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이 아름다운 집’<br>구효서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314쪽/1만1000원
그는 내가 만난 첫 강화도 사람이었고, 내가 신춘문예로 소설가가 되자 제일 먼저 축하해준 첫 동료였다. 그는 가끔 점심을 먹는 중에, 또는 야유회 가는 길에 유년 시절의 일들을 ‘소설처럼’ 들려주었다. 주로 강화도 이야기였다.
그의 강화도 정서가 익숙해질 무렵 나는 광화문의 그 직장을 떠나 포스트모던한 강남으로 갔고, 그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시간이 흘렀고, 세기가 바뀌었고, 그는 마을 길목을 지키는 굴참나무(‘명두’)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소설들을 써냈다. 이번에 출간한 ‘저녁이 아름다운 집’은 굴참나무 같은 작가 구효서의 일곱 번째 소설집이다. ‘승경(勝景)’‘TV, 겹쳐’‘조율-월인천강지곡’ 등 소설집에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을 비롯해 그동안 구효서가 발표한 여섯 권의 소설집과 11권의 장편소설에서 일관되게 주목되는 특징은 탁월한 공간성의 창출이다. 이번 ‘저녁이 아름다운 집’은 그중에서도 ‘소설의 승경’을 이룬다.
공간성이 빛나는 소설들
공간성이 빛나는 소설들이 있다. 캐서린을 향한 고아 히스클리프의 광적인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희생자인 캐서린의 혼이 음울한 바람소리가 되어 황량한 워더링 하이츠의 저택을 휘도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10년 동안 바다를 표류하며 방랑하던 희랍의 율리시즈(‘오디세이아’)를 근대의 광고쟁이 사내 레오폴드 블룸으로 둔갑시켜 하루라는 긴 역사를 더블린에 창조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치명적인 전염병을 불러오는 불온한 바람과 뱀처럼 물길 현란한 수도(水都) 베네치아의 특수한 공간성을 살려 한 중년 사내의 미소년을 향한 관조적 동성애(에로스)의 극치를 보여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 죽다’, 그리고 살아 150년 죽어 20년을 마을 숲에 버티고 서서 명두라는 아낙의 한 많고 기이한 삶을 굴참나무가 되어 전한 구효서의 ‘명두’. 이 공간들은 소설의 성패(인상)를 결정짓는 인물(캐릭터)의 창조와 함께 또 하나의 강력한 주인공으로 존재한다.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의 하나로 꼽은 ‘폭풍의 언덕’의 워더링 하이츠란 공간은 주인공 히스클리프(벼랑 위에 핀 히스 꽃 같은 존재)와 캐서린 언쇼의 비극적인 사랑을 음울하게 휘감는 상징적 공간으로 압권이다.
워더링 하이츠란 히스클리프씨의 집 이름이다. ‘워더링’이란 이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 있는 형용사로, 폭풍이 불면 위치상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야 하는 이 집의 혼란한 대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정말 이 집 사람들은 줄곧 그 꼭대기에서 일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있을 것이다. 집 옆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전나무 몇 그루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다.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이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김종길 역, 민음사)
공간성이 뛰어난 소설들은 독자로 하여금 직접 그곳으로 가도록 유혹한다. 나는 구효서에 홀려 강화도를 수없이 찾았고, 제임스 조이스에 빠져 더블린으로 향했고, 로맹 가리에 반해 페루의 바닷가로 떠났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하숙집을 찾아 파리의 팡테옹 언덕의 좁은 골목들을 헤집고 돌아다녔는가 하면, 르 클레지오의 ‘조서’의 무대를 쫓아 밤이나 낮이나 니스 해변의 영국인 산책로를 오갔다. 버지니어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품고 런던의 거리와 공원을 산책했는가 하면,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을 옆구리에 끼고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떠돌아다녔다. 한국 소설에서 공간이 소설의 핵심으로 진입한 것은 모던 보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에서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인 구보라는 주인공 사내를 내세워 독자를 1930년대 근대 도시 경성의 거리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