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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악당, 그 뜨거운 매혹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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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액션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멋진 악당이다.
  • 그들이 매력적일수록 영화는 근육이 붙고 피가 낭자하게 흐른다.
  • 허장강이 딸을 지키려는 장모 황정순의 이마를 도끼로 내리찍을 때, 황해가 독립군 남궁원을 가혹하게 고문할 때 비로소 ‘김약국의 딸들’과‘쇠사슬을 끊어라’가 살아 숨 쉬지 않던가.
  • 스크린 속에서 소름 끼치는 악의를 발산하던, 그래서 한국 액션영화의 지평을 한층 넓힌 매혹적인 악역들을 추억한다.
뻔뻔하고 능청스럽던 허장강,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황해

배우 황해가 열연한 영화 ‘독짓는 늙은이’의 한 장면.

1990년대 초. 영화 연출부에 막내로 들어가 일을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다. 그때는 이미 충무로가 영화인의 거리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해 있던 때였다. 새벽 6시면 촬영을 나가는 스태프들이 잠이 덜 깬 얼굴로 충무로 국밥집에 모여들어 후루룩 단숨에 국밥을 비우고 골목마다 매연을 뿜어내며 서 있는 촬영버스에 올라타던 분주한 풍경이나, 충무로의 다방마다 영화배우와 감독·작가가 북적이고 해가 지면 수많은 영화인이 충무로의 돼지갈비집과 골뱅이집에 모여 술을 먹고 왁자하게 떠들던 그런 풍경이 사라진 시기였다. 내가 일하는 영화사는 충무로가 아니라 안국동에 있었고, 새로운 세대들이 만든 영화사도 종로나 강남의 신사동 쪽에 하나 둘 자리 잡으며 충무로를 떠나던 시기였다.

추운 겨울날 충무로에 있는 편집실에 심부름을 갔던 나는 극동빌딩 뒤의 골목을 걷다가 순대국밥집에서 낮술을 먹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보았다. 아! 그들은 한국 액션영화에 단골로 출연해 기꺼이 주인공에게 한 방씩 맞아주던, 바로 악역 배우들이었다. 수많은 영화에서 항상 만나는 배우들이지만 이름도 몰랐던 그들을 대낮에 술집 앞을 지나다 본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극악무도한 짓거리를 뻔뻔하게 해댔건만, 옹기종기 앉아 술을 먹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은 대단히 쓸쓸해 보였다. 1970년대처럼 액션영화가 많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새로 등장한 젊은 감독들은 왕년의 액션 단역배우들을 더 이상 찾지 않던 그 무렵. 허름한 술집에 대낮부터 앉아서 왕년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을 그들은 ‘영화의 거리’라는 이름이 퇴색한 충무로 거리와 비슷한 쇠락의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액션영화 속의 악당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매력적일수록 영화는 근육이 붙고 피가 낭자하게 흐른다.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며 프랭크 시내트라를 괴롭혀야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완성되고, 리 반 클립이 독사 같은 눈으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노려보며 괴롭혀야만 ‘젊은 사자들’이 완성된다. 리 마빈이 과묵한 스팬서 트레이시의 침대에 흙 묻은 부츠를 신고 누워 협박을 해야 ‘블랙록에서의 더러운 날’이 완성된다. 그들의 사악함이 설득력을 얻어야 우리는 주인공에게 더욱더 감정이입된다. 세계 영화 속에 빛나는 악역들의 별자리가 있듯이 한국 액션영화에도 소름끼치는 악의를 발산해 꿈속까지 나타나 나의 어린 시절을 괴롭혔던 매혹적인 악역들이 있었다.

“조센징, 빠가야롯!”

내가 혼자 극장을 드나들던 1970년대 중반, 한국 액션영화에서 맨 처음 내 머릿속에 각인된 악역은 배수천이다. 당시 나온 액션영화는 거의 모두 태권도 영화였고, 단골 악역은 배수천이었다. 그는 영화 속 악당 무리 중 언제나 가장 극악무도한 ‘악당 중의 악당’으로 출연하곤 했다. 그를 스크린에서 처음 만난 것은 ‘빌리 쟝’(김선경 감독, 1974)이라는 태권도 영화였는데, 영화를 다보고 난 후 주인공의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대머리에 히틀러 콧수염을 한 흉물스러운 배수천의 모습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았었다.



1975년. 추석 특선프로로 동네 극장에서 이두용 감독의 ‘무장해제’가 상영됐다. 일본군 장교로 등장한 배수천은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금붕어를 손으로 끄집어내 꼬리를 파닥이며 몸부림치는 모양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는 무장해제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맨주먹 맨다리 태권도를 사용해 대일본제국에 반항하는 구 한국군 병사들에 대한 증오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배수천이 눈동자 아래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상대방을 쏘아보면 한 마리 독사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살결은 왜 그렇게 하얀지. 그가 ‘훈도시’ 하나만 달랑 걸치고 터럭 하나 없는 뽀얀 맨살을 드러낸 채 “조센징. 빠가야롯!”을 외치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미안하지만 무섭기보다는 좀 민망하고 웃겼다.

1970년대 중반 태권도 영화가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한국 액션영화 속의 마지막 단골 악역이던 배수천의 영화는 너무 내용이 뻔하고 선악 대립만을 강요해 흉물스러운 모습만 기억에 남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배수천 이전, 19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 속의 악역 중 멋있는 악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문오장이다. 문오장은 간첩단의 두목, 조총련의 악질 간부, 일본군으로 나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악역을 도맡아 했다. 이만희 감독의 ‘일본 해적’(1972)에서 일본 해적 부두목으로 등장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비록 해적이지만, 강하고 멋진 사나이다. 그가 모시는 두목과 동료들은 조선 해안에 침입해 강간과 노략질을 일삼지만, 문오장은 강한 상대를 찾아 칼부림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검에 목숨을 건 검객인 셈이다. 문오장은 두목이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막아서며 항명한다. 분노한 두목은 그에게 할복을 명하고 문오장은 두목의 명령이니 따르겠다며 서슴없이 자신의 배를 가른다. 배를 가르고 죽어가는 문오장의 눈에 서글픔이 서린다. 시대와 두목을 잘못 만나 자신의 재능이 헛되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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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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