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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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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br> 류정월 지음/이숲/286쪽/1만5000원

삼성그룹의 어느 사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회사 선배의 권유로 용하다는 역술인으로부터 운명 감정을 받았단다. 맞는 듯 틀리는 듯한 사주풀이를 듣고 복채 봉투를 내놓았다. 이튿날 그 역술인이 전화를 걸어와 “어제 받은 복채를 분실했으니 죄송하지만 다시 달라”고 요청하더라는 것. 황당했지만 봉투를 또 주었다. 그 사장은 “자신이 겪을 한치 앞의 일도 모르는 사람이 남의 운명을 봐준다니 어이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다. 어느 방송사에서 유명한 역술인들에게 한국팀의 경기 결과를 점치게 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제대로 맞힌 역술인은 아무도 없었다. 대선 때면 으레 자칭 타칭 ‘도사’들이 당선자를 예언한다. 헛다리 짚은 예언이 수두룩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예언이 나온 지 한참 지났지만 그는 건재하다.

운명이란 게 있을까. 사람은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갈까. 인간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신(神)은 과연 존재하며 신이 인간사에 관여할까. 열심히 기도하는 인간에게 신은 도움을 줄까. 인간사의 미래를 미리 알 수 있을까. 이런 원초적인 의문을 풀기 위해 인간은 오랫동안 고심해왔다.

고대에는 이 의문을 해결하는 일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동원됐다. 종교, 학문, 정치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을 때다. 공자는 주역 목간을 연결한 가죽 끈이 3개나 닳아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주역은 공자 이전의 선현들이 우주 원리에 대해 밝힌 책으로 점서(占書)로도 쓰인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도 집권자는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델포이 신전에 가서 신탁(神託)을 받았다.

근대에 접어들어 인간 이성이 눈을 뜨고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운명학’은 점점 음지로 들어갔다. 양지에서 활동하기엔 합리성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양지의 논리만으로는 풀이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인터넷 시대인 오늘날에도 적잖은 사람이 ‘신화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며 답답한 가슴을 푼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는 ‘오늘의 운세’가 실리고 젊은이들은 타로 점을 보거나 사주 카페를 즐겨 찾는다.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란 책은 조선 시대의 운명담과 운명론을 다루었다. 동서고금의 운명학도 아우르고 있어 이 분야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는 지침서 구실을 한다. 저자는 ‘문헌 소화(笑話)의 구성과 의미작용에 대한 기호학적 연구’란 제목의 논문으로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저술가다. 옛날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분야의 전문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운명과 관련한 갖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흥미진진하게 읽히면서도 웅숭깊은 의미를 가진 사례들이 그득하다.

허난설헌(1563~89)은 어느 날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27세 때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집안사람들에게 이 꿈 이야기를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조선의 걸출한 도인 정렴(1506~49)은 을사사화 때 아버지 정순붕이 반대파를 많이 죽이자 “이러면 30년 후에 반드시 패망합니다”라며 말렸다. 정렴의 예언대로 1577년 정순붕은 관직과 훈작을 박탈당했다.

숱한 예언을 말한 정렴은 야담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의 친구가 운명을 감정해달라며 끈질기게 졸랐다. 정렴은 마지못해 “자네 수명은 내년이 끝인데 더 살고 싶으면 정월 초하루 새벽에 만리재에 가서 도롱이 입은 노인에게 살려달라고 빌게”라고 말했다. 친구는 정렴이 일러준 대로 노인을 만나 애걸했다. 노인은 “정렴이 일러주었구나”면서 “정렴의 수명 17년을 떼어 자네에게 붙여주지”라고 대답했다. 그 노인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대사명성(大司命性)이란 신선인데 지상으로 귀양 왔다는 것이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이 책은 어느 유명한 여성학 강사의 성공 사례도 소개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태몽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한다. “너를 뱄을 때 흰 말을 탄 남자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고 사람들이 벌떼처럼 너를 쫓아가더라”는 내용이었다. 태몽처럼 그녀는 강의마다 수많은 청중을 끌어 모으는 명사(名士)가 됐다. 그러나 알고 보니 딸이 큰 뜻을 품고 살아가도록 독려하기 위해 어머니가 지어낸 태몽이었다.

이는 ‘로젠탈 효과’로 설명된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 교수가 1964년 실시한 실험에서 비롯된 이론이다. 그는 어느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특정 어린이들의 명단을 주면서 “얘들은 지능이 매우 높아 공부를 잘할 것”이라 귀띔했다. 사실 무작위로 뽑힌 평범한 어린이들이었지만 학년말이 되자 실제로 그들의 성적은 상위권으로 나타났다. 교사의 기대감이 학생에 대한 예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피그말리온 효과’도 같은 내용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이상형 여성을 조각으로 만들어 애타게 사랑하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감동하여 조각품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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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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