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사람들은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인 ‘일사천리’만 보고 “당신은 빨리 쓰잖아” “쉽게 쓰잖아”라는 말을 정말 쉽게도 한다. 그러나 나는 글로 먹고 사는 일을 ‘허삼관 매혈기’(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에 빗대곤 한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허삼관은 집안에 돈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판다. 다행히 내 직업은 매혈(쓰기)보다 영양 보충(읽고 생각하기)하는 시간이 훨씬 많다.
섭취는 과다한데 배설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글쓰기를 감히 배설에 비유하다니 불쾌감을 갖는 분도 있겠지만, 묵직하던 배가 비워진 순간의 쾌감을 부인할 수는 없을 터다. 2년 전 ‘신동아’에서 별책부록 ‘글쓰기의 쾌락’을 진행할 때 원고청탁을 받은 분마다 ‘고통’이 들어갈 자리에 ‘쾌락’이 잘못 들어간 제목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정작 원고를 줄 때는 한술 더 떠 ‘글쓰기 오르가슴’이니 ‘서락(書樂)’이니 하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머릿속에 잔뜩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해서 세상을 향해 외치고 나면 다 그런 말을 하는 법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쾌락 문전에도 못 가고 늘 고통에서 멈춘다.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임재춘 지음, 마이넌) ‘한국의 비즈니스맨은 글쓰기가 두렵다’(김정금 지음, 한스미디어)와 같이 직설적인 제목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일상생활에서 글쓰기 공포를 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비즈니스맨은 글쓰기가 두렵다’의 서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침에 출근하여 하루의 일과를 메모하는 것도 작은 글쓰기요, 회의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도 역시 글쓰기의 하나이다. 뿐인가. 거래처와 고객에게 보내는 이메일은 하루 서너 통을 넘어서며, 숙제처럼 부담스러운 각종 기획서와 제안서는 또 얼마나 우리의 편두통을 부추기는가.”
얼마 전 한 리크루팅 회사가 기업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신입사원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업무능력을 물은 결과 전문성, 대인관계, 국어능력 순으로 응답이 나왔다. 실제로 기획안 및 보고서 작성과 대화, 프레젠테이션, 이메일 작성 등 일상 업무가 모두 국어능력과 관계돼 있다.
글쓰기와 함께하는 일상
요즘 젊은이들은 밤낮없이 컴퓨터 앞에 죽치고 앉아 있지만 항상 ‘안녕하셈?’ ‘짱나’ 같은 말만 쓰다보니 막상 제대로 써야 할 때 제대로 쓰지 못한다. 대학에서 광고학을 가르치는 최병광씨는 ‘RQ 글쓰기 능력’(팜파스)이라는 책에서 ‘안뇽하세여? 머 쩜 갈쳐주세염’ 하는 메일을 받으면 황당하다 못해 울컥 화가 솟구친다고 했다. 오문(誤文), 비문(非文)을 써놓고 무엇이 틀렸는지 감을 잡지도 못하는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지적해주다보면 광고학 강의가 아니라 초등학교 국어시간이 될까 염려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다잡지 않으면 이들은 세상에 나와 또 ‘글쓰기 편두통’을 앓을 게 분명하다. 다행히 ‘글쓰기의 힘’(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처럼 이런 고통을 덜어줄 책이 최근 많이 출간됐다. 쾌락에 도달하기까지 어쩔 수 없이 고통이 수반되지만 장담컨대 한번 서락(書樂)을 맛본 사람은 글쓰기에 중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