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둘의 나이에 ‘황제비의 아버지’인 부원군에 올라 권력과 명예를 한손에 거머쥔 인물. 그러나 그가 버리지 못한 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수천억원의 돈을 빚지고 중국으로 도망쳐 끝내 타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은 윤택영 일가의 수난기를 통해, 욕망과 허세, 비리와 친일행각이 빚은 구한말 최고지배층의 처참한 최후를 들여다본다.
‘동아일보’ 1920년 7월11일자에 실린 윤택영 부자의 출국 관련기사. 베이징에 유람을 갔다가 한 달 후에 돌아오겠다던 윤택영 부자는 7년이 지나도록 귀국하지 않았다.
세상 이치가 이럴진대 빚내준 사람이 답답하지, 빚진 사람이 아쉬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빚진 사람은 빚쟁이보다 월등히 높은 지위를 점하기 때문에 아무나 빚을 끌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빚내는 것도 ‘능력’이요 ‘재능’이다.
돈이 필요한데 없으면 빌려야 한다. 고지식하게 빚내기를 주저하다간 평생 구멍가게 주인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기왕에 빚을 질 바에야 크게 지는 게 낫다. 1000만원 빌린 사람이 추가로 1억원 빌리기는 힘들어도, 1000억원 빌린 사람이 추가로 1억원 빌리기는 손바닥 뒤집기만큼이나 쉽다.
게다가 큰 빚을 지게 되면 ‘하늘 같은’ 빚쟁이에게 큰소리칠 수도 있다. 빚쟁이도 합리적인 경제인인지라, 잔챙이 채무자에게는 막 대할지라도 큰 채무자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자칫 거금을 떼여 알거지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내 돈 아닌 내 돈’이라는 빚의 속성은 액수가 크나 작으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어서, 쓸 때는 좋지만 갚으려면 속이 여간 쓰라린 게 아니다. 또한 아무리 속이 쓰리다 해도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한다. 빚쟁이가 채무자를 막 대하지 못하는 것은 예뻐서가 아닐뿐더러, 빚쟁이의 인내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80년 전 윤택영 후작이 그랬던 것처럼, 제 나라 제 집에서 등 붙이고 살기 힘들어진다.
차금대왕 윤택영 후작
1926년 5월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국장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장은 순종이 타계한 4월25일부터 인산일(因山日)인 6월10일까지 46일간 이어졌다. 온 나라가 애도 분위기에 싸여 있을 때,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엉뚱한 인물이 있었다. 다음은 ‘개벽’ ‘회고 조선 500년 특집호’에 ‘뜬금 없이’ 실린 기사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의 형 ‘대갈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
후작이면 후작이지 ‘부채왕’은 무슨 말일까. 근신하고 삼가야 할 국상 중에 웬 빚받이 소송이란 말인가. 빚 떼먹고 해외로 도망간 사람이 ‘나 돌아왔소’ 소문내고 귀국한 이유는 무엇인가. 윤택영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웠다는 ‘대갈대감’은 또 누구일까. 좀더 살펴보자.
조선의 마지막 국모인 비운의 여인 순정효황후. 품성이 남달리 어질던 순정효황후는 가족들의 방탕한 생활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번엔 ‘왕’으로도 모자라 ‘대왕’이란다. 윤택영 후작이 빚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졌던 모양이다. 창덕궁 내전에 칩거했다면 황실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일 테고,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후작이라면 권세도 상당했을 텐데, 어쩌다 그처럼 많은 빚을 지고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부터 ‘채무왕’ ‘부채왕’ ‘차금대왕’ ‘대채왕(大債王)’으로 불리며 ‘빚의 제왕’으로 일세를 풍미한 윤택영의 인생유전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윤택영 후작이 ‘빚의 제왕’으로 군림한 것은 1906년 대한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여러 가문에서 동궁계비(東宮繼妃) 책봉운동을 벌였다. 윤택영도 자기 딸을 태자비로 앉히기 위해 황실에 요샛말로 가열차게 ‘로비’를 했다. 50만원(오늘날로 치면 500억원)의 엄청난 ‘운동비(로비자금)’를 쏟아부은 결과 윤택영의 열세 살 난 셋째딸이 동궁계비에 책봉된다.
당시 윤택영(1876년생)의 나이는 고작 서른하나였다. 시운(時運)이 따랐는지 윤택영이 황태자의 장인이 된 지 1년 만인 1907년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한다. 윤택영은 불과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황제의 장인 ‘해풍부원군’이 되어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움켜쥔다.
윤택영씨는 해풍부원군을 봉하시고 정일품상보국(正一品上輔國)을 제수하였다더라. (‘신한민보’ 1907년 7월4일자)
권력도 얻고, 명예도 얻었지만 윤택영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황실과 사돈을 맺기 위해 쏟아부은 50만원의 ‘운동비’ 태반이 빚이었던 탓이다. 어지간한 규모의 돈이었으면 참봉첩지라도 팔아 메울 수 있었겠지만, 워낙 큰 빚인 터라 100원씩 1000원씩 벌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곤궁에 처한 윤택영은 여느 사람 같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채무해결책을 생각해낸다.
해풍부원군 윤택영씨는 황후폐하 가례 시에 빚진 것이 50만~60만원에 달하여 곤란이 가볍지 않으므로 황실에서 물어주기를 희망한다더라. (‘신한민보’ 1910년 2월16자)
윤택영은 다짜고짜 황제를 찾아가 “폐하, 장인 빚 좀 갚아주시옵소서” 하며 생떼를 부린 것이다. 거듭 요청했는데도 황실에서 들어주지 않자 윤택영은 눈을 해외로 돌렸다. ‘허울뿐인 대한제국 황실에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빚을 떠넘기려면 돈 있는 곳에 줄을 대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 정부에 손을 벌린다.
해풍부원군 윤택영씨는 황후폐하 가례시에 50만원 빚을 졌는데 황실에서 물어주기를 운동하다가 아니 되므로 장차 일본으로 건너가 운동코자 한다더라. (‘신한민보’ 1909년 9월1일자)
일본 정부가 무슨 자선단체도 아니고 사위도 안 갚아주는 빚을 대신 갚아줄 리 있겠는가. 일본 정부는 이웃나라 황제 장인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설 윤택영이 아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실과 통감부에 자기 빚을 갚아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윤택영이 황실과 통감부를 상대로 채무해결 운동을 벌인 지 1년 만에 채무를 일거에 해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호시탐탐 국권을 노리던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을 단행한 것이다. 윤택영은 황실의 외척으로 합방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에 봉작되고, 은사공채(恩賜公債·한일합방 유공자에게 총독부가 내린 사례금) 20만원을 받는다. 채무를 완전히 털어버릴 수는 없는 금액이었지만, 그럭저럭 빚쟁이들을 무마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본인 재산은 300원뿐
그렇게 마음고생이 끝나는가 하는 순간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다. 새까맣게 잊고 있던 10년 전 채권자 김영규가 출현해 “왜 나는 쏙 빼놓고 다른 사람 돈만 갚느냐”고 다그친 것이다. 윤택영은 동궁계비 책봉운동을 벌이기 5년 전인 1902년, 김영규에게 9만5000원을 차용하고 갚지 않았다. 참다 못한 김영규는 3년 후인 1905년 소송을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는다. 김영규는 강제집행에 들어가려 했으나 윤택영이 중재자를 넣어 집행을 잠시 유예시킨다. 조만간 갚겠다고 약속한 윤택영은 그 길로 다른 이에게서 50만원을 빚내 동궁계비 책봉운동에 들어갔다. 요즘말로 하자면 아주 상습적인 악성 채무자였다.
김영규는 윤택영이 진 빚을 대신 받아줄 것을 총독부에 여러 차례 청원했다. 하지만 총독부가 조선황실을 의식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1911년 3월 변호사에게 의뢰해 윤택영 소유 동산의 강제집행에 들어갔다.
윤택영 후작은 타인에 대한 채무는 점차 상환하지만 김영규의 채무는 조금도 반환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김영규는 총독부에 수차 청원하였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얻지 못한 까닭에 지난달 말에 일본인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윤씨의 동산을 집행케 하였다. 그러나 윤택영의 소유 재산이 겨우 300여 원에 불과하여, 집행하기 위해 찾아갔던 집달리(執達吏)도 의외의 상황에 “이것이 과연 조선귀족 대표의 재산일리오” 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법은 법인지라 전재산에 봉인을 붙이고 돌아왔다. 경매는 지난 10일에 열렸다. 각 물품을 일일이 1전, 2전으로부터 경매에 부쳤는데 부인용 의류 중에 좋은 것이 있어 겨우 1100원을 회수하였다. 원래 윤택영 후작은 지난날에 다액의 은사공채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밖에도 다수한 재산을 숨겨둔 의혹이 있으며, 또는 타인의 명의로 옮겨놓은 재산이 있을 개연성이 있다. 김영규는 끝까지 추적하여 이와 같은 사실이 드러나면 이번에 기어이 ‘재산은닉죄’로 고소할 것이라 한다. (‘매일신보’ 1911년 4월13일자 ‘윤후의 재산경매’)
윤택영 후작은 10만원에 가까운 남의 돈을 갖다 쓰고도 10년 동안이나 갚지 않고 버티다 급기야 ‘아내의 옷가지’까지 경매에 부쳐지는 수모를 겪는다. 옷가지조차 경매 당한 그의 아내는 여염집 주부가 아니라 ‘황제의 장모’였다. 집안 망신이기 이전에 황실의 망신이었다. 더욱이 윤택영은 조선귀족 대표로 극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채무집행을 위해 찾아온 집달리에게 “본인 재산은 300원밖에 없다”고 우긴다. 이 말이 새빨간 거짓말임은 다음의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후작 윤택영씨가 가택을 수리하다가 경비가 부족하여 공사를 정지하였다더니 어떤 일본인에게 소유 전답문서를 잡히고 금화 4만원을 차입하여 일전부터 그 공사를 다시 착수하였다더라. (‘매일신보’ 1912년 1월5일자)
빚쟁이에게 줄 수 있는 돈은 300원밖에 없었지만, 호화롭고·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쓸 돈은 마르지 않고 샘솟았던 모양이다. 빚을 깔고 사는 게 궁색하게 사는 것보다 나았던 것일까. 윤택영은 빚 때문에 그처럼 수난을 겪은 후에도 차압 딱지 뗀 지 불과 1년 만에 집수리를 한답시고 또다시 전답문서를 잡혀 4만원을 빌렸다. 당시 고급주택 한 채의 가격은 1만원이었다.
“한 달 후 다시 이곳에서 만나겠소”
빚을 지고, 호화로운 생활로 탕진하고, 차압 들어오고, 경매 당하고, 또 빚을 지고, 또다시 탕진하는 악순환은 그로부터 10년을 두고 이어졌다. 호화로운 그의 집에는 수시로 집달리가 찾아와 차압 딱지를 붙이고 돌아갔다. 일본왕이 하사한 화병, 고종이 하사한 친필서첩 등 당시로서는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귀한 물건에도 차압 딱지가 더덕더덕 붙었다. 몇 천원씩 집행당한 경매가 10여 차례 이어졌다.
후작 윤택영씨는 여러 해 동안 남의 빚진 것이 1만100여 원에 달하였다는데 근일 내 두 차례 동안 집행을 당하여 제1회 8천원 제2회 3천원 가치를 집행하였다더라. (‘조선일보’ 1920년 7월1일자)
자신의 빚이 얼마나 되는지는 윤택영 후작 본인도 알지 못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차용증서를 내밀면 그제서야 ‘썼나보다’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빚과 소송에 시달리길 어언 10년, 1920년 봄부터 서울시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윤택영 후작이 큰아들 윤홍섭을 포함한 가족 전부를 데리고 중국 베이징으로 도주한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의 빚이 기백만원이라는 둥, 조선총독이 윤택영 후작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재산이 정리될 때까지 잠시 해외로 나가 있으라고 했다는 둥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실 확인차 방문한 기자에게 큰아들 윤홍섭은 이렇게 말했다.
윤택영의 가족. 왼쪽부터 ‘채무왕’ 윤택영, 모친, ‘대갈대감’ 윤덕영.
윤택영 부자가 중국어 통역관 한 명, ‘경호순사’ 한 명을 데리고 베이징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은 1920년 7월8일이었다. 거물급 인사의 출국 장면이 으레 그러하듯 총독부와 황실에서도 사람을 보내 일행의 장도를 배웅했다. 중국으로 떠나는 윤택영 후작은 재회색의 양복에 질박한 검은 넥타이를 매고 고색창연한 ‘파나마 모자’를 썼는데 표정은 매우 밝았다. 한마디 해달라는 기자에게 윤택영 후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처럼 나와주시니 고맙소. 이번 길에 대하여 세상에서는 별별 풍설이 다 많은 모양이나 내용은 결코 그렇게 복잡치 않소. 단순한 유람에 지나지 않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세상의 오해를 아무쪼록 덜어주시기 바라오. 모모 신문에서는 내 집이 파산을 한 원인은 나의 자질이 부랑한 결과이라고까지 하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소. 과연 내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채가 많았는데 도무지 귀찮아서 아주 내어 맡긴 것이니 이점 또한 곡해치 말아주시오. 목적지가 북경이므로 체류할 동안에도 북경을 중심으로 삼고 그 부근을 혹 순유할지도 모르나 좌우간 약 1개월 후이면 다시 이곳에서 만나겠소.” (‘동아일보’ 1920년 7월11일자)
전 재산을 ‘채귀(債鬼· 빚귀신)’에게 던지고 큰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나며 윤택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1개월 후에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1개월이 지나고, 그해가 저물어도 윤택영은 돌아오지 않았다.
북경 엿장수
그가 베이징으로 출발한 직후 채권자들 사이에서는 윤택영이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황실의 비밀임무’를 띠고 간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후작 윤택영씨가 최근 중국 북경을 향하여 출발함은 모두 아는 바거니와 후작의 북경 출발에 대하야 여러 가지 풍설이 있는바, 요사이 전하는 바에 의지하면 승하하옵신 덕수궁 태왕 전하께옵서 지금부터 20년 전에 지나 대총통 원세개(袁世凱)에게 사적으로 금화 30만원을 뀌어주신 일이 있었고 돈 뀌어주시었다는 증서가 있던 바 근래에 발견되었으므로, 윤 후작은 그 돈을 원세개의 유족에게 받기 위하여 증서를 가지고 건너간 일이라더라. (‘조선일보’ 1920년 7월29일자)
설령 황실이 위안스카이에게서 받을 돈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채무왕’에게 ‘채권추심’의 밀명을 맡길 리 있겠는가. 윤택영 부자가 베이징으로 건너간 진짜 이유는 자기집 재산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리인을 시켜 재산을 정리한 후, 소위 ‘빚잔치’를 하고 채무를 탕감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아 베이징에서 발이 묶인 것이다.
윤택영 후작은 베이징에서 안 돌아온 것일까, 못 돌아온 것일까. 윤택영은 중국에 당도한 지 며칠이 되기도 전에 “여기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귀국을 희망했다. 고국에는 빚으로 지은 집일망정 호화로운 저택이 있고, ‘채무왕’이라 손가락질 당할망정 ‘황제 장인’과 ‘후작’이라는 위세가 있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그는 초라하게 늙어가는 초로의 도망자일 뿐이었다. 윤택영은 항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했지만 채권자들과 교섭이 타결되기 전에는 결코 귀국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천만사에 성공은 없고 항상 낭패가 많은 결과로 각처의 채무가 일신을 괴롭게 하여, 할 수 없이 종말에는 작년 8월경에 종자 세 사람과 자제 윤홍섭을 데리고 중국 북경으로 들어가 1년 동안을 적막하게 지내는 후작 윤택영씨는, 북경에 도착한 후에 두어 날을 지나지 않아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소리가 아주 입에 올라서 조선 산천을 항상 그리워한 바 종자와 주위 사람의 만류로 간신히 오늘까지 참아온 터이다. 요사이는 하루에 세끼 식사도 변변치 못하므로 주위에 있는 종자들은 비상히 근심하고 여러 가지 근심을 잊어버리게 하기 위하여 고심 중이라는데 혹은 창덕궁 기타에 교섭이 된 후에 조선으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더라. (‘조선일보’ 1921년 7월26일자 ‘윤택영 후작의 동정’)
극심한 향수병에다 이역만리에서 생전 처음 끼니조차 챙겨 먹기 힘든 극심한 가난까지 겪고보니 ‘황제 장인’ ‘후작’ 신세가 말이 아니었다. 수년이 지나도 윤택영이 귀국하지 않자 서울에서는 다시 심상찮은 소문이 나돌았다.
수백만원의 재산을 탕진하고 조선을 떠나 중국 북경 방면에서 표랑(漂浪)하는 윤택영 후작은 요사이 북경에서 극도의 생활곤란에 빠진 결과 이왕직으로부터 누누이 생활비를 받아오던 중, 최근에는 그 생활이 더욱 곤란하게 되었으므로 목하 윤씨는 무엇이든지 해 가지고 일신을 안정시키고자 밀사를 경성에 파견하여 ‘엿장수’를 할 만한 자금을 얻고자 하는 중이라더라. (‘동아일보’ 1926년 2월4일자 ‘이역에서 엿장사, 윤택영 후작의 말로’)
베이징에서 엿장사할 돈도 남의 돈을 빌려 마련하려 했으니, 과연 운택영에게 붙은 ‘채무왕’이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을 만하다.
쇄도하는 빚받이 소송
윤택영 부자가 베이징으로 도주한 후 채권단과의 교섭은 날로 악화됐다. 교섭이 지지부진한 채로 1년을 넘기자 빚쟁이들은 무리를 지어 빚받이 소송을 제기했다. 10년 전 빚받이 소송이 1만원, 10만원 단위였다면, 이번에는 100만원 단위라는 차이가 있었다. 윤택영이 중국으로 피신한 이듬해 이해승 후작 외 조선인 76명, 해동은행 외 7개 은행이 240만원 사기횡령 소송을 제기했다.
후작 윤택영씨가 돌연히 북경으로 간 후 경성에서는 여러 가지 풍설이 많고 또 경기도 경찰부와 종로경찰서에서는 윤씨 사건에 관련된 심상익씨를 잡으려고 경관을 북경까지 보냈으나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윤씨의 죄상은 조사한 결과 사기·횡령등으로 그 범죄금액은 240만원에 달한다. 윤씨의 범죄원인은 1920년 2월에 부채를 정리하며 살림을 정돈하는데 돈이 부족하였고, 뚝섬의 낙화생(落花生·땅콩) 재배에 실패하고, 영식 윤홍섭씨가 미두(米豆) 투기에 큰 실패를 본 까닭이라더라. (‘동아일보’ 1921년 5월26일자)
베이징으로 떠나기 직전 윤택영·홍섭 부자는 쓰러져가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윤택영 후작은 귀족이 중심이 되어 신설한 ‘해동은행’의 창립 발기인이자 대주주로 참여했는데, 주식은 배정받고도 주금(株金)을 납입하지 않고 중국으로 도주하여 주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주주들은 해동은행 전무이자 윤택영의 측근인 심상익을 베이징에 보내 미납한 주금을 받아오게 했는데, 심상익은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 수십만원의 은행돈을 횡령해 도주했다. 주주들은 심상익의 횡령사건에 윤택영도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믿었다.
윤택영의 형 윤덕영 자작은 애초 해동은행의 사장에 내정되어 있었지만, 동생이 수백만원의 채무를 지고 해외로 도주하고 자신 또한 고종황제 국장 때 ‘분참봉첩지’를 위조해 팔다가 검찰수사를 받게 됨으로써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낙마했다. 윤덕영 자작의 주도로 다수의 귀족이 연루된 ‘분참봉첩지 위조사건’이란, 황제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임시직 관리 ‘분참봉’에 임명한다는 첩지를 다량으로 위조하여 ‘양반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선전하며 팔고 다니다가 꼬리가 밟힌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어쨌든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해동은행의 대주주로 나섰던 윤택영은 도리어 사기·횡령의 파렴치한으로 내몰렸다.
윤홍섭은 아비의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이 ‘미두(米豆) 투기’를 통한 일확천금이라 생각하고 미두에 손을 댔다가 집안의 빚을 걷잡을 수 없이 늘려놓았다. 더욱이 베이징으로 도주하기 직전에는 친척인 이해승 후작과 교섭하여 일본인 귀족의 토지를 담보로 잡히고 34만원의 돈을 고리로 빌려 순전히 집안일에 소비한 일도 있다. 이 거래에 보증을 섰던 이해승 후작은, 아무리 동료 귀족이고 친척이라 할지라도 34만원의 채무를 도저히 혼자 떠안을 수는 없었기에 염치불구하고 윤택영 부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윤택영 부자가 베이징으로 도피한 지 만 3년째 되던 1923년에 도변경조(渡邊慶造), 가등학송(加藤鶴松) 외 12인이 산 사람을 경제적으로는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셈인 파산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
시내 간동 97번지 후작 윤택영씨가 수년 전에 주야로 못살게 구는 채금(債金)의 독촉을 견디지 못하여 장남 홍섭씨를 이끌고 비밀리에 경성을 떠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간 후에, 모든 채권자들은 씨의 돌아오기를 고대하였으나 오늘날까지 아무런 소식조차 없으므로, 결국 채권자들이 모여 협의한 결과 지나간 14일에 목숨 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선언함이나 다름없는 파산신청을 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 제기하였다.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시내 황금정(黃金町) 도변경조(渡邊慶造)와 화원정(花園町) 가등학송(加藤鶴松) 외 12인으로 목미(木尾), 적미(赤尾) 두 변호사가 대리인이 되어 파산을 신청하였는데, 그 신청서에 씌어 있는 내용을 보면 피신청인 윤택영과 윤홍섭은 연대하여 1920년 3월 중에 신청인들에게 대하여 50만원이라는 거액에 달하는 부채를 지고 그 변상기일인 1920년 4월30일에 이르러서도 원리금을 갚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이르는 동안에 전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원리금의 변상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이자의 지불을 정지하므로, 파산선고를 하는 동시에 피고 두 사람을 파산자로 선고하여 달라는 것인데 오는 29일에 제1회 구두 변론이 있을 터이라더라. (‘조선일보’ 1923년 6월20일자 ‘윤후작을 파산신립’)
윤택영의 파산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온 윤덕영은 동생의 부채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만원은 될 것이라 증언하여 윤택영이 ‘채무왕’으로도 부족한 ‘채무대왕’임을 새삼 확인시켰다.
비운의 여인, 순정효황후
‘시대일보’ 1926년 4월29일자에 실린 윤택영의 비밀입국 관련기사.
이왕(순종) 윤비 양전하께서는 북경에 체재 중인 윤택영씨의 소식이 중국 내란이 일어난 후 분명하지 못하므로 깊이 염려하사 22일 이왕직 장관을 총독부에 보내사 조사해 보도록 하라는 하명이 계셨다고 한다. (‘시대일보’ 1924년 9월25일자)
순정효황후 윤씨는 친일과 방탕으로 악명이 높은 피붙이들과는 달리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모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13세에 동궁계비로 들어가 14세에 황태후가 되는 광영도 맛보았지만, 그녀의 일생에는 기쁨보다 안타까움과 절망이 더 많았다. 한일강제합방 당시 모두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인정한 뒤에도 그녀만큼은 옥새를 부둥켜안고 끝까지 버텼다는 아름다운 일화는 지금껏 두고두고 칭송된다. 그녀의 품에서 옥새를 빼앗아간 사람은 다름아닌 큰아버지 윤덕영이었다.
머리가 앞뒤로 튀어나와 ‘대갈대감’으로 불리던 윤덕영은 합병에 가장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에 봉작됐음에도 불구하고, ‘분참봉첩지 위조사건’을 필두로 한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되어 검찰청과 법원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동생이 빚에 내몰려 베이징으로 도주한 이후에는 인왕산 기슭에 조선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서양식 저택을 지어 세인의 지탄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조선귀족 대표로 일본 귀족원의 의원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황후의 아비는 또 어떤가. 황실과 사돈을 맺은 후 내전에 들어와 항상 하는 말이 “황후폐하, 불충한 아비의 빚을 갚아주시옵소서”였다. 중국으로 도주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전하는 말이 총독부에 잘 이야기해서 자기 빚을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5년 전에 파산선고를 당한 윤택영 후작은 그 후에 고국을 등지고 중국 북경에 가서 중국사람과 같이 세월을 보내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바거니와, 그것도 5년이나 되었으므로 그리운 고국에 다시 오고자 하나 오기만 하면 빚쟁이들이 독을 품고 또 다시 못살게 할 터이므로, 어찌할 수 없이 그의 백씨 되는 윤덕영 자작을 사이에 놓아가지고 빚을 갚아달라고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일주일 전부터 윤덕영 자작은 창덕궁 궁문이 닳을 만큼 드나들며 양전하께 애걸한다고 한다. 말인즉 자기 동생의 빚이 모두 90만원인 바 20만원은 자기가 부담하고 70만원은 전하가 갚아달라는 요구라더라.
인자하옵신 전하께옵서 이 말씀을 들으시고 측은하신 마음은 계시나 역시 자유로 쓰시는 돈은 없고 또 있다고 하여도 총독부의 허가가 아니면 어찌하실 수가 없으므로 어찌하겠느냐고 하셨다. 이에 윤덕영 자작은 그러면 이완용 후작을 총독에게 보내어 교섭하여 주십사하고 애걸하는 고로 이완용 후작을 부르사 총독과 협의하여 보라고 하셨다. 윤씨의 집과는 서로 대면도 잘 하지 않던 이완용 후작도 돈 이야기에는 귀가 쏠렸던지, 총독과 제1차 협의에 완전한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되므로 다시 돌아와 장차 관계협의를 한 후에 전하의 ‘친용금’과 ‘정리용금’ 몇 달치를 이용하자는 등의 의안을 제출하고 다시 총독을 면회하였다. 총독에게 양전하께서 윤씨를 생각하시고 항상 슬퍼하시니 의안대로 하자고 하나, 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예산 중에서 70만원이라는 금전을 제할 것 같으면 예산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게 될 뿐 아니라 어친척(御親戚) 귀족들 중에서는 걸핏하면 전하에게 아뢰어 돈을 뜯어가는 고로 현재에도 어찌할지 모르는 중에 이와 같은 요구가 있으므로 이왕직 안에서는 매우 문제 중이라는 소리가 세상에 전하더라. (‘조선일보’ 1923년 11월25일자 ‘윤후 귀국운동과 문제’)
500년 사직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에서 왕으로, 황태후에서 왕비로 전락한 것도 원통한 일인데, 나라를 말아먹은 소위 왕실 ‘귀족’이라는 작자들은 허구한 날 창덕궁으로 찾아와 허울뿐인 황제에게 돈이나 뜯어갔다. 아비가 찾아와 추태를 보일 때마다 품성이 어진 황후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아비가 추태를 부리다 돌아가면 낯 뜨거워 황제를 어찌 보았을 것이며, 손아래 황족은 또 어찌 보았을 것인가.
말썽을 부린 이가 윗대뿐이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테지만 황후의 피붙이 중에는 또 한 명의 ‘탕아’가 있었으니 바로 황후의 친오빠 윤홍섭이었다. 윤택영과 함께 베이징으로 도주한 윤홍섭은 이내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 다녔다. 빚에 쪼들려 도주한 인물이 무슨 돈이 있어 학비를 감당했겠는가. 아무리 몰락했다 하더라도 황후의 오빠이자 후작 큰아들이 도저히 고학으로 학비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윤홍섭은 다음과 같은 학비 조달방법을 생각해냈다.
‘동아일보’ 1921년 7월27일자에 실린 윤덕영 자작의 대저택 관련기사. 동생 윤택영이 빚 독촉을 피해 베이징으로 도주한 후에도 ‘대갈대감’ 윤덕영은 조선 최대규모의 저택을 지어 세인의 지탄을 받았다.
과연 못 말리는 형제, 못 말리는 부자다. 순정효황후의 인자하고 기품 있는 미소 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은 초라하게 시들어가는 국운 때문이기도 하였거니와 이러한 가족사의 아픔 때문이기도 했다.
윤택영 후작은 결국 오매불망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것일까. 300만원의 빚과 100여 명의 ‘빚귀신’이 들끓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섶을 쥐고 불에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으로 도주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그런 아귀지옥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 일어났다. 순종황제가 1926년 4월25일 돌연 승하한 것이다.
채무왕의 귀환
국상 중이라 큰 봉변이야 당할 리 없었지만 불상사는 미리 대비해 나쁠 게 없었다.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귀국과 입궐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밀한 계획 아래 추진됐다.
부원군 윤택영 후작은 창덕궁 전하가 위독하시다는 급보를 듣고 급히 은거하던 북경을 떠나 27일 밤 입경하였는데, 본래 같으면 부원군의 신분이라 당당한 기세로 입궐하였겠지만 무엇보다도 채무관계로 유명한 터라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이왕직 자동차를 문산까지 마중 나오게 하여 문산역에서 하차하는 즉시 자동차로 갈아타고 사람의 눈을 피하여 입경하여 13시30분경에 금호문으로 입궐하였다. (‘동아일보’ 1926년 4월29일자)
입국장 풍경은 7년 전 경성역에서 총독부와 이왕직 직원의 영접을 받으며 화려하게 출국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빚쟁이들이 진을 치고 기다릴까 하여 경성역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문산역에서 내려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했다 해도 기자 눈까지 속이기는 어려웠다. 몰래 입국하던 윤택영은 문산역에서 한 기자에게 발각됐다. 입국 감상을 묻는 기자의 거듭된 질문에 윤택영 후작은 다음과 같은 짤막한 소회를 밝혔다.
“세상사람이 아는 게 부끄러운 일이 많으므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싫소. 별다른 감상은 없소. 이번에도 봉천에서 전하의 승하하심을 듣고 사정이 하도 딱하여 잠깐 다니러 온 것이오. 아무도 만나지 않고 국상이 끝나면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겠소.” (‘시대일보’ 1926년 4월29일자)
아무리 ‘빚귀신’이 들끓는 아귀지옥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내 나라 내 땅이었다. 국장이 끝나면 다시 베이징으로 귀양 아닌 귀양을 떠날 생각을 하니 윤택영은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국장 기간에 윤택영은 창덕궁 내전에 칩거하면서 윤덕영을 중재자로 하여 채권단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가 친지들과 머리를 맞대고 마련한 협상안은 이러했다. 120인의 채권자에게 채권액 350만원의 10%인 35만원을 주고 그 나머지는 탕감하자는 것이었다. 35만원은 윤덕영이 마련하기로 했다. 서두에서 인용했던, 당시 월간지 ‘개벽’의 ‘회고 조선 500년 특집호’에 실린 “국상 중에 윤택영과 그의 형 대갈대감이 대가리가 터지게 싸웠다”는 기록은 35만원을 형이 부담해달라고 보채는 과정에 형제간 주먹다짐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어차피 받기 어려운 빚인 지라 120인의 채권자 중 112인은 협상안을 마지못해 수용했다. 그러나 대채권자 7~8인은 끝까지 협상안을 거부하고 법대로 하자고 버텼다.
결국 막후협상이 부결되고 국상마저 끝나가자 윤택영은 재차 베이징 도주를 결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전부터 45회에 걸쳐 진행된 파산재판 선고일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시 바삐 도주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윤택영은 창덕궁에 들어가서 황후에게 멀리 가겠다는 뜻을 조용히 전했다. 황후는 한 달 전 남편을 잃은 데다 부친과도 또다시 생이별을 할 생각을 하니 서러움에 북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윤택영은 간동 자택에 가서 선조 사당에 하직하고 손자 둘을 불러 공부 잘하라고 당부한 후에 다시 윤덕영의 저택 송석원으로 향했다. 집안 사람들에게는 파주 산소에 다니러 간다고 말하고 윤덕영과 자동차에 같이 올라서 서울과 작별을 고했다. 빚쟁이들의 눈을 속이고자 7년 동안 베이징에서 함께 지냈던 중촌(中村) 순사는 다른 길로 오게 하였다.
운전수 하나에 형제의 몸을 부탁하고 파주의 선산으로 가서 해가 진 뒤에 그 형님과 헤어지고 윤택영 후작만 하오 7시에 경성에서 출발한 특별열차를 문산역에서 기다리다가 올라타고 신의주로 가 안봉선으로 갈아타서 봉천에 이르고 다시 대련으로 가서 배편으로 천진을 거쳐 북경까지 이를 예정이다. 여러 채권자 측으로부터 채권액 10분의 1 화해교섭이 끝까지 해결되지 못하면 후작은 아무리 그리운 고국의 산천이라도 다시 밟을 날이 그다지 가까울 희망이 없다고. (‘시대일보’ 1926년 7월8일자)
초라한 도주, 그리고 최후
‘황제 장인’에다 ‘후작’으로 위세를 부리며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윤택영은 결국 다시 귀국하지 못했다. 1928년 2월 법원의 파선 선고가 있었고 그날로 후작 작위를 박탈당해 모든 예우가 중지됐다. ‘품위 실추’를 사유로 작위를 박탈당한 첫 번째 귀족이다. 윤택영은 1935년 어느 스산한 가을날 이역만리 베이징에서 임종을 지키는 가족 하나 없이 쓸쓸히 죽었다. ‘빚진 돈도 내 돈’이라 생각하고 무작정 빚을 얻어 탕진한 ‘채무왕’의 최후는 그와 같았다.
신문지면을 통해 윤택영의 부고를 접한 윤치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윤비의 부친 윤택영씨가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돈 욕심이 지나치지만 않았던들 조선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는 빚이 수백만원에 이를 때까지 은행과 개인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꾸었으며, 빚쟁이들을 피해 줄행랑을 쳐서 지난 10년 남짓 북경에서 살았다. 빚쟁이들이라면 몰라도, 그의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손해날 일은 아니다. (‘윤치호 일기’ 1935년 10월24일자)
오늘날 신용불량자의 숫자는 400만에 달한다. 그 중에는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던 사람도 상당수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백화점과 술집에는 일단 긋고보자는 ‘묻지마 카드족’이 넘쳐난다. 돈이 필요한데 없으면 빌려야 한다. 하지만 빌리기 전에 먼저 벌 궁리부터 해야 하리라. ‘빚진 돈’은 분명 ‘내 돈’이 아니다. 내 나라 내 집에서 마음 편히 살고 싶은가. ‘황제의 장인’ 윤택영의 비참한 도주 행각과 쓸쓸한 최후는 많은 이에게 교훈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