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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항해기

제48회 신동아 논픽션 공모 우수작

지구별 항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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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항해기

발틱해 해무海霧.

2010년 9월 28일 이른 아침, 잠을 깨우는 전화벨이 울렸다.

“김연식 씨죠? 내일 인도네시아에 가서 써니 영(Sunny Young)호를 타세요. 인천공항에서 같이 승선하는 선원을 만나면 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나의 항해는 선사에서 걸려온 다급한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출항 하루 전날, 아침, 잠결에. 전화기 너머 직원은 적도 반대편에 가는 일을 무척 쉽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 인도네시아는 내가 생각하는 부산쯤 되는 모양이다.

“떠나는구나!”

느닷없는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설렘인지, 아쉬움인지, 기쁨인지, 걱정인지 복잡다단하다. 방 안에 짐이 잔뜩 널브러져 있다. 지난 6개월간 부산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해기사(海技士) 교육을 받으며 쓰던 것이다. 수료식 날 가져와 흩어놓고는 ‘정리해야지, 곧 할 거야’ 하면서 보름을 넘겼다. 마음속으로 늘 출항을 준비했지만, 막상 내일이라니 막막하다.



창밖을 보니 차들이 분주히 달린다. 뛰노는 아이들 소리, 과일장수의 트럭 소리. 나는 내일 떠나는데 밖은 섭섭하리만큼 일상적이다. 일기장을 폈다. 남은 하루 사이에 할 일을 모조리 적었다. 내일 떠나면 10월 부분은 하얗게 남을 테니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개천절이면 대학 동문이 모여 체육대회를 하겠지.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흥겨울 테지.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내 방이 이렇게 포근한 줄은 미처 몰랐다. 산중턱의 녹음이 푸르다. 바람이 상쾌하다.

위기의 청춘

일기장을 펴는데 첫 장의 좌우명이 눈에 들어온다.

“인생은 짧다.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책에서 베낀 건지,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수첩에 적어둔 내 좌우명은 짧은 글귀에 불과했다. 이것의 쓰임은 남이 봤을 때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정도? 그래서 일부러 더 크고 진하게 적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 좌우명을 꽤 오래 잊고 지냈다. 토익 점수를 받느라, 인턴으로 일하느라, 봉사활동 하느라, 어학연수를 떠나느라 일기장의 첫 장을 볼 겨를이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정할 때도 이력서를 쓰느라 분주했을 뿐, 영혼의 소리에는 무심했다.

이걸 다시 본 건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이 지난 2009년 늦은 가을. 그때 나는 어느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고, 청년 인턴사원이었다. 아주 잠깐 어느 작은 회사의 사원이었지만 오래하지는 못했다. 나는 눈은 높고 허리띠는 졸라매기 싫은 그저 그런 청춘이었다. 어렴풋이 드라마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촬영 현장에서 바닥부터 시작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여러 해를 투자해 방송국 공채에 도전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실은 자신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몸은 게을렀다. 여기저기 쑤셔 넣은 이력서는 어설프게 끼워 넣은 광고지처럼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우울하게 일기장을 펴고 이력서를 보낸 곳과 탈락한 곳, 소식이 없는 곳을 구분했다. 답답한 마음에 의자를 젖히는데 일기장이 주르륵 접히더니 첫 장에서 멈췄다. 그리고 영화처럼 영혼의 소리를 들으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어지러운 생각으로 흔들리던 시선이 내가 한때 지하철에서 팔았던 지구본에 닿았다. 그때 나는 대학 4학년이었다. 중심을 놓친 시선과 쭈뼛한 발걸음. 새하얀 케이크에 튄 김칫국물처럼 지하철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꽤 오래 머뭇거렸다. 그 사이 수도권 전철 1호선 구로역과 주안역을 열 번도 넘게 오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퇴근 행렬도 잦아들었다. 나는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쓰디쓴 약을 눈 질끈 감고 털어 넣듯, 미리 연습한 말을 던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꼭 한 번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아보는 경험을 하고 싶어 용기를 내서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 침대 맡에 이런 지구본 하나씩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매일 아침, 저녁마다 더 큰 세상을 꿈꿨으면 좋겠습니다.”

어설픈 장사꾼이었지만 전동차마다 네댓 개씩 팔았다. 승객들은 3000원짜리 지구본이 아니라 내가 말한 세계를 향한 꿈을 샀다. 그때 나를 보던 고등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어른들의 시선도 따스했다. 아직도 ‘세계’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이상에 젖은 푸른 젊음이었다.

“그랬지. 나는 세계를 꿈꿨지.”

자정이 지나도록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 대학생이 된 게 아니라 대학생이기 위해 학교를 다녔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 토익 900점을 받은 게 아니라, 취업을 잘해보려고 공부했다. 그러다보니 토익 900점을 수월하게 넘겼지만 영어는 한마디도 못했다.

군대에 갔다. 졸업했다. 때 되면 나오는 식당 밥을 먹듯, 나는 맛도 모르고 젊음을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이제 저녁 식사를 기다린다. 뭘 먹고 싶다는 바람은 없다. 뭐든 일단 먹을 것이다. 단지 남보다 늦지 않으려 애간장을 태우면서. 결혼도 할 것이다. 남이 말하는 ‘때’를 놓치지 않을까 조바심치면서. 돈을 모으려 할 것이다. 돈을 쓸 데도 없는데, 그저 빈 주머니의 초조함에 시달리면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남이 하는 대로. 그렇지만 내가 정말 아내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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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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