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1년 관동군의 만주침략 지지, 화학무기 사용 수차례 재가
- 1940년 최초로 중국에서 세균무기 사용 허가
- 1971년 유럽 방문 때 네덜란드에서 물벼락 맞아
- 2001년 아사히신문, “천황은 전쟁책임을 면할 수 없다”
독일은 패전 후에 나치를 단죄함으로써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추궁했다. 그와 같은 조치에 입각해 독일은 주변국에 대해서도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하여 전후처리를 마무리했다. 이에 유럽 각국은 독일을 진정한 우방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은 패전 후 일부 전범을 처벌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군부에 협력한 많은 사람이 면죄부를 받고 일본의 재건에 참여했다. 일왕과 군국주의자들이 이렇게 전쟁책임을 회피하자 일본 국민은 일왕과 마찬가지로 침략전쟁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무책임의 사고방식이 일본의 역사인식 토대를 이루었고, 이는 불완전한 과거청산으로 연결됐다.
현재 한국과 중국이 계속 지적하는 문제들, 예컨대 교과서 왜곡이나 수상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그리고 정치인들의 망언의 뿌리는 일왕과 군국주의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과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오늘날 일본은 어두운 과거를 외면한 채 헌법을 개정, 정치대국·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 단편적이고 감정적으로 일본을 바라봐서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역사적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해 합리적인 대일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불완전한 과거청산의 원점에 존재하는 히로히토와 그의 전쟁책임과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히로히토가 병석에 누워 있던 1988년 12월7일, 나가사키(長崎)시 의회에서 공산당 소속의 한 시의원이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 시장에게 태평양전쟁 당시 일왕의 전쟁책임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모토지마 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후 43년이 지난 지금, 반성은 충분히 이뤄졌다고 본다. 외국의 자료나 일본 역사학자들의 기술 및 본인의 군대생활 경험에 비춰볼 때 천황에게 전쟁책임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 및 연합국의 의사로 그 책임이 면제됐으며 일왕은 새 헌법의 상징이 됐다. 따라서 우리들도 그러한 선에서 대처해나가면 된다.”
전쟁 당시 일본 육군의 교육대 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천황이 중신들의 상주(上奏·천황에게 올리는 상소)를 받아들여 좀더 일찍 종전 결단을 내렸더라면 오키나와 전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도 명백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부군관구 교육대에서 병사들에게 ‘천황을 위해 죽어라’고 가르친 나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고백했다.
일본 공산당은 일왕제를 일관되게 반대했기 때문에 시의원의 그러한 질문은 이상할 것이 없다. 시장의 답변도 비교적 합당했다. 그러나 그 반향은 컸다. 격려의 편지도 있었지만 비난과 협박편지가 더 많았다. 그 같은 발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자민당 시의원들에 대하여 모토지마 시장은 “발언의 철회는 정치가에게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자민당은 그의 고문직을 박탈했고, 그의 발언에 반발하는 우익단체들이 나가사키시로 몰려가 그를 위협했다. 마침내 1990년 1월(아키히토가 새로운 일왕으로 즉위한 직후) 쇼키주쿠(正氣塾)라는 우익단체의 한 간부가 그를 총으로 쏘았다. ‘쇼키(正氣)’는 ‘제정신’이라는 뜻인데,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은 단체의 폭력에 그가 쓰러진 것이다. 이 사건은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정치가가 일왕의 전쟁책임을 공개적으로 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맥아더, 일왕 전쟁책임 면책 지지
일본 국민도 일왕의 전쟁책임 문제가 부각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 경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히로히토가 사망한 후 새로운 자료가 공개되면서 전쟁책임 문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많아졌다. ‘아사히신문’은 2001년 8월15일자 사설에서 ‘전후의 원점에 다시 선다면 어쨌든 피할 수 없는 것이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이라고 전제한 뒤, ‘황군에 대한 모든 명령이 육·해군의 통수권자인 천황의 이름으로 내려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천황은 전쟁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후 보수적인 ‘요미우리신문’도 일왕의 전쟁책임 문제를 비교적 전향적으로 다뤘다.
오랫동안 일왕의 전쟁책임이 명쾌하게 논의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패전 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일본 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맥아더 장군은 일왕의 카리스마와 상징성을 이용해 점령 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고자 했다. 일본 정부는 일왕제를 유지해 그에 대한 전쟁책임 추궁을 피하려 했다.
도쿄재판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의도에 따라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내각은 1945년 11월5일 비밀리에 전쟁책임에 대한 각의결정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일왕은 대미교섭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을 뿐 아니라, 개전 결정 및 작전계획을 수행하는 데 헌법 운용상의 관례에 따라 통수부 및 정부의 결정을 재가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맥아더도 1946년 1월 아이젠하워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황이 과거 10년간 일본 정부의 결정에 크게 관여한 증거는 없다. 만약 천황제를 파괴하면 일본도 붕괴할 것이다. 일본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진다면 100만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밝힘으로써 일왕의 면책을 지지했다.
헌법 초월하는 존재
이렇게 해서 일왕의 전쟁책임 문제는 미일 양국의 정략적 필요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결됐다. 그후 쇼와시대가 끝날 때까지 히로히토가 태평양전쟁 기간 중 실제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검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법적·정치적 책임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판단과는 별도로, 일왕 자신이 도덕적 책임을 느꼈다는 것은 측근의 일지를 통해서 밝혀졌다. 1945년 9월27일, 맥아더와의 첫 회견에서 일왕이 내뱉은 발언은 그가 개인적으로 전쟁책임을 표명한 대표적인 예다. 당시 일왕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진다. 나 자신의 운명은 개의치 않는다”고 맥아더에게 말했다. 이는 은퇴한 맥아더가 1955년 9월 뉴욕에서 시게미쓰 전 일본 외상에게 밝힌 것이다.
일왕의 전쟁책임을 논할 때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메이지 헌법을 간과할 수 없다. 메이지 헌법은 1889년에 메이지 일왕이 제정·공포한 흠정헌법으로, 일본 정부가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군주제에 입각해 구성됐음을 규범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메이지 헌법은 일왕을 신성불가침의 국가원수이자 군대의 최고통솔자, 그리고 국가권력의 총괄자로 규정했다. 일왕은 제국의회의 소집과 해산을 명할 수 있으며, 법률을 대신하는 칙령을 발하고 또한 문무관을 임면하여 그 봉급을 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메이지 헌법은 일왕이 헌법을 초월하는 절대적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헌법의 존재의의가 일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권력을 보호하여 절대자의 지위를 확인하는 데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물론 메이지 헌법에 대한 입법론이나 해석론의 관점에서 그에 대한 반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왕이 갖는 실질적 권한은 절대적인 것으로 거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정책결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천황에게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메이지 헌법상 일왕은 입헌군주보다는 절대군주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히로히토가 즉위한 후 헌법상 일왕의 지위와 관련해 처음 논란이 된 것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수상의 해임을 둘러싼 건이었다. 1929년 당시 28세의 히로히토는 다나카 수상을 질책하며 내각을 총사퇴시켰다. 일왕이 다나카 수상에게 장쭤린(張作霖·일본군의 별동대로 활동한 인물) 폭살사건의 주모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는데도 이를 실행하지 않은 게 이유였다. 그때 정치원로이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일왕이 직접 수상의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일왕은 사이온지의 보필을 따르지 않았다. 일왕이 입헌군주제의 취지를 넘어서 직접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전후에 히로히토는 유명한 ‘천황의 독백록’에서 다나카 수상이 장쭤린 사건을 얼버무리려 한 데 분노하여 사임을 요구한 것은 젊은 혈기 탓이었다고 변명했다. 이를 계기로 일왕은 내각의 결정에 대해 반대의견이 있더라도 되도록 재가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후 일왕은 정부의 방침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원로나 수상 등 보필자의 의견이 통일되면 거의 반대하지 않고 따랐다.
군부, 일왕 권위 이용해 정계 장악
1931년 9월 일왕은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당초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이 만주에서 군사행동 확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일왕은 10월9일 돌연 군부의 행동에 동의함으로써 침략정책을 지지했다. 일왕은 정무에 대하여 당연히 내각의 보필을 받아야 했다.
이와 같이 군부의 전횡을 방치한 일왕의 소극적인 행동으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미수에 그쳤지만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다음해인 1932년 5·15 사건이 발생해 이누가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이 암살됐다. 군부의 강경한 태도로 일왕의 영향력과 내각의 위상은 대폭 약화됐다. 이에 사이온지 같은 측근은 일왕에게 정치에 대한 개입을 더욱 삼가라고 조언했다. 군부는 일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치를 장악한 것이다. 일왕은 형식적인 헌법상 통수권자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졌다.
한편 1935년의 이른바 ‘일왕 기관설’에 대한 논란은 입헌군주 일왕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일왕 기관설이란 일왕도 입헌군주로서 헌법의 규정에 의한 국가의 기관이라는 학자들의 해석을 말한다. 이는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 도쿄대 교수가 제창한 것으로 당시 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일왕 기관설은 군부와 우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미노베 교수는 귀족원 의원직을 사퇴해야만 했다. 헌법에 관한 그의 저서도 판매 금지됐다.
의회는 군부에 동조해 일왕 주권이 일본 국체의 근간이라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는 메이지 헌법상 입헌군주제를 부정한 실질적인 헌법 개정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왕은 입헌군주의 한계를 넘는 통수권자의 지위를 형식적으로 부여받은 셈이다. 당시 군부지도자들은 파쇼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절대자로서 일왕의 지위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일왕기관설에 대한 부정은 전후 전쟁책임과 관련해 일왕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일왕의 책임을 강조하는 일왕친정설의 원형이 됐기 때문이다.
수상의 ‘항복 진언’ 묵살
그런데 정작 일왕은 일왕 기관설을 지지해 군부의 조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군부의 위세에 눌린 일왕이 의회 결의를 반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군부 지도자들은 직접 일왕에게 신하들의 논의를 당분간 지켜보기만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일부 논자들은 전시에 일왕의 권한은 각료와 군부 지도자들의 보필 내지 보좌에 의해 제한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5년간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수동적인 위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황이 심각하게 전개되면서 그는 정부와 군부의 인사 및 군사작전에서 때때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그 예로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습과 필리핀 미군시설 공격 재가, 그리고 1945년 2월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수상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 고노에와 일왕의 동생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宣仁)는 전후에 “태평양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반면 일왕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당시 개전이 유리하다는 결정이 일본 정부와 대본영의 합의에 따라 내려진 만큼 일왕의 반대를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실제 일왕은 1941년 9월6일의 어전회의에서 메이지 일왕의 어제(御製)를 낭송해 무력사용을 경계했다. 그런데도 일본이 전쟁으로 치달은 것은 각료와 군부인사 중 아무도 일왕의 뜻에 따라 방향전환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히로히토가 군부 내 강경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항복결정을 내린 점을 생각하면 일왕을 옹호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고노에 수상이 1945년 2월 일왕에게 항복을 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히로히토가 이를 수락하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다. 이는 전황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간 이후 처음으로 제기된 항복권고였다. 그러나 일왕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군부를 의식한 일왕은 한번 전과를 올려야만 군부에 종전(終戰)을 설득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일왕이 고노에의 상소를 바로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군 지휘부는 각지의 과장된 전황보고로 정확한 피해규모를 파악하지 못했다.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의 소모도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군부가 주장하는 본토결전의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일왕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현지조사를 위해 떠난 파견관이 돌아온 후인 1945년 6월경이었다. 또한 1945년 2월 고노에가 상소를 올릴 당시 또 다른 중신 여섯 명은 일왕에게 종전을 권고하지 않았다. 고노에도 패전 후인 1945년 11월, “종전공작이 구체화된 7월에도 군부의 시위나 쿠데타 시도 등 저항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전에 종전칙서가 내려졌더라면 군의 봉기를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여 자신의 상소가 안이했음을 인정했다.
일왕이 재가해야 독가스 사용
따라서 고노에가 강조한 군의 반란이나 공산혁명의 가능성은 히로히토도 동감했기 때문에 그가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수긍이 간다. 무능한 각료들과 광신자 집단인 군부에 둘러싸인 일왕의 처지도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고노에의 상소를 일왕이 받아들이지 않은 후에 3월의 도쿄 대공습 및 4월의 오키나와 격전, 그리고 원폭투하로 수십만이 희생된 점을 생각하면 모토지마의 주장처럼 일왕의 늦은 결단으로 일본이 너무 큰 대가를 치른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규범적으로 본 책임 문제 외에 일왕이 군국주의자들의 잔학한 행위를 실질적으로 동조 내지 인지했다는 점도 자주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일본군의 독가스 사용과 관련해 히로히토의 책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히로히토는 만주사변이 전면전으로 확대되기 전부터 화학무기를 중국에 배치·사용하도록 수차례 허가했다. 당시 일본은 1925년 6월17일 제네바에서 채택된 ‘독가스 등의 금지에 관한 의정서’를 비준한 상태여서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히로히토가 화학무기 사용을 처음 허가한 것은 1937년 7월28일 간인노미야(閑院宮) 참모총장에 의해 발령된 명령에 의해서였다. 같은 해 9월11일에도 동일한 명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특별 화학무기부대가 중국 상하이에 배치됐다. 처음에는 실험적인 차원에서 소규모로 화학무기의 사용이 허가됐다. 그러나 1938년 중반부터 중국과 몽골의 주요 전투지역에서 독가스가 대규모로 사용됐다.
일왕과 대본영 및 통수부는 중일전쟁 전 기간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독가스를 관리했다. 군사령부나 일선부대는 화학무기를 사용할 재량권이 없었다. 독가스는 철저히 지휘명령계통을 밟아 사용 허가가 났다. 즉 일왕이 재가하고 참모총장이 ‘대륙지(大陸指)’라는 명령을 대본영 육군부를 통해 현지 부대에 내려야 사용할 수 있었다.
예컨대 대본영은 1938년 8월부터 10월까지 우한(武漢)을 공격하면서 376회에 걸쳐 독가스 사용을 허가했다. 또 1939년 3월 대본영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중장에게 대량의 독가스 사용을 허가했다. 같은 해 4월11일에는 대륙지 제110호에 의해 북중국방면군 및 내몽골 혼성 여단에도 독가스 사용이 허가됐다. 특히 5월에 쉬저우(徐州)가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은 전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화학무기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일본은 화학무기의 사용을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했다. 히로히토는 1939년 5월15일 대륙명(大陸命) 제301호에 의해 만소(滿蘇) 국경지역에서 화학무기를 실험적으로 사용할 것을 허가했다. 실험이 어디까지 이뤄졌는지 알 수 없지만 화학무기를 이용한 확전의 의도는 명백했다. 또 일왕은 1940년 7월 참모총장이 요청한 남중국방면 사령관의 독가스 사용도 허가했다.
미국, 도쿄재판서 세균전 책임문제 회피
그러나 1년 후인 1941년 7월 일본 육군이 남부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했을 때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참모총장은 독가스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일왕과 군부 지도자들이 서구 국가에 독가스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보복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화학무기뿐 아니라 생물·세균무기와 관련해서도 히로히토의 책임 문제가 논란거리다. 히로히토는 1940년 최초로 세균무기를 중국에서 실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다. 잘 알려진 대로 세균전을 담당한 관동군 731부대는 ‘마루타’로 지칭하던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는데, 전후에 그 사실이 밝혀져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일본은 중국에서 1942년까지 세균무기를 사용했다.
물론 이러한 세균무기의 사용을 일왕이 적극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세균전에 일왕이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뒷받침할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모총장이 발령한 대본영의 지령은 히로히토도 분명히 일람했기 때문에 생체실험이나 세균전의 실행을 그가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러한 지령의 근간이 되는 대륙명은 일왕이 재가해 발령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선 당시 일왕의 재가는 군부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된 사항을 인가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왕에게는 전쟁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왕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여러 번 질문하여 확인한 후에 비로소 날인했던 만큼,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약 그에게 책임이 없다면 그저 도장만 찍어댄 각료들은 물론 군부 지도자들도 당연히 책임이 없다. 결국 일왕의 재가는 최고권력자의 의사와 결정에 따른 허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도쿄재판에서는 일본군의 독가스 및 세균무기 개발과 사용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일본군이 중국전선에서 독가스를 사용한 데 대해 추궁할 경우 원폭투하도 논란이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를 불문에 부쳤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세균무기와 관련해 731부대의 개발정보가 소련측에 누설되지 않도록 재판에서 누락시켰다. 재판 당시 이미 미소 냉전이 시작됐기에 미국은 정략적으로 대소(對蘇) 견제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히로히토는 이러한 상황 아래 도쿄재판에서 기소를 면해 전쟁책임의 추궁에서 벗어났다. 법적으로는 패전국의 최고책임자였으나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히로히토는, 1947년 5월 일본의 신헌법이 시행된 이후 1989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상징 일왕으로서 41년 동안 더 재위했다.
일왕의 오판과 한반도 분단
그러나 국내외적으로 그의 면책에 대한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패전 직후인 1946년경 일본에선 일왕이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도쿄재판의 결심(結審) 직전이던 1948년경에는 진보적 지식인이 일왕의 퇴위를 요구했다. 그중에서도 도쿄대 총장 난바라 시게루(南原繁)와 헌법학자 사사키 소오이치(佐佐木?一)가 1946년 12월 의회에서 주장한 일왕 퇴위론은 유명하다. 시인인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는 국민의 도의를 퇴폐로부터 구하기 위해 최고책임자인 일왕이 물러나는 게 바람직하다는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철학자 아베 요시시게(安部能成)는 시데하라 내각의 문부대신으로서, “국민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웠던 천황 스스로가 책임이 없다고 하면 이는 모순이다”고 했다. 일왕에 대한 퇴위 요구는 그후에도 진보적 지식인에 의해 간헐적으로 제기됐다.
영미 양국을 제외한 연합국도 일왕의 전쟁책임에 대하여 엄중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일왕이 분명하게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1971년에 히로히토가 유럽 각국을 순방했을 때 현지 언론이 비호의적이었던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물벼락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아키히토 왕세자(현재의 일왕)가 히로히토를 대신하여 1975년에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히메유리탑에서 주민들이 화염병을 투척했다.
어쨌든 그가 상징 일왕으로 재위한 동안 일본은 경제부흥에 성공하여 강대국으로 재도약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쇼와시대는 전쟁과 광기로 얼룩진 전반기와 평화와 번영을 누린 후반기로 대비되어 인식된다. 그러한 격동의 세월을 헤치고 62년을 재위한 히로히토가 1989년 1월7일 사망했을 때 외국 언론은 대부분 준엄하게 그의 전쟁책임을 물었다.
앞으로 일왕의 전쟁책임에 대한 문제는 새로운 시각에 의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질 것이다. 다만 그의 전쟁책임이 어떤 평가를 받든, 우리에게 그의 잘못된 판단은 참으로 아쉽다. 일본의 항복이 늦어져 소련이 참전했고, 이는 한반도 분단의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역사는 일월이 명멸하는 재판정이다. 그런데 그 판결은 언제나 늦다”는 이병주의 예리한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