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보다 더 강렬한 매력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배우 이대엽.
보통의 한국 액션 영화에서 저런 사내는 아주 악질이거나 야비하다. 최무룡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 윤정희는 최무룡의 소식을 알 수 없어 괴로워했고, 죽을 결심을 했을 때 윤정희 앞에 나타난 사내는 위안이 돼주었다. 결국 윤정희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간의 사정을 담담하게 말하는 남편. 최무룡의 귀에 그 말은 들리지 않는다. 최무룡은 사내 앞에 단도를 꽂고 말보다 칼로 해결해 이기는 자가 윤정희를 데려가자고 한다. 최무룡의 심사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내 역시 윤정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최무룡은 막무가내다. 이때 최무룡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윤정희가 나타나 둘의 싸움을 말리려 하다가 극단의 방법을 택한다. 자신이 죽으면 두 남자의 싸움은 없을 것이라며 자결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평상심을 유지하던 윤정희의 남편이 분노한다. 최무룡과 사내가 단도를 뽑아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를 찌른다. 최무룡의 칼이 사내의 급소에 더 가까웠다. 쓰러지는 사내. 이때까지 사내의 명령 때문에 지켜만 보던 부하들이 최무룡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벌집으로 만든다. 최무룡도 멋있었지만, 윤정희의 현재 남편으로 나온 사내가 훨씬 멋있었다. 30분짜리 옴니버스 영화 중 한 편에 단 5분 출연해 주인공 최무룡에게 가야 할 찬사를 나눠 가진 사내. 영화의 균형을 살려 관객에게 ‘사내 중의 사내’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한 배우는 ‘명동 잔혹사’(1972) 두 번째 에피소드에 출연한 이대엽이다.
주연보다 멋진 조연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로비에서 20대 청년이 “윤정희 남편이 최무룡보다 더 멋있잖아. 배우 이름이 뭐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청년이 그 배우가 성남시장으로 있으면서 탐학을 일삼은 탐관오리로, 현재 교도소에 있는 ‘악당’임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했다. 현실에서 이대엽은 악당이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멋진 사내 중의 사내였다.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해보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탱크가 38선을 넘어 밀고 들어오자 국군은 속수무책 피난민 행렬과 함께 후퇴하는 패잔병 신세가 된다. 장교 신성일은 무기력하게 패배한 군인은 직무유기를 저지르는 것으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국민에게 사죄하는 길은 오직 하나. 적과 싸우다 죽을 자리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뇌하는 군인 신성일이 죽을 자리를 찾으려 전선을 향해 올라가는데, 그 앞에 지프를 몰고 이대엽이 나타난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장교 이대엽은 지식인 장교인 신성일처럼 뭘 생각하고 자시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부하가 가져다준 커다란 사발에 찬물을 붓고 밥을 말아 후루룩 들이켜고는 “나 간다” 한마디를 남기고 지프 뒤에 폭탄을 가득 싣고는 적군의 탱크를 향해 돌진, 폭사해버린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내 이대엽. 기왕 이렇게 된 일. 칭얼거리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것.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돌진하는 청년 장교의 모습을 역시 5분도 안 되는 장면을 통해 명쾌하게 보여준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