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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경상도 사나이 이대엽

2% 부족한 카리스마 비극적인 말로

투박한 경상도 사나이 이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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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당이지만 멋있는 놈.” 이대엽의 영화를 보며 여러 번 생각했다. 한국 액션 영화에서 악당은 야비하거나 악질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대엽은 달랐다. 그의 연기에서는 정직하고 당당하게 몸으로 먹고사는 노동자의 자존심과 패기가 풍겨나왔다. 문제는 그것이 단 5분이었다는 점. 긴 호흡으로 영화를 끌고 가야 하는 주연으로서, 이대엽은 실격이었다. 결국 스크린 밖으로 나가 진짜 ‘악당’이 되어버린 ‘빨간 마후라’의 전설, 이대엽을 추억한다.
투박한 경상도 사나이 이대엽

주인공보다 더 강렬한 매력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배우 이대엽.

레스토랑 문을 벌컥 열고 한 사내가 들어선다. 핏발 선 날카로운 눈매. 믿었던 보스의 배신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감방에 들어갔던 불운한 사내, 최무룡이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단 하나. 사랑하는 아내 윤정희가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던 여자인가? 그녀를 위해 암흑가를 떠나려 했고, 여자 때문에 조직을 떠나려는 최무룡을 괘씸하게 여긴 보스가 그를 함정에 빠뜨려 감옥으로 보낸 것이다. 레스토랑 구석진 곳에 윤정희의 남편이자, 최무룡의 보스를 몰아낸 명동의 새로운 주인이 앉아 있다. 단도를 움켜쥐고 윤정희의 현재 남편 앞에 선 최무룡. 다짜고짜 윤정희를 내놓으라고 한다. 윤정희의 남편은 눈에 핏발이 선 최무룡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당신의 괴로움을 나는 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윤정희는 이미 나의 아내다’라고 말한다. 자기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거대한 산 같은 사내 앞에서 최무룡은 당황한다. 악당이지만 멋있는 놈이다.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됐을 것이다. 영화를 보던 나도 최무룡과 똑같이 당황한다. “저 사내 너무 멋있잖아?”

보통의 한국 액션 영화에서 저런 사내는 아주 악질이거나 야비하다. 최무룡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 윤정희는 최무룡의 소식을 알 수 없어 괴로워했고, 죽을 결심을 했을 때 윤정희 앞에 나타난 사내는 위안이 돼주었다. 결국 윤정희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간의 사정을 담담하게 말하는 남편. 최무룡의 귀에 그 말은 들리지 않는다. 최무룡은 사내 앞에 단도를 꽂고 말보다 칼로 해결해 이기는 자가 윤정희를 데려가자고 한다. 최무룡의 심사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내 역시 윤정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최무룡은 막무가내다. 이때 최무룡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윤정희가 나타나 둘의 싸움을 말리려 하다가 극단의 방법을 택한다. 자신이 죽으면 두 남자의 싸움은 없을 것이라며 자결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평상심을 유지하던 윤정희의 남편이 분노한다. 최무룡과 사내가 단도를 뽑아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를 찌른다. 최무룡의 칼이 사내의 급소에 더 가까웠다. 쓰러지는 사내. 이때까지 사내의 명령 때문에 지켜만 보던 부하들이 최무룡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벌집으로 만든다. 최무룡도 멋있었지만, 윤정희의 현재 남편으로 나온 사내가 훨씬 멋있었다. 30분짜리 옴니버스 영화 중 한 편에 단 5분 출연해 주인공 최무룡에게 가야 할 찬사를 나눠 가진 사내. 영화의 균형을 살려 관객에게 ‘사내 중의 사내’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한 배우는 ‘명동 잔혹사’(1972) 두 번째 에피소드에 출연한 이대엽이다.

주연보다 멋진 조연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로비에서 20대 청년이 “윤정희 남편이 최무룡보다 더 멋있잖아. 배우 이름이 뭐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청년이 그 배우가 성남시장으로 있으면서 탐학을 일삼은 탐관오리로, 현재 교도소에 있는 ‘악당’임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했다. 현실에서 이대엽은 악당이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멋진 사내 중의 사내였다.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해보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탱크가 38선을 넘어 밀고 들어오자 국군은 속수무책 피난민 행렬과 함께 후퇴하는 패잔병 신세가 된다. 장교 신성일은 무기력하게 패배한 군인은 직무유기를 저지르는 것으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국민에게 사죄하는 길은 오직 하나. 적과 싸우다 죽을 자리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뇌하는 군인 신성일이 죽을 자리를 찾으려 전선을 향해 올라가는데, 그 앞에 지프를 몰고 이대엽이 나타난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장교 이대엽은 지식인 장교인 신성일처럼 뭘 생각하고 자시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부하가 가져다준 커다란 사발에 찬물을 붓고 밥을 말아 후루룩 들이켜고는 “나 간다” 한마디를 남기고 지프 뒤에 폭탄을 가득 싣고는 적군의 탱크를 향해 돌진, 폭사해버린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내 이대엽. 기왕 이렇게 된 일. 칭얼거리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것.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돌진하는 청년 장교의 모습을 역시 5분도 안 되는 장면을 통해 명쾌하게 보여준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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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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