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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얼굴 바꾼 ‘미국 아이콘’ 뮤지컬

시대마다 얼굴 바꾼 ‘미국 아이콘’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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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미국 대중은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내용의 벌레스크에 먼저 심취했다. ‘더 블랙 크룩(The Black Crook·1866)이 벌레스크의 최초 공연인데, 일관된 스토리보다는 화려한 볼거리에 의존하는 미국적 특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코러스가 아름다운 여성들의 안무가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점차 코러스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이 때문에 코러스는 뮤지컬의 필수요소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뮤지컬의 명칭은 희극적인 내용으로 인해 ‘뮤지컬 코미디’였다. 음악과 가사(대본), 안무가 연극적인 줄거리와 결합한 형식인데, 이때 음악은 내용의 전개와 연결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래서 혹자는 ‘더 블랙 크룩’을 최초의 뮤지컬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경우 극본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줄거리의 뼈대 없이 노래, 춤, 만담, 마술을 순서 없이 공연해 뮤지컬 장르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뮤지컬 코미디는 극본, 작사, 작곡, 연출에 출연까지 했던 조지 코헨(1878~1942)의 등장으로 장르의 성격을 분명히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다시 변화하게 된다. 독일과 비엔나풍의 오페레타는 미국 무대에서 사라지고 미국식의 색깔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미국은 유럽대륙에 이국적 음악인 재즈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1927년에는 최초의 미국 뮤지컬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해머스타인 2세(1895~1960) 대본, 제롬 컨(1885~1945) 작곡의 ‘쇼 보트(Show Boat)’가 탄생했다.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쇼 보트를 무대로, 당시의 세태와 흑인 차별의 비극을 사랑 이야기로 그린 작품이었다. 해피엔딩의 볼거리 위주가 아닌 공연으로서는 최초였다. 이 작품의 결말이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뮤지컬 코미디’라는 용어가 ‘뮤지컬’로 바뀌게 된다. 또 이 작품은 대화에 배경음악을 사용했고, 사실적인 스토리로 장면과 장면을 부드럽게 연결해 관객이 극에 몰두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후 미국 뮤지컬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온 수많은 공연예술인의 활동까지 더해져 질적인 성장을 빠르게 거듭했다. 그러던 중 1935년에는 뒤보스 헤이워드(1885~1940)와 이라 거슈윈(1996~1983)이 대본을 쓰고, 조지 거슈윈이 작곡한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가 무대에 올랐다. 작곡자 조지 거슈윈이 37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등져 차기 작품은 나올 수 없었지만, 이 작품은 흑인 배우들이 인간의 고난을 연기한 수작이었다. 1막에서 주인공 베스가 부르는 섬세하고 분위기 있는 선율의 ‘서머타임(Summertime)’은 아직도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미국 뮤지컬의 비약적인 발전은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1902~1979)와 작사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1895~1960)의 완벽한 콤비플레이에 의해 속도를 더했다.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의 농촌을 무대로 카우보이, 농부, 처녀들의 아기자기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오클라호마’는 뮤지컬을 제대로 연출된 ‘통일성 있는 뮤지컬’로 끌어올리는 대혁명을 이뤄냈다. 두 사람의 이니셜을 딴 ‘R·H 형식’이라는 말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공식으로 자리 잡을 만큼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클라호마’ 이후 미국 뮤지컬은 낭만적이고 사실적이며 재미있는 줄거리를 가지게 됐고, 단순하고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긍정적인 주제를 아름다운 멜로디의 노래로 펼치게 됐다. 또 빠른 무대 전환으로 속도감 있게 극을 진행하고, 음악을 비롯한 무대, 안무, 조명, 의상 등의 모든 요소가 극본에 따라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미국 뮤지컬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뮤지컬 혁명 ‘오클라호마’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은 계속해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을 배경으로 두 쌍의 아름답고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담아낸 ‘남태평양’(1945), 19세기 태국 왕의 가정교사로 고용된 영국 부인이 겪는 문화 차이와 이해의 과정을 그린 ‘왕과 나’(1951), ‘도레미송’ ‘에델바이스’ 등으로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는 ‘사운드 오브 뮤직’(1959) 등을 만들었다. 인간미 넘치는 스토리와 아름답고 귀에 익숙한 선율로 가득한 이 두 사람의 작품은 관객들의 열광적 갈채를 받으면서 1950~60년대 미국 뮤지컬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와 함께 미국 뮤지컬 황금기에 공연된 ‘아가씨와 건달들’(1951) ‘마이 페어 레이디’(1956)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57) ‘맨 오브 라만차’(1964) ‘카바레’(1972) ‘지붕 위의 바이올린’(1964) 등은 빼어난 작품들로 현재도 활발히 공연되면서 사랑을 받고 있다.

또 하나. 록뮤지컬은 순수한 록음악이 아니라 극장의 메커니즘과 극적 구성에 맞추어 서정적인 요소를 가미한 음악이다. 록뮤지컬은 젊은 세대의 열광적 환호를 받으며 1960년대에 크게 유행했다.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하자’는 주제의 히피족 뮤지컬 ‘헤어’(1968)가 대표적인 록뮤지컬이었다. 당시 이 작품은 출연진이 나체로 등장한다는 소문 때문에 유명세와 함께 외설논란을 겪었다.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둔 ‘그리스’(1972)는 3388회 공연이란 기록을 세웠고, 6년 뒤에는 영화로 제작돼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뮤지컬과 오페라를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로 마이크의 사용 여부를 든다. 뮤지컬에 마이크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40년경. 엄청난 기계적 음향을 필요로 하는 록뮤지컬이 등장하면서부터인데, 1970년대에 널리 사용됐다. 1981년 ‘드림걸스’의 공연에서는 5개의 무선마이크가 사용됐지만, 1년 후 공연된 뮤지컬 ‘캐츠’에서는 대사를 하는 전 출연진이 무선 마이크를 착용했다.

미국 뮤지컬의 작품 세계 변화도 흥미롭다. 미국 뮤지컬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사회기류의 변화에 맞추어 작품세계가 바뀐다. 베트남전쟁, 흑인폭동 등으로 여론분열과 사회갈등을 겪으면서 기존의 상식과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자 뮤지컬에서도 전통적인 로맨틱한 정서를 벗어나 현대적인 발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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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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