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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감성은 소중하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감성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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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감성은 소중하다
광음여전(光陰如箭)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리자 선생의 문하생으로 지내던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한복 짓는 일을 한 지도 어언 28년째로 접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한복에 매달려온 셈이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느냐고 묻는 이가 왕왕 있다. 그럴 때마다 선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그냥 웃는다. 돌아보면 그것은 운명이 아니었나 싶다.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나는 한복을 유별나게 좋아했다. 한복을 즐겨입으신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에도 한복을 입는 이가 많지는 않았다. 한복은 부잣집 마나님들이나 입는 외출용 의상이었다. 우리 집 형편은 입에 풀칠하기 힘들 정도로 궁핍했지만 어머니는 한복을 자주 입고 다니셨다. 비록 화려한 비단 한복은 아니었어도 빳빳하게 풀을 먹인 모시 저고리와 치마가 내 눈에는 선녀 옷보다 더 우아하고 멋져 보였다.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면 한참을 한복집 앞에 서서 발을 떼지 못했다. 비단의 은은한 광택과 고운 결, 한 땀 한 땀 공들여 지은 한복의 고운 맵시를 넋을 놓고 구경했더랬다. 어머니가 한복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날에는 한복이 너무나 예뻐서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만지작거리고 간혹 몰래 입어보기도 했다. 막연하게나마 한복을 입기 편하게 고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릴 때는 그보다 더 간절한 것이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다들 먹고 살기가 팍팍했던 시절이니 여느 가정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는데 눈앞에 놓인 가난한 현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렇다고 부모를 원망하거나 투정을 부린 적은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7남매를 먹여 살릴 걱정에 한시도 편히 쉬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예순두 살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바닥으로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만드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작은언니와 함께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거들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새끼를 제법 길게 꼬면 모양이 엉성해도 어김없이 솜씨가 좋다고 칭찬해주셨다.



송충이와 개구리를 잡으러 다닌 일도 유년기의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벌레나 세균을 죽이는 약이 귀해 송충이를 사람 손으로 잡았다. 요즘 농가에서 유기농 채소의 상품 가치를 높이려고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송충이를 잡아다가 관공서 같은 곳에 갖다주면 수를 세어 잡은 만큼 돈을 줬다. 우리 남매들은 여름이면 송충이를 잡아 돈을 벌고 한겨울에는 꽁꽁 숨어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를 잡아다가 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번 돈은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어머니에게 몽땅 갖다드렸다.

어머니가 그때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이 말만은 잊을 수가 없다.

“개구리를 잡더라도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기술을 익혀야 잘살 수 있다.”

“우리 옷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한복은 우리나라가 건재한 동안에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을 게다. 하지만 난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흘려들은 적이 없다. 어머니의 그런 귀한 가르침과 올곧은 품성은 이후 내 인생에 나침반이 됐다.

어머니는 한도 많고 상처도 많은 분이었지만 늘 밝고 긍정적이셨다. 남매 중에 유독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내가 외모 콤플렉스를 떨쳐낼 수 있었던 것도, 남보다 늦은 나이에 한복 짓는 일을 배우기 시작해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긍정의 힘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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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술녀│ 한복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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