에서 아이들을 완벽하게 ‘케어(care)’하는 수퍼맘의 이미지는 조금 더 극적으로 진화해 ‘알파맘’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알파맘이란 아이가 배 속에서 자라날 때부터 이미 ‘아이를 위한 맞춤 교육’을 실시하는 엄마를 지칭한다. 모든 면에서 아이의 미래를 철저히 계산하고 예측하는 ‘기업형 엄마’ 알파맘은 아이가 채 걸음마도 떼기 전에 아기를 위한 향후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알파맘은 단지 ‘학원 가라’‘공부해라’라고 강요하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수업내용을 요점정리해줄 뿐 아니라 아이와 ‘함께’ 공부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홈 스쿨링’까지 겸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알파맘은 아이의 교육에 ‘CEO 마인드’를 도입해 가정교육도 기업경영처럼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형태다. 그저 최선을 다해 양육을 책임지는 ‘수퍼맘’에서 한 단계 진화한 형태라고 하지만, 왠지 등줄기로 서늘하게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는 ‘엄마 안티 카페’라는 당혹스러운 인터넷 카페가 생겨 대중의 지탄을 받았다.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미 타락되었다”라는 모토가 버젓이 걸린 엄마 안티 카페는 10대 여중생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자식을 상처 입혀 괴롭히는 부모가 부모인가. 우린 너희의 노예가 아니야”라는 식의 어머니에 대한 비난과 저주로 가득한 카페의 글들을 보고 네티즌의 반응은 대부분 ‘패륜의 극치’라는 쪽으로 쏠렸다.

‘Daemon7’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학업성적=사회계급이라는 등식이 아이들을 악몽으로 내몰고 있다”며 엄마 안티 카페의 충격적인 감수성을 부분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사안이 워낙 심각한지라 오히려 빠르게 잊히는 경향이 있지만 엄마 안티 카페는 모성의 현주소를 정면으로 질문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리는 불편한 신호탄이 아닐까. 엄마 안티 카페에 가입한 아이들의 엄마들은 왜 아이와의 소통에 실패한 것일까. 그 엄마들이 정말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식을 노예로 생각하는 주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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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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