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돌아온 외다리’에서 발군의 액션 실력을 선보인 챠리 셸.
우리가 이소룡의 이단 옆차기를 흉내 내던 그 무렵 이소룡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해 7월20일 이소룡은 죽었다. 네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미완성 필름을 남기고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파장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73년 7월 이소룡 영화 ‘정무문’이 한국에서 개봉했고, 몇 달 후인 10월에 ‘당산대형’이 개봉했으며, 그해 12월 ‘용쟁호투’도 개봉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밀어닥친 ‘이소룡 폭풍’은 한국 액션 영화 팬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고, 그 폭풍은 한국의 영화인들에게도 밀어닥쳐 그해 가을, 충무로의 한국 영화계에서도 이소룡의 쿵푸 영화와 비슷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배우 오디션이 진행됐다.
태권도가 뒤질쏘냐!
‘중국에서 쿵푸 영화를 만들어 대히트를 했다면 우리에게는 태권도가 있다.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 우리는 태권도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초고속으로 시나리오가 나왔다. 제목은 ‘용호대련’. 감독은 태권도로 액션 영화를 만들면 홍콩의 쿵푸 영화 못지않은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이두용이었다. 오디션에 참가하려면 무조건 태권도 유단자여야 했다. 이두용 감독은 전국을 돌며 진행한 여러 오디션을 통해 300명을 뽑고 그 가운데서 또 30명을 추려냈다. 하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았던 그는 제작부에 다시 한 번 ‘무조건 다리가 긴 사람을 찾아내라’고 했다. 지금이야 잘 먹고 잘살아서 다리 길고 늘씬한 청년이 많지만 1973년 한국 남자의 체형은 그렇지 않았다. 찾고 찾은 끝에 결국 아는 사람 소개로 미국에 살고 있는, 미국 나이로 19살 된 청년이 물망에 올랐다. 일주일 걸려 머나먼 한국으로 온 그 청년을 보고 이두용 감독은 만족스러웠다. 정말 다리가 늘씬하게 쭉 뻗어 있었다. 태권도 실력은 보잘것없어 겨우 빨간띠에 불과했지만, 고개를 숙인 그의 반 측면 얼굴은 이소룡과 흡사했다. 무엇보다도 다리가 길어 태권도의 발차기를 시원스럽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용철. 미국 이름은 챠리 셸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감독이 액션 장면을 멋있게 연출하면 되는 것이지, 배우가 꼭 무술 고수일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태권도 실력보다 중요한 건 카리스마와 연기력이라고 생각했다. 태권도 실력이 뛰어난 무술감독 겸 배우 권영문이 든든하게 뒤를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신인 챠리 셸을 주연 배우로 캐스팅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 김선경 감독도 태권도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목은 ‘마지막 다섯 손가락’. 김선경 감독은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보다 태권도 실력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그가 발탁한 인물은 주한미군 태권도 사범 박종국이었다. 더불어 가라테를 익힌 미8군 출신 흑인 제임스 쿡을 기용해 언뜻 동서양 액션 스타가 총출동한 세계적인 액션영화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1964년. 스페인의 황야. 이탈리아 감독 셀지오 레오네가 너무 비싼 헨리 폰다 대신 미국에서 데려온 무명 조연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데리고 짝퉁 웨스턴을 찍고 있었다. 이스트우드는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의상까지 준비하란 말에 ‘이게 뭐하는 짓이람’ 하면서 샌타모니카의 중고 의류가게에서 급하게 사온 블랙 진과 모자, 망토 스타일의 판초를 걸치고, 너무 말랐으니 수염을 기르란 말에 ‘거, 되게 주문도 많군’ 하면서 못 피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 콜록거리며 ‘이거, 이거. 아내와 공짜로 유럽여행하는 셈치고 왔는데, 장난 아닌 걸?’하면서 ‘황야의 무법자’를 촬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레오네의 촬영지에서 몇 ㎞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스페인의 어느 들판에서 엉성하게 세트를 지어놓고 검은 망토에 검은 옷과 모자 차림의 프랑코 네로가 진흙탕에서 관을 끌고 힘들게 걸으며 셀지오 콜부치 감독의 ‘장고’를 찍고 있었다. 아마도 촬영장 근처를 지나치던 스페인 사람들은 ‘뭐야 이거? 서부극을 스페인 벌판에서 찍어? 웃긴다’ 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