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가장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된 백양사 진입로의 아기단풍나무 길.
그런데 이상하다. 봄 백양을 내세우는 것이 상식 밖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가을철 단풍 절정기면 하루에만도 3만여 명의 탐방객이 백양사로 몰려드는 현상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봄 백양에 대한 이야기가 여전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백양사의 봄 풍광이 가을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의미일 터. 봄 백양의 아름다움은 과연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 궁금증을 풀고자 지난해 4월과 5월에 이어 올해도 백양사를 찾아 봄 백양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봄 백양의 의미는 풋풋한 신록의 아름다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절집 숲과 달리 백양사의 들머리 숲길은 물론이고 백암산 곳곳에서 자라는 아기단풍나무와 다양한 종류의 활엽수가 짧은 봄철에 시시각각 연출하는 풍광은 유별나고 멋지다. 특히 아기단풍나무는 단풍나무 속(屬)의 한 종류로 고로쇠, 신나무, 복장나무, 당단풍 같은 상대적으로 큰 잎을 가진 단풍나무들과 달리, 잎의 크기가 어른 엄지손톱만한 것부터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앙증맞게 작은데, 이들이 내뿜는 신록의 풋풋함은 다른 곳에서 쉬 경험할 수 없는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아기단풍의 들머리 숲

우화루 모퉁이에 핀 고불매(천연기념물 486호).
눈여겨볼 또 한 가지는 어느 하나 똑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어느 하나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잎도 없다는 점이다. 이게 화이부동(和而不同) 아니겠는가! 하나하나의 잎이 다른 잎과 화목(和睦)하게 지내지만 자연의 질서에 따라 자기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는 아기단풍 잎의 당당함. 아기단풍이 풍기는 경이로움과 당당함을 느낄 수 있으면, 당신은 봄 숲이 연출하는 아름다움의 진수를 만끽하기 위한 첫 단계에 무난히 진입했다고 자부해도 좋다.
아기단풍나무의 잎눈이 벌어질 때 이 들머리 숲길을 걸으면 수많은 꽃눈과 잎눈이 외치는 함성이 들린다. 바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마음의 귀를 열어보자.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꽃눈과 잎눈의 합창을 들어보자. 만일 당신이 이들의 우렁찬 함성을 들을 수 있다면 자연을 향한 당신의 소통 안테나는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함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생태맹(生態盲)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생태맹이란 생태적 지식이 결여된 상태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생태적 지식은 물론이고,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나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감성이 결여된 상태를 뜻한다. 생태맹은 생명 현상에 대한 호기심, 경외심, 직관력은 물론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까지 상실한 상태다. 우리는 문맹이나 컴맹이라고 치부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생태맹의 상태에는 무덤덤하거나 무신경하다. 자연과 유리된 삶을 정상인 양 치부하는 오늘의 물질문명이 우리를 생태맹으로 내몰고 있는지 모른다. 현대문명을 발전시키고자 글자를 익히고 컴퓨터를 깨쳤듯이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 생태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자연에 대한 감성을 불러내는 일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