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 진석용 대전대 교수·정치외교학 qintzu@dju.ac.kr

    입력2005-08-16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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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8월15일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우리 민족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38선이 그어졌고 남북은 분단됐다. 북한 정권의 적화통일 야욕에서 빚어진 6·25전쟁은 남북의 분단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남과 북은 서로 굳게 문을 걸어 잠갔고 이념대립의 골은 깊어만 갔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반목과 적대행위로 점철된 남북 분단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남북한 국민이 본래 하나라는 평범한 진실 앞에 많은 사람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열강의 이해관계에 둘러싸인 남북한 통일의 길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과연 한반도는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의 새 역사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신동아’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남북분단의 역사를 새로 조명하고 민족통일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특별연재를 기획했다. 그 첫 회로 38선 획정의 진실을 다룬다.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을 결정한 후 38선을 경계로 미소(美蘇) 양군이 진주하고, 이후 남북에 각각 단독정권이 수립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진행돼왔고, 당시의 비밀문서들도 거의 공개됐기 때문에 관련 사실 대부분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38선의 획정과 분단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이유는 같은 사실을 놓고서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인과관계를 어떻게 엮을 것인가를 두고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38선 획정에 대해 크게 두 각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38선은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미소가 일시적으로 합의한 군사적 활동 경계에 불과했는데, 나중에 이것이 불씨가 돼 분단으로 가고 말았다는 이른바 ‘군사적 편의설’이다. 분단의 책임 문제를 논할 때, 이 설에 따르면 미소의 책임은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대신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정권을 세운 정치세력의 책임이 커진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한쪽도 단독 지배할 자신이 없어 상대방의 단독 지배를 막는 선에서, 즉 38선을 기준으로 반분하는 것으로 각각의 야심을 실현했다는 이른바 ‘정치적 음모설’이다. 다시 말해 미국과 소련이 처음부터 반씩 나누어 차지할 작정을 하고 38선을 그었다는 주장이다. 이 설은 38선이 획정될 때부터 이미 분단이 예정돼 있었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이 경우 분단의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소련에 돌아가고, 특히 38선에 의한 분할을 처음 제안한 미국 쪽이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그런 의도로 양국간 조약의 형태로 체결한 것이 있다면 후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얄타밀약설이나 포츠담밀약설 등과 같이 ‘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치적 음모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체로(그런 명시적인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분단의 구조적 원인이 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건은 그 원인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인의 원인을 추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연쇄적인 인과관계를 공간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시간적으로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에 따라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다. 보통 공간적으로 인접한 사건과 시간적으로 근접한 사건이 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또 시간과 공간의 범위 외에도, 분석의 차원과 단위에 따라 설명이 다양해질 수 있다. 국제정치의 경우 국제정치체계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구조’의 수준에서 설명을 시도할 수도 있고, ‘과정’의 수준에서 인과관계를 구성할 수도 있다. 또한 원인의 단위를 정책결정자와 같은 ‘개인’으로 볼 수도 있고, ‘국가’로 볼 수도 있고, ‘전체로서의 국제정치체계’로 볼 수도 있다. 38선과 분단의 원인에 관한 설명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내포한다. 이 글에서는 ‘중요한 원인’으로 간주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38선의 획정 경위를 설명하고자 한다.

    일반명령 제1호

    38선이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맥아더 장군이 일본군 무장해제의 지침으로 ‘일반명령 제1호’를 발포한 1945년 9월2일이다. ‘일반명령 제1호’에는 한국을 38선을 경계로 해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각각 점령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러한 내용을 소련이 통지받고 수락한 시점은 8월15~16일이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8월24일 평양에 입성하고, 8월26일에는 38선을 폐쇄함으로써 북한 점령을 완료했고, 미군은 9월8일 서울에 진주해 남한 점령을 끝냈다. 그렇다면 8월15일 이전 어느 시점에 38선이 계획됐으며, 38선을 계획한 미국과 이 제안에 동의한 소련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은 일본이 항복할 가능성이 높아진 1944년 말부터 미군 내에서 검토됐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점령지역 할당에 관한 제1절은 8월10일 밤부터 11일 아침에 걸쳐 국무-육군-해군의 3부조정위원회에서 작성됐다. 8월11일 3부조정위가 보고한 제1절 초안의 한국 관계 항목은 다음과 같다.

    b.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및 사할린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부조부대는 소련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할 것.

    f.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보조부대는 미합중국한국파견군 사령관에게 항복할 것.

    이 초안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재를 얻어 8월15일 처칠, 스탈린, 장제스 등 연합국 수뇌들에게 발송될 때까지 부분적으로 추가 수정됐는데 한국과 관계된 항목도 일본 본토 및 필리핀 점령에 관한 항목과 통합돼 새로운 항이 되고 항복 접수자도 미합중국 태평양육군총사령관, 즉 맥아더 장군으로 변경됐다. 그러나 38선 분할점령 계획 자체에는 아무런 변경이 없었으므로 38선이 획정된 시점은 8월11일, 또는 그 이전이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 정부의 공식 해명은, 전시 중 급박한 상황에서 극히 짧은 시간에 깊이 고려하지 않고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편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47년 제81차 미의회 하원외교위원회에서 웹 국무차관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1945년 8월10일 일본이 처음 항복을 제의하자 그 다음날인 11일 육군장관은 … ‘일반명령 제1호’안을 국무장관에게 제출했다. … 이 안은 11일 12일 양일간 3부조정위원회에서 토의되고 14일에는 합동참모회의의 검토를 마쳤으며, 15일에는 대통령의 결재를 얻어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타전됐다. … 영국 정부와 스탈린에게도 전달됐다. 8월16일자 회담에서 스탈린은, 그 뒤에 미국 정부가 수락한 모종의 수정을 제안했으나, 38선과 관련된 조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38선에 관한 일반명령 제1호가 아직 검토 중에 있던 8월12일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웹의 증언은 주로 ‘일반명령 제1호’의 기안과정과 공고의 경위에 대한 것으로, 38선을 획정하게 된 이유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그러나 소련과 사전협의는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어, 38선이 단순히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편의적인 분획선으로 구상됐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소련의 한반도 진공과 관련해 이해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군 어느 부대도 38선 닿기에 멀어

    그러나 소련군의 한반도 진군이 시작된 8월12일 ‘일반명령 제1호가 아직 검토 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38선의 획정에 관해 검토한 결과 분할점령안에는 아무런 변경이 없었으므로 38선의 획정 시점은 초안이 작성된 8월11일이 된다. 그러므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던 중에 38선이 획정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한편 트루먼의 ‘회고록’에도 38선이 군사적 편의에 따라 획정된 것으로 씌어져 있다.

    스탈린이 나에게 보낸 메시지나 안토노프가 맥아더에게 보낸 메시지, 또는 소련이 보낸 그밖의 어떤 메시지에도 한국점령분계선에 관한 언급이나 문의가 없었다. 나중에 큰 문제로 대두할 운명을 지닌 38도선은 양측의 어느 쪽에서도 논쟁이 되거나 흥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일반명령 제1호가 승인을 받기 위해 내게 제출됐을 당시 38도선 이남은 미국이, 그 이북은 소련군이 항복을 받도록 돼 있었다.

    나는 번스 국무장관이 미군이 가능한 한 한반도 북쪽에서 항복을 받도록 제안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육군 당국은 거리와 인력이라는 두 가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혀 있었다. 38도선조차 만일 소련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미군의 어느 부대도 닿기에는 너무 멀었다. 만일 (소련의) 반대가 있어, 오직 우리가 얼마나 북쪽까지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됐다면, 반도의 훨씬 남쪽에 선이 그어졌을 것이다.

    육군 당국은 38도선에 따라 분계선을 획정함으로써 한국의 오랜 수도 서울에서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됐음을 자랑했다. 물론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책임의 편리한 할당이라는 것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한국 문제에 관한 기왕의 모든 토의에서 소련은 한국이 독립하기에 앞서 신탁통치를 거쳐야 한다는 데 우리와 같은 의견이었다.

    간추려 말하면 ①카이로회담 이래 포츠담회담에 이르기까지 연합국의 모든 전시 회담에서 독립에 앞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 외에는 한반도의 장래에 관해 (특히 소련과) 아무런 명시적인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②‘일본의 항복을 받는 책임의 편리한 할당’이라는 관점에서 38선이 돌발적으로 획정됐으며 ③‘거리와 인력’의 한계로 38선 북쪽으로는 올라갈 수 없었고 ④38선 분할점령이라는 미국의 제의에 소련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고는 38도선 ‘훨씬 남쪽’이나 ‘훨씬 북쪽’이 아닌 바로 38도선을 분획선으로 삼게 된 경위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 38도선이건 39도선이건 분획선 그 자체가 왜 ‘책임의 편리한 할당’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회고는, 미국의 (군사적) 능력이 허락했다면 ‘훨씬 북쪽’에 분획선을 그었을 것이며, 소련의 반대가 있었더라면, ‘훨씬 남쪽’일망정 역시 38선과 유사한 분획선을 그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추론 때문에 진작부터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혹시 미소가 합의해 분할 지배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때가 오면’ 한국을 독립시킨다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1945년 7월 12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회담에선 일본에 대한 항복요구를 담은 선언이 발표됐다. 왼쪽부터 처칠 영국 총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대원수.

    다음으로 미국이 한국의 장래에 관해 공식 개입한 시점으로부터 38선이 ‘일반명령 제1호’에 규정될 때까지 미소간에 있었던 교섭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반도 문제가 연합국 사이에서 최초로 논의된 것은, 1943년 3월24일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이든 외상이 워싱턴에서 가진 회담에서다.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전후에 신탁통치가 적용돼야 할 지역으로 한국과 인도차이나를 언급했다. 영국은 이에 반대했지만 미 국무부는 루스벨트의 구상에 따라 전후의 신탁통치 계획을 진척시켰다.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은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에 관한 유보 단서를 통해 공식 표명됐다. 1943년 11월22일부터 26일까지 카이로에서 열린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의 3거두(巨頭) 회담은 12월1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때가 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전기 3대 동맹국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해, 때가 오면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다.’

    ‘때가 오면’이라는 단서에 의한 한국독립의 유보는 곧 루스벨트의 신탁통치구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스탈린도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에 동의했다.

    카이로에서 언급된 한국 탁치안은, 소련의 대일(對日)참전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열린 얄타회담에서도 재론됐다. 1945년 2월8일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을 미소중 3국 대표로 구성된 신탁통치위원회 관리 아래 둘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탁치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나, 강력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대신 영국도 이 신탁통치에 참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얄타회담에서는 한국문제가 더는 토의되지 않았다.

    전시 최후의 거두회담인 포츠담회담은 독일 패전 후 유럽의 전후 처리를 협의할 목적으로 1945년 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 열렸다. 그러나 보름에 걸친 회기 중 한국 문제를 포함한 극동의 정치 문제는 토의되지 않았다. 다만 7월26일에 발표된 포츠담선언 제8항에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돼야 하며, 또한 일본국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와 우리(연합국)가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라고 규정해 ‘때가 오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선언의 이행을 재확인했다. 수뇌회담과는 별도로, 2회에 걸쳐 열린 군사회담에서는 극동에서의 미군과 소련군의 작전범위에 관해 논의했으나 한반도와 관련된 육상작전의 한계선이나 군사점령 지역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문제가 연합국간에 공식 거론된 최초의 회담인 카이로회담에서 전시 최후의 회담인 포츠담회담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장래에 관해 연합국이 유일하게 합의한 사항은 ‘때가 오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구절로 표현된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실시’뿐이었으며, 신탁통치하 과도정부의 성격과 한국의 군사점령 및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얻는 시기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협의나 공식적인 합의도 없었다.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막연한 합의에서 38선에 의한 분할 점령으로 사태가 ‘급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포츠담회담에서 극동 문제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소련의 대일참전을 둘러싼 미소간 교섭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련의 시간 끌기와 미국의 조바심

    미국은 1941년 겨울,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 직후부터 줄곧 소련의 대일참전을 촉구했다. 개전 이튿날인 12월8일 미국은 주미 소련대사 리트비노프에게 소련의 대일참전을 권유했으며, 같은 날 중국 정부도 유사한 제안을 소련 정부에 했다. 그러나 소련은 극동에서 중립을 지킬 것이라며 참전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6월17일과 23일 두 번에 걸쳐 스탈린에게 보낸 친서에서 항공기 대여 등을 보상으로 소련측의 협력과 정보제공을 요청함으로써 협상재개를 모색했다.

    소련은 대독(對獨)전의 부담을 이유로 계속 거절하다가, 1943년 10월의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처음 참전용의를 밝혔다. 스탈린은 1943년 11월28일~12월1일에 열린 테헤란회담에서 그가 몇 주 전 모스크바에서 밝힌 참전용의를 공식 재확인했다. 즉 일단 독일이 패전하면 소련이 대일전에 가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전의 대가로 사할린섬과 쿠릴열도 할양을 요구했으며, 만주철도 사용권과 다롄항(大連港)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 소련이 극동에 부동항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루스벨트와 처칠은 다롄항이 국제적인 보증 아래 자유항이 돼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후 소련의 대일참전 문제는, 처칠의 소련 방문을 계기로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미소간 교섭에서 대체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미국은 소련이 참전할 경우 소련군의 전략목표를 다음과 같이 지정했다.

    1.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디보스토크반도 확보.2. 연해주 및 캄차카 반도에서 대일작전을 하기 위한 미소용 전략공군 설치.3. 일본 본토와 아시아 대륙간 연락로 차단.4. 만주 소재 일본군 육공병력 격멸.5. 태평양 보급선 확보.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의 작전범위를 만주에 국한시킨 넷째 항에 이의를 제기했다. 스탈린은 일본군을 격멸하기 위해서는 서쪽에서는 장자커우(張家口)와 베이징(北京)을 강타해야 하고 동쪽에서도 북한의 여러 항구를 소련이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에 대해 미국측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미국이 소련의 군사적 역할을 만주의 일본군을 격멸하는 것으로 한정하려고 한 것은, 다시 말해 한반도를 소련군의 작전대상에서 제외하려고 한 것은 결코 ‘군사적 편의’에 따른 것이 아니다. 1944년 봄 이래 한국의 전후처리를 검토해오던 국무부는 한국의 정치적 장래가 미영소에 모두 중요한 관심사라는 인식에 따라 군사작전 및 점령으로부터 감독 및 신탁통치에 이르는 일련의 단계에 관계국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한국의 군사작전에 참가하는 나라는 전후 한국 관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한국 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그만큼 강할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한국의 전후 관리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국 내지 그 주변의 군사작전에 참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타국에 의한 단독 관리에 대해, 특히 소련을 상정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한국이 독립과정에 소련의 관리를 받는 것은 중대한 정치적 문제를 유발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이 소비에트화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또한 미국도 그와 같은 전개를 장래 태평양지역의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다.

    미 국무부와 군 당국의 견해 차

    소련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심화된 것은 유럽 점령 과정에서 소련이 취한 팽창주의적 행동 때문이다. 얄타회담 직전에 ‘한국 문제에 관한 연합국 상호간의 협의’라는 표제 아래 준비된 한 보고서는 이 점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연합국의 육해공군 작전에 관한 문제는 순전히 군사적인 성격의 것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국무부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하나 어느 단일국가가 한국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결국 한국을 점령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난처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 따라서 한국에서 군사작전이 완료되는 즉시 한국 점령군 및 주한군정청에는 연합국의 각국 대표가 파견돼야 하며 …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점령 및 주한군정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 소련의 대일전 참가는 한국에 소련군 진출을 초래할 것이며 그것은 점령군 구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소련이 한국에 대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을 감안하면, 설혹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대한 군사점령에 동참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즉 이 문서는 정치적 관점에서 미국이 한국 점령과 군정에 주도적인 구실을 해야 한다고 제언하는 것이다.

    한편 국무부와 달리 군 당국은 순수한 군사적 관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보았다. 테헤란회담에서 스탈린이 대일참전을 약속하자 미영 연합참모본부는 소련이 되도록 빨리 대일전에 참가하게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왜냐하면 태평양 방면에서 미군의 반격과 일본 본토에 대한 최종 공격작전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륙의 일본군에 대한 본토 후원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 군부의 구상은 한반도를 포함해 대륙과 교통을 단절시킴으로써 일본 본토를 완전히 봉쇄, 일본의 군사력을 본토와 대륙부로 분산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주와 이어져 30만의 일본군이 배치돼 있는 한반도가 소련의 전략목표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볼 때 소련의 전략목표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야심을 경계하고, 대신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한 미 국무부의 용의주도한 구상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카이로회담 이래 소련의 정치적 야심을 경계해온 미국이 왜 포츠담회담에서 그 문제에 대해 소련과 명시적인 합의를 하지 않았을까?

    소련의 세력 확장을 막아라

    미 국무부는 일찍부터 포츠담회담을 극동 문제를 토의하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트루먼에게 건의할 정책대안을 마련했다. 우선 군사 면에서는 1945년 6월18일 대통령과 군 지도자의 회담에서 대일전 수행방침이 확인됐는데, 그 주된 내용은 규슈상륙작전을 11월1일 실시할 것과 그 사이에 미군의 인명 손실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참전을 실현할 것 등이었다. 국무부의 전후처리에 관한 정책입안도 이러한 군사적 방침을 고려해 소련의 대일참전을 전제로 추진됐다.

    미국은 이미 본토 점령이 계획돼 있는 일본에 관해서는 소련과 어떠한 협의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소련의 대일참전에 따른 군사적 진출로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게 될 중국, 특히 만주와 한국은 소련과 사전협의가 필요한 지역이었다. 국무부는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소련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했다.

    6월29일자 한 보고서는 “한국을 강력하고도 민주적인 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최선의 조치가 여하한 것인지에 대해 3대국(미영소)은 중국의 협력을 얻어 합의에 도달해야”하며, 최소한 “3대국 중 어느 일국이 일방적인 행동으로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도록” “소련으로부터 카이로선언을 준수한다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일자 미상의 다른 보고서 역시 “카이로선언을 준수한다는 소련 정부의 약속은 극동지역 및 태평양지역에서 미소가 취할 행동방침에 관한 세부적인 양해에 의해 보충될 필요가 있는 바, 그러한 양해는 만주와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 전체, 그리고 한국에서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소련의 예상되는 기도를 방지하는 데 필수적일 것으로 생각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른 김구 선생 일행이 38선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은 선우진 보좌관, 오른쪽은 아들 김신씨.

    당시 소련 주재 미국대사이던 해리먼도 트루먼에게 같은 취지로 보고했다. 소련의 대일참전 대가에 관한 협상이 스탈린과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 사이에 6월30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렸을 때, 그 회담의 진전상황에 관해 상세히 보고해달라는 트루먼의 요청에 따라 해리먼이 워싱턴으로 보낸 보고 전문에는 한국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돼 있다.

    송자문이 알기에 소련은 시베리아에서 훈련된 한국군 2개 사단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이 군대를 한국에 남겨놓을 것이며, 소련에서 훈련된 정치인들도 한국으로 데려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송자문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4개국 신탁통치 아래서도 소련이 한국 문제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보고는 해리먼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중국에 대한 소련의 ‘과도한’ 요구, 즉 외몽골의 독립과 중국 동부 및 남부 만주철도의 소유권, 그리고 다롄항과 뤼순(旅順)항의 운영권 등 소련의 극동진출에 극도의 경계심을 갖게 된 송자문의 견해를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최소한 소련이 한국에 친소(親蘇)정권 수립을 기도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트루먼에게 상기시키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충고는 포츠담회담이 열리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트루먼과 국무장관 번스가 포츠담에 도착한 이튿날인 7월16일, 다른 경로로 현지에 도착한 스팀슨 육군장관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각서를 국무장관을 경유해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소련은 4개국 신탁에 동의했으되 현재로는 상세하게 합의된 바 없으며, 스탈린은 외국군이 한국에 주둔하지 않기를 촉구한다고 본관은 알고 있습니다. 본관의 정보로는 소련은 이미 1, 2개 한국인 사단의 훈련을 완료했으며 이 군사력을 한국에서 사용할 의도를 지닌 것으로 추상됩니다. 만약 국제신탁이 한국에 설치되지 않는 경우 혹은 설치되는 경우라도 이들 한국인 사단은 상당한 지배력을 발휘해 독립정부이기보다는 오히려 소련 지배하의 지방정부가 되는 정권수립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극동에 옮겨놓은 폴란드 문제입니다. 본관은 신탁통치안을 강력히 추진할 것과, 신탁통치 기간에 최소한 미군의 상징적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요컨대 국무부와 해리먼 주소대사, 스팀슨 육군장관 등 트루먼의 측근들은 극동문제에 관한 한 한결같이 한국을 소련의 세력확장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강구할 것을 권고했다.

    대일전 조기종결 방침과 원자폭탄

    15일간(7.17.~8.2.)에 걸친 포츠담회담은 전시 3거두 회담 중 그 회기가 가장 길었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 문제를 포함한 극동의 정치 문제는 토의되지 않았다. 7월22일의 본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가 의제로 제기되자 스탈린이 “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측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만일 트루먼이나 번스가 국무부의 정책권고를 유념하고 있었더라면, 한국 문제는 소련측의 발의가 없었더라도 미국측이 먼저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보다도 그 장래를 훨씬 더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던 만주 문제도 다루지 않았다.

    포츠담회담에서 한국과 만주 등 극동의 정치 문제가 토의되지 않은 것은 트루먼과 번스가 포츠담회담의 개회 직전 또는 벽두에 발생한 몇 가지 정세변화를 근거로 해 소련이 참전하기 이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로 ‘돌연히’ 정책을 바꿨기 때문이다. 만일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태평양전쟁을 종결할 수만 있다면 소련의 대일참전을 전제로 한 얄타협정 자체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굳이 포츠담에서 극동 문제를 놓고 소련과 왈가왈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트루먼과 번스가 ‘대일전의 조기종결’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일본이 종전(終戰)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일본의 암호를 해독해 포츠담회담이 시작되기 수일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둘째, 소련이 대일참전을 늦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얄타협정에 따르면, 소련은 늦어도 독일 패전(1945년 5월8일) 후 꼭 3개월째가 되는 8월8일까지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포츠담회담 첫날인 7월17일 “8월 중순까지 대일작전 준비를 종료할 것이지만, 그 이전에 중소(中蘇) 교섭이 완료돼야 한다”고 말한 데 이어 이튿날인 18일에는 8월15일 전에는 대일참전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 작전준비를 구실로 참전을 늦췄다.

    셋째,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됐다는 점이다. 미국이 원폭실험에 성공한 것은 1945년 7월16일의 일이다. 이 소식은 트루먼과 번스에게 지급전으로 전달됐다. 트루먼은 번스 국무장관, 레이히 제독, 마셜 장군, 아놀드 장군 및 킹 제독 을 소집해 이 혁명적인 원자폭탄의 개발이 가져올 새로운 사태를 군사전략 면에서 검토했다.

    요컨대 소련은 참전을 계속 미루고 일본은 항복을 고려하는 상황에서 원자폭탄까지 확보했기 때문에 ‘소련 참전 이전의 대일전 종결’은 미국 처지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그리고 실현 가능한 정책대안으로 보였던 것이다.

    예상보다 늦어진 일본의 항복

    포츠담회담 종반에 이르면서 트루먼은 대일전 조기종결 결심을 굳혔다. 트루먼은 회담기간에 스탈린에게서 받은 인상이나 소련이 유럽에서 보인 팽창주의적인 행동에 비추어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태평양전쟁을 종결하는 것이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어떠한 대안보다도 나은 정책임을 확신했다.

    바로 이 무렵 미 군부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가 될 규슈 침공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포츠담회담 직전에 이루어진 오키나와 탈취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미 군부는 규슈 작전에 대한 일본군의 저항은 필사적일 것이며 그에 따라 인명피해도 막대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마셜 장군은 일본 본토를 침공해 항복시키려면 50만명의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처럼 일본의 완강한 저항과 미국의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는 규슈 침공작전을 위해 미 군사력을 오키나와, 필리핀의 루손, 괌, 하와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니미츠 제독과 맥아더는 일본의 돌연한 항복에 대비해 군사점령을 위한 비상계획을 임시로 세워뒀지만 시야가 일본에 한정돼 있었다. 더욱이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점령작전과 규슈 침공작전은 한편으로는 보완적인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점령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규슈 침공작전에 동원한 군사력을 재배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1945년 가을에 일본 본토에 대한 대규모 침공작전을 감행한다는, 맥아더가 설정한 군사 목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이 조기 항복할 경우 아시아의 주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다”는 트루먼의 정치적 목표와 규슈 침공을 우선 고려한 맥아더의 군사적 목표가 충분히 조정되지 못한 시점에 트루먼은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했다. 원폭은 투하됐고 일본은 크게 동요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 결정은 트루먼이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이루어졌다. 일본이 비틀거리며 종전을 모색하는 동안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만주로 진공했다.

    “소련과의 분할점령에 대비하라”

    소련이 대일전에 가담하고 일본이 항복의사를 표명한 상황에서도 트루먼은 여전히 일본 본토를 넘어 극동의 주요 지역을 장악한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집착했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고 한국 점령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됐을 때, 번스는 “가능한 한 북쪽에서 항복을 접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규슈 침공작전에 맞추어 배치된 미국의 군사력은 트루먼이 설정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앞서 언급했듯 “거리와 인력의 두 가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서 미국은 하나의 타협안으로 38도선을 분획선으로 제의했다.(이완범 교수는 역작 ‘삼팔선 획정의 진실’(2001)에서 포츠담회담이 진행 중이던 7월24일 시점에 “소련과의 분할점령에 대비하라”는 번스의 지시에 따라 전쟁부 작전국장 헐 중장이 38선을 제시했다고 주장하면서 헐의 회고와 기타 몇 가지 자료를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비한 검토안 중 하나였는지, 그 선을 점령분계선으로 소련과 비밀리에 합의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교수는 미국이 38선 획정 문제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비밀리에 추진했거나 관련 기록을 고의로 폐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 군사적으로 미국보다 훨씬 유리한 위지에 있던 소련이 한반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자제’하면서 미국의 38선 분할 제의를 이의 없이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첫째, 미군과 마찬가지로 소련 군부도 관동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했을 수 있다. 즉 관동군의 강한 저항을 고려할 때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미국과 소련 모두 자국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군사적 능력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한반도가 상대방의 세력권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 분할점령으로 반쪽이나마 차지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 대신 분단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한반도의 분획선으로 38선이 선택된 것은 비록 군사적 편의조치였는지 몰라도 38선 따위의 분획선이 한반도에 등장한 것이 열강의 정치적 흥정의 결과였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 않다.

    모리타(森田芳夫)는 저서 ‘조선종전의 기록’에서 오다카(尾高朝雄)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은 8월9일 밤에 열린 어전회의에서였다. 만약 이 결정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6일에 이루어졌다면, 소련은 참전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고, 38도선에 의한 한반도 분할이라는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면 8월9일의 심야회의에서 초토결전의 강경론이 득세했더라면, 소련군의 기갑부대는 한반도로 남하하고, 미국이 인명피해를 두려워해 상륙작전을 늦추는 동안, 소련군은 남쿠릴, 홋카이도, 오우(奧羽)까지 진출해 마침내 일본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됐을 것이다. 8월9일 밤 천황의 결단은 일본을 이러한 비운에서 건졌지만, 한국이 일본을 대신해 분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항복이 더 빨랐더라면, 한국은 일본처럼 미국의 단독 지배를 받아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며, 일본이 저항을 계속했더라면 한국은 소련의 단독 지배를 받아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 관찰에서 우리는 약소국을 희생시키는 강국 정치의 흥정이 때로는 ‘세력균형’의 이름으로, 때로는 ‘보상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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