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테크노 픽션, 퓨전문학의 첨단작가 그룹

  • 김성곤

    입력2006-10-25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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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작가들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해하고 컴퓨터와 뉴미디어에 능하다. 하이퍼 픽션, 테크노 픽션, 퓨전문학, 되받아쓰기 등은 이들의 주요 영역이다.》
    20 세기 후반부터 작가들은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같은 첨단 테크놀로지의 부작용을 생태주의적 시각으로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기술을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공학이론이나 생명공학이론을 직접 작품 속에 대입해 설득력 있는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들이 첨단 테크놀로지 이론을 공부했고, 컴퓨터와 뉴 미디어에 능하며, 멀티미디어적 인터액티브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점도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특색이다. 문단과 학계에서는 이 특색있는 새로운 작가들을 ‘정보 시스템 작가’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DNA의 구조를 연구하는 유전학자들과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을 다룬 ‘골드 버그 변이(The Gold Bug Variations)’라는 소설을 쓴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는 가장 주목받는 작가다. 파워스는 문학과 과학과 음악 사이의 장르를 해체하며, 바흐의 ‘골드버그 변주곡(The Goldberg Variations)’의 구성과 장치, 그리고 첨단 유전자 이론을 자신의 소설과 뒤섞는다. 그래서 파워스의 소설은 문학작품이면서 리드미컬한 악보이고, 악보이면서 재미있는 과학이론서가 된다. 예컨대 파워스의 소설은 마치 바흐의 변주곡처럼 처음과 마지막이 아리아로 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30개의 변주곡이 들어가 있다. 물론 파워스가 작곡하는 변주곡은 바흐 시대와는 달리, 유전자의 ‘변이(variations)’를 의미한다.

    파워스의 소설 ‘골드 버그 변이’는 또 에드가 앨런 포의 추리소설 ‘황금충(The Gold Bug)’과도 연결된다. ‘황금충’의 주인공은 숫자의 다양한 변이를 통해 암호를 해독한 뒤 감춰진 보물을 찾는다. 파워스는 거기에다 유전자의 암호풀이와 유전자 변형의 모티프를 병치시킨다. 즉 ‘변이’는 우리가 그 수수께끼를 풀기에 따라 다양성과 보물찾기가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우리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워스를 비롯한 정보시스템 작가들은 유전공학, 생명공학, 심리학, 사회학, 컴퓨터 과학, 생태학 등을 문학에 접목시킨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창출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이퍼 픽션’- 로버트 쿠버

    ‘하이퍼’라는 말은 원래 기존 ‘공간’의 범위를 초월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라는 뜻인 ‘하이퍼 스페이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하이퍼 픽션’은 새로운 공간 속에서 쓰이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 픽션’은 컴퓨터 화면에 쓰이지만, 단지 화면에 문자로 써서 종이책처럼 읽는 컴퓨터소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퍼 픽션’에는 시작도 끝도 없고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도 없다. 즉 ‘하이퍼 픽션’은 활자매체처럼 텍스트를 처음부터 읽을 필요도 없고, 좌우 상하의 순서로 읽을 필요도 없다. 독자가 화면에 나타난 수많은 아이콘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 마우스로 클릭하면, 화면은 삽시간에 시공을 뛰어넘어 독자가 선택한 경로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현재 화면은 작품의 그 어느 부분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하이퍼 픽션’은 ‘대화적 픽션(Dialogic Fiction)’ 또는 ‘쌍방향적 픽션(Interactive Fiction)’이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하이퍼 픽션’은 저자가 읽는 순서를 정해 놓는 종래의 종이소설들과는 달리, 독자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다른 텍스트 공간으로 이동하며, 저자와 창조적인 교류를 하기 때문이다.

    ‘하이퍼 픽션’의 원조는 마이클 조이스지만, 현재 ‘하이퍼 픽션’을 이끌어가고 있는 작가는 브라운대학의 창작 교수이자 저명한 소설가인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다. 쿠버는 “사람들은 ‘하이퍼 텍스트’를 읽으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엄청난 이야기의 저수지가 화면 아래에 있음을 감지한다”고 말한다. 즉 종이에 쓰이는 활자소설과 달리 ‘하이퍼 픽션’은 독자가 저자와의 공조를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 개념의 소설은 문학작품이 더 이상 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독자와 공유하는, 또는 독자와 공동으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이퍼 픽션’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21세기의 새로운 소설양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테크노 픽션’-마크 아메리카

    ‘테크노 픽션(Techno-Fiction)’은 테크놀로지를 이용해서 쓰는 ‘전자소설’을 지칭한다. 그래서 테크노 픽션에는 그래픽이나 사운드, 음성이나 동영상이 들어가며 그 속에서 기계와 문학, 또는 테크놀로지와 글쓰기가 서로 혼합된다. 테크노 픽션은 물론 하이퍼 텍스트를 이용하는 멀티미디어적 개념의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최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법을 글쓰기에 차용한다는 점에서 멀티미디어 기능을 우선시하는 하이퍼 픽션과는 또다른 형태다. 테크노 픽션은 또 저자와 독자가 인터넷상에서 신용카드로 직접 작품을 사고 판다는 점에서 출판업자나 중간도매상, 또는 서점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테크노 픽션에서 모든 것은 기계와 과학기술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크 아메리카(Mark Amerika)는 현재 테크노 픽션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작가다. 원래 기계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종이책에 인쇄되는 문자 소설만을 출판하고 있었던 그는 10여 년 전부터 미래의 소설은 변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그때부터 테크노 픽션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나는 이제 소설가, 단편작가, 시인, 평론가, 온라인 칼럼니스트, 잡지 편집인, 라디오 프로그래머다. 또한 나는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에 종종 음악을 취입하고, 비디오나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아직 애니메이션이나 디지털 그래픽 기획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만간 그렇게 할 예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작가가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크 아메리카는 “비록 존 바스나 토머스 핀천 같은 포스트모던 작가들이 솔 벨로나 존 업다이크 같은 리얼리즘 작가들보다 새로운 소설양식을 창출해 냈지만, 컴퓨터 시대인 지금은 그보다 더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테크노 픽션”이라고 말한다. 마크 아메리카는 ‘글쓰기의 과학을 모델삼아 만든 글쓰기 기계’인 ‘그래마트론’이라는 테크노 픽션을 출간했는데,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기법과 SF적 배경으로 쓰인 이 소설은 테크노 픽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수인종/여성문학’-루이스 어드릭

    최근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소수인종 작가 중 원주민계 미국작가인 루이스 어드릭(Louise Erdrich)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그녀의 작품세계 근간에 깔려 있는 것은 물론 백인 지배문화에 대항하는 원주민계 미국인들의 저항과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에는 원주민 특유의 구술 설화 전통, 독특한 서사구조, 그리고 페이소스와 강렬한 유머 감각 등이 깃들여 있어서 시종일관 독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독자들은 곧 그 웃음 속에 감추어진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발견하고, 비수를 드러내지 않고서도 충분한 저항효과를 거두는 어드릭의 탁월한 예술적 형상화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루이스 어드릭의 대표작 ‘사랑의 묘약’(Love Medi cine, 초판 1984년, 증보판 1993년)은 각기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는 18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특이한 소설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묘약’은 단편과 장편에 대한 종래의 구분과 경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신선한 느낌을 준다. 단편의 간결함과 긴장감 속에서 매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어느새 18편의 이야기들을 관통하고 조감하는 통일된 주제와 커다란 그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드릭은 이 작품에서 미합중국 정부가 정해놓은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고통스럽고 박탈당한 삶의 묘사를 통해 지배이데올로기의 억압과 착취, 밀려나는 주변부 문화와 전통의 상실, 그리고 인종간, 세대간, 남녀간의 갈등과 충돌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어드릭은 그와 같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투쟁이 아닌, 블랙유머와 패러디를 통해 때로는 환상적으로 때로는 신화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예컨대 언덕 위에 있어 늘 보호구역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수녀원,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이며 남편인 인디언들이 갇혀 있는 형무소, 그리고 원주민 청년을 징집해 정신이상자로 만들어 돌려보낸 월남전. 이 모든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백인 지배문화의 상징이다. 어드릭은 21세기를 이끄는 소수인종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백인 주류 문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참신하고 새로운 문학양식을 창출해 내고 있어 주목된다.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출생한 남아공 작가 존 쿳시(John Coetzee)는 부커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으며, 현재 탈식민주의 문학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세계적인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첫 소설 ‘더스크 랜드’에서부터 최근 소설 ‘추락’(왕은철역, 동아일보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아프리카의 유산 속에 스며 있는 유럽 제국주의의 잔재를 드러내고 제국주의의 은밀한 억압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작업을 위해 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서구 제국주의 담론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니얼 드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포(Foe)’에서 쿳시는 유럽의 시장경제 논리와 실용주의가 어떻게 원주민을 억압하며 결국에는 침묵시키는지를 ‘로빈슨 크루소’의 ‘되받아 쓰기(write back)’를 통해 탁월한 솜씨로 탐색하고 있다. ‘되받아 쓰기’는 서구의 정전을 패러디하는 탈식민주의 문학의 대표적 기법이다. 비록 쿳시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감히 대가인 드포의 소설에 대해 ‘되받아 쓰기’를 할 수는 없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포’가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되받아 쓰기’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포’라는 제목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인 대니얼 드포(대니얼의 원래 성은 ‘포’였는데, 40세가 다 돼 자기 이름에 ‘드’를 붙였다)에 대한 패러디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 유럽이야말로 아프리카의 ‘적’이라는 암시가 깃들여 있다.

    ‘포’에서 쿳시는 백인 크루소와 흑인 프라이데이의 관계를 제국주의적 측면에서 다시 조명하고 재해석함으로써, 탈식민주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쿳시의 ‘포’는 역시 ‘로빈슨 크루소’의 ‘되받아 쓰기’인 새뮤얼 셀번의 ‘모세의 신분상승’, 노아 홍수의 ‘되받아 쓰기’인 티모시 핀들리의 ‘배를 못 탄 자들’, 그리고 ‘제인 에어’의 ‘되받아 쓰기”인 진 리이스의 ‘드넓은 사르가소 바다’와 더불어 오늘날 탈식민주의 문학을 주도하고 있다

    ‘생태주의’-장 마르크 오베르리

    생태계의 보호와 보존, 그리고 목가적 꿈의 회복을 추구하는 녹색문학은 분명 21세기의 지배적인 문예사조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환경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인류절멸의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최근 세계 문단과 학계에서도 기존 문학이나 학문을 생태학적 위치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른바 생태 페미니즘, 생태 탈식민주의, 생태 비평 등 앞에 ‘생태 eco’라는 접두어가 붙은 문예사조나 학문 분야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 문화부가 선정한 ‘문학의 희망’(1990) 작가이자 ‘르네상스 문학상’(1992)을 수상한 장 마르크 오베르의 생태소설 ‘대나무’(1997)는 최근 유럽의 녹색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베르트는 40년 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과 타인의 삶의 생태계를 파괴한 사람이지만, 대나무가 주는 교훈을 통해 대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나머지 40년을 오염 정화와 녹색 회복에 바친다. 그는 대나무 숲으로부터 서로 의지하며 수평으로 연결된 상호보충적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삼라만상이 서로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보는 생태주의적 시각과 상통하는 것이다.

    생태학에서는 만일 우리가 타자를 적대시해 그 연결망이 찢어지면 필연적으로 전체 생태계가 파괴된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베르트는 대나무 역시 “그 밑동 중 하나를 베면 수천의 쌍둥이들이 모두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 톱으로 그들 중 하나를 자르면 모두가 잘려나가는 아픔을 느끼고, 그들 중 하나에 물을 주면 백만의 작고 노란 나뭇잎들이 전부 시원함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이때 생태학에서 말하는 수평적 연결망은 동양의 공동체 정신과도 상통한다.

    베르트는 마치 대나무에 물을 주듯 황폐해진 자신의 삶에도 물을 준다. 그는 자신이 정화될 때, 대나무 숲처럼 자신과 연결된 타자들 역시 같이 정화되며 함께 꽃을 피우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모티프는 정화와 풍요와 재생의 상징인 ‘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녹색의 회복’에 대한 작가의 탐색과 추구로 귀결된다. 장 마르크 오베르는 생태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21세기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닫힌 체계/폐쇄 문화 비판’-A. S. 바이어트

    1990년에 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여성 소설가 A. S. 바이어트(Antonia Susan Byatt)는 ‘천사와 벌레’라는 소설을 통해 인간과 곤충 사이의 유사점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성찰한 특이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바이어트는 이 소설을 통해, 어떤 인간들은 본능의 노예가 되어 평생 비참한 벌레로 머무르는 반면, 어떤 인간들은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어 천사처럼 눈부신 비상을 한다고 말한다.

    ‘천사와 벌레’는 19세기 영국의 상류사회인 앨러배스터가에서 벌어지는 기괴하고도 음습한 비밀들을 곤충들의 생태와 연결시켜 보여주는 특이한 작품이다. 남미의 오지에서 곤충을 연구하고 귀국한 윌리엄 애덤슨은 부자인 해롤드 앨러배스터 목사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무르다가 그의 아름다운 큰딸 유제니아에게 이끌려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 집 외아들 에드거는 자신의 집안에 다른 부류의 피가 섞이는 것을 싫어하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낸다. 곤충학자인 윌리엄은 에드거의 태도에서 자신의 종족과 영역을 보호하려는 곤충의 본능을 본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은 오누이인 에드거와 유제니아의 정사를 목격하고 충격받는데, 이들의 성행위 역시 순수혈통 보존 본능에서 비롯된 음습하고 타락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닫힌 체계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환멸에 빠진 윌리엄은 집을 떠나, 유제니아의 먼 친척이자 자신의 조수인 마틸다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여성의 본능을 억제하고 학문과 자아의 패각 속에서만 살아온 마틸다는 이윽고 윌리엄 앞에서 번데기의 껍질을 벗고 한 마리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한다.

    이 소설에서 순수혈통 보존과 자기 영역 보호를 위해 본능에 매달리는 벌레 같은 사람들은 문명과 교양의 정상에 있는 상류사회인들이고, 그러한 것을 초월해 아름다운 나비(천사)가 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국외자들이다. 바이어트는 이 새로운 감각의 소설을 통해, 독자의 관심을 종족보호와 신분보존의 닫힌 체계 속에서 배타적으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문명비판과 사회비판으로 확대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뉴욕주립대에서 시를 강의하고 있는 찰스 번스틴(Charls Burnstin)은 언어시(L=A=N=G=U=A=G=E Poetry) 또는 ‘시학 프로그램(Poetics Program)’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동료 시인인 수전 하우와 벌이고 있는 이 새로운 시 운동은 각종 이데올로기, 통일성, 그리고 질서와 동화에 대한 강권으로부터 이탈한 자유롭고 독창적인 시를 추구한다. 그래서 번스틴이 말하는 ‘언어시’란 “기존의 형식과 가치관에 순응하지 않는 시, 문학적 직무로부터 자유로운 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는 발화되지 않을 소리를 들리게끔 만드는 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번스틴이 추구하는 것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과도하게 물들지 아니하되 “삭제하고 배제하기보다는 포용하고 포옹하는 시와 시학, 또는 상충하는 다양한 언어와 스타일을 포함하고 포괄하는 열린 시와 시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와 이념이 화자의 중립성을 해치는 것을 경계하며, 시 언어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진정한 소수를 배제하는 다양성과 여성적인 것을 통제하려는 남성적 목소리를 경계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시’는 비정치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처럼 보인다.

    번스틴에 의하면 시인은 텔레비전 광고 기획자만큼이나 당대의 문화에 대해 긴장하고 있어야만 하며, 시 역시 텔레비전만큼이나 재미있고 예측할 수 없어야만 한다. 그리고 시인은 언어를 통해 보이지 않는 문화적·사회적 억압을 드러내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언어시’ 시인들은 언어의 그런 힘과 완전성을 과신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완벽한 상호교류라는 낙관적인 생각 대신 다양한 무리별로 하나씩 대화하고 경청해 보자고 권유한다. ‘언어’가 다시 한번 시인들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전자매체와 문자매체의 조화-김경욱/김영하

    김경욱에게 있어서 영화나 UFO, 록음악은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환상이 아니라 또 다른 리얼리티로 들어가는 ‘문’, 즉 우리가 망각하거나 상실한 채 살고 있는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김경욱의 소설에서 현실과 영화, 또는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이 철저히 와해되는 것도 사실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예컨대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나 ‘베티를 만나러 가다’는 관습적인 소설 양식과 진부한 내러티브를 SF적 상상력과 팝뮤직의 분위기, 영화의 내러티브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 신선하고 참신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집은 무거운 문학적 주제, 진지한 존재론적 고뇌, 삶에 대한 심오한 성찰, 그리고 치열한 작가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소설문학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 신선한 가능성으로 떠오른다.

    김경욱의 주인공들이 영화 스크린 속에서 뛰어나온 사람들 같다면, 김영하의 주인공들은 마치 컴퓨터 인터넷에서 막 뛰어나온 사람들처럼 보인다. 또 김경욱의 내러티브가 영화 기법과 자주 뒤섞이는 반면 김영하의 내러티브는 늘 시각적 멀티미디어적 감각과 혼합된다. 예컨대 ‘바람이 분다’ ‘비상구’ ‘사진관 살인사건’ 같은 작품들에서 김영하는 문자매체와 전자매체 또는 활자문화와 영상문화 사이의 성공적인 대화와 혼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늘 새로운 감성과 생동하는 언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김영하의 작품이 젊은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신선함 때문일 것이다. 김영하의 작품들은 기법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주제적 측면에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변화 없는 한국문단에 김영하는 형식과 주제 모두에서 분명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비록 그의 소설들이 충분히 진지하지 못하고 무겁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그의 소설은 기성작가들과는 또 다른 시각으로 삶에 대해 성찰·고뇌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추리/환상/SF의 퓨전-김민영

    천편일률적인 요즘의 팬터지 픽션에 싫증난 독자들에게 김민영의 ‘옥스타칼리스의 아이들’은 신선한 감수성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환상세계 속에서만 사건이 벌어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기존의 환상소설과는 달리 ‘옥스타칼리스의 아이들’에서는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경계가 와해되고, 사건과 이야기가 두 영역을 넘나들며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갖고 맞물려 있다. 현실에서 시작된 사건이 어느새 환상 속의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리얼리티와 컴퓨터 그래픽 사이의 경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옥스타칼리스의 아이들’은 또 추리소설 기법과 컴퓨터 게임을 절묘하게 뒤섞고 있다는 점에서도 단순한 환상소설은 아니다. 백주에 벌어진 살인사건,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실마리는 독자들을 컴퓨터 게임 팔란티어 속으로 데리고 간다. 마치 게임 모티프가 늘 등장하는 나보코프의 소설들처럼 김민영의 이 소설도 게임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 김민영은 이 소설에서 미래를 다루는 SF적 상상력을 십분 발휘해 소설의 여러 장르를 혼합한 퓨전문학을 창출해내고 있다.

    ‘옥스타칼리스의 아이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또 고급문학과 대중문학, 그리고 순수문학과 하류장르 문학 사이의 경계가 해체되는 것을 느낀다. 김민영의 소설은 그 모든 것에 다 속하는 동시에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특이한 형태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옥스타칼리스의 아이들’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재미있으면서도 무거운 문명비판의 주제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오직 앞으로만 질주하는 과학기술과 거기에 심취된 사람들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자 가상현실이 수반하는 문제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 김민영은 가상현실 이론의 대가 스티븐 옥스타칼리스의 저서 ‘실리콘 신기루’와 팬터지 문학의 원조 톨킨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소설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 ‘옥스타칼리스의 아이들’은 국내 환상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으며 퓨전문학의 한 좋은 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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