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렌보임과 뒤 프레. 두 음악 신동의 결혼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슈만과 클라라처럼 지고지순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내는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고 서서히 근육감각이 마비되어갔지만, 남편은 다른 음악가와 딴살림을 차렸다. 뒤 프레가 죽은 뒤 생전 그의 첼로 연주는 듣는 이의 눈물샘을 조용히 자극하지만, 바렌보임은 문명과 민족 간 화합과 평화를 역설하며 힘차게 세계를 돌아다닌다. 사랑은 가도 음악은 남는가.
“신동으로 불릴 정도의 당대 최고 연주자였는데,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어느 지휘자와 결혼했어. 뒤 프레는 무명인 남편의 지휘를 받으며 열심히 연주했지만 너무 혹사를 당해 불치병에 걸렸다더군. 그런데도 그 지휘자는 조강지처 병간호는커녕 다른 여자들 속에서 젊음을 만끽했어. 병마에 지친 뒤 프레는 쓸쓸하고 외롭게 죽었고 말이야.”
그래서일까.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엘가의 첼로협주곡 E단조는 너무나 구슬펐다. 더구나 이 곡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1857~1934)는 작곡가 중에서 손꼽히는 애처가가 아닌가. 그가 작곡한 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랑의 인사’는 그가 아내 엘리스에게 청혼한 것을 기념해 바친 곡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앨범을 녹음한 1965년은 뒤 프레가 클래식계 최고 스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20세의 전도유망한 때였다.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1942~)을 만나기 전이었고, 사랑을 알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암울하고 슬픈 첼로 선율은 자신의 비극적 미래를 예언한 듯 슬프다.
뒤 프레의 남편 바렌보임은 갈등과 분쟁, 테러로 얼룩진 지구촌에서 문명·민족 간 화합을 역설한 대지휘자로 유명하다. 지난해 8월 15일 비무장지대(DMZ) 내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베토벤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해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1984년 파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한국의 불고기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친한(親韓)파 지휘자이기도 하다.
그는 분쟁 지역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스페인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웨스트이스턴 디반(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소리는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믿음으로, 갈등과 대립을 풀기 위해 세계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평화 콘서트를 연다. 바렌보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화의 메신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념과 용기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삶을 반추해보면 이 말은 진실일 거 같다. 아픈 조강지처를 버리고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사람이 바렌보임이다. 뒤 프레는 명예와 목숨을 걸고 세계 평화를 위해 앞장서는 대가의 아킬레스건이다.
뒤 프레를 괴롭힌 ‘다발성 경화증’
뒤 프레라는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은 그가 프랑스인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영국인이다. 옥스퍼드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했다. 만 5세 때 첼로 활을 처음 잡으면서 일찌감치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의 마스터 클래스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를 사사하면서 대형 연주가의 면모를 갖추어나갔다. 1961년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공식 데뷔를 한 뒤 프레는 세계 공연장을 다니며 많은 이에게 첼로 연주가 주는 내면의 깊은 울림을 전했다. 10여 년의 짧은 전문 연주 경력에도, 그의 연주를 담은 음반은 세계 음악애호가들 사이에 카잘스,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수준으로 인식됐다.
음악계의 샛별로 자리매김하던 1966년에 처음 만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바렌보임은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만난 지 6개월 만에 이스라엘에서 유대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제3차 중동전쟁(6월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전쟁 중 결혼식도 그렇지만, 23세의 매력적인 첼리스트와 26세의 천재 피아니스트의 결혼은 슈만과 클라라 이후 음악계 최대 사건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가의 결합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결혼은 각자의 작품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음악적 정서는 더욱 깊고 섬세해졌고, 표현력은 풍부해졌다. 따로 혹은 함께 연주활동을 하면서 레퍼토리를 더욱 광범위하게 넓혀나갔다. 행복한 시절, 이들 부부는 지금은 대가가 된 최고의 신예들과 함께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A장조 ‘숭어’를 연주했다. 일반적으로 피아노 5중주는 피아노,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인데, 이곡은 제2바이올린을 더블베이스로 교체해 더욱 중후한 음색으로 탈바꿈했다. 특이하게도 지휘자 주빈 메타가 더블베이스를 맡고, 이츠하크 펄먼이 바이올린을, 바이올리니스트 핑커스 주커만이 비올라를 연주하는 ‘별들의 향연’이었다.
연주는 탁월했고, 공연 실황에서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밝게 연주하는 새색시 뒤 프레와 왼손에 반짝이는 결혼반지를 낀 새신랑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자클린 뒤 프레.
그러나 짧은 행복이었다. 뒤 프레는 1971년부터 자주 쓰러졌고, 기억력은 급격히 감퇴했다. 악보가 겹쳐서 보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중추신경계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그의 근육감각은 서서히 마비되어갔다. 1973년 3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첼로 활을 잡을 수 없게 된 후에는 후학을 양성하며 음악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날로 병세는 악화됐고 걷는 데도 어려움을 느꼈다.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다가, 나중에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도 얼굴을 돌리지도 못했다. 언어능력도 떨어져 말하는 데도 힘들어했다. 오로지 자신의 음반을 들으며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은 곁에 없었다. 그의 남편은 아내가 병마와 싸우는 사이에 러시아 출신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1958~)와 동거하며 두 아이를 낳았지만, 이 사실을 숨긴 채 이혼을 요구했다. 결국 눈물겨운 오랜 투병생활 끝에 뒤 프레가 42년의 짧은 생애를 마치자 비난의 화살은 남편 바렌보임에게로 날아들었다.
“예술작품, 정치적 해석은 옳지 않다”
바렌보임은 나치의 공포를 피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한 러시아 유대계 집안에서 1942년에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이던 아버지에게 음악을 사사한 바렌보임은 뒤 프레처럼 어린 나이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이미 7세 때 무대에 선 바렌보임은 그의 가족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자 장학금을 받고 홀로 유럽을 돌면서 대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후일 그가 “인생의 9년간은 아르헨티나에서 보내고, 나머지 인생은 다른 곳을 떠돌았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떠돌이인생은 10세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스페인 국적과 함께 팔레스타인 시민증도 가지고 있다.
철학 문학 등 인문학에 조예가 깊고 날카로운 평론가답게 이성적이며 때로는 독설가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남미 특유의 열정과 유희는 그의 음악을 통해서 나타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르헨티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케스트라와 펼치는 정기 공연에는 국민적 음악이 된 탱고를 수만 명 관객에게 선사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조국을 빛낸 대표적인 음악가로 축구선수 디에고 마라도나 못지않은 환영을 받고 있다.
1954년 여름, 어린 바렌보임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도착한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며 지휘자의 꿈을 마음속에 새긴 뒤였다. 우연한 기회에 바렌보임이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을 본 푸르트벵글러는 “11세 나이에는 가질 수 없는 연주 실력을 가졌다”며 극찬했다. 그는 즉시 베를린필하모닉과 협연하도록 어린 바렌보임을 초청했다. 무죄로 밝혀졌지만,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공적 활동이 2년간 금지된 푸르트벵글러의 제안에 바렌보임의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사이 푸르트벵글러는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강렬했던 푸르트벵글러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바렌보임의 지휘에는 낭만주의자 푸르트벵글러가 가지고 있던 강하고 빛나는 역동적인 선율의 움직임과 인간의 깊은 내면을 탐구하는 은은한 음색이 그대로 배어 있다. 바렌보임은 로마, 파리, 빈, 잘츠부르크 등 유수의 음악도시에서 연주 활동과 ‘마스터 코스’를 통한 사사를 병행하면서 피아노뿐 아니라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다. 화려한 기교와 능숙한 테크닉에 의존한 수동적인 연주가 아니라 지휘봉을 내젓는 순간 음향에 시적인 영감까지 불어넣었다.
1975년 파리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가 되어 고전과 낭만, 현대음악을 섭렵하면서 14년간 역량을 마음껏 펼쳤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즉시 베를린으로 날아가 3일 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이는 동베를린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환희의 진실을 알려주는 특별한 음악회였고, 세계인에게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와 함께 베를린 동쪽에 위치한 오페라극장 예술감독을 맡게 된다. 1990년대에는 독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심취했다. 독일 낭만음악의 서정적이면서도 중후한 매력을 세련되고도 여유롭게 표현하며 느린 템포로 시작해 정점을 향해 점차 고조되는 음악을 힘 있고 격정적으로 연주했다. 그는 독일 낭만주의, 그중 특히 바그너 음악의 독보적인 일인자로 올라섰다.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그리고 모든 유대인의 원흉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의 추종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저술과 강연, 인터뷰를 통해 “예술작품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고 꾸준히 주장했다. 결국 바렌보임은 행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1년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방문한 바렌보임은 슈만과 스트라빈스키 음악을 연주하고는 앙코르 곡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서곡을 연주했다. 바그너 곡을 연주하기 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앙코르 곡을 듣기 싫은 관객은 나가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가 홀로코스트의 숭고한 정신을 모독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앞서 바렌보임은 1999년 중동의 평화와 화해를 제시하며 이스라엘과 아랍 음악인들이 모인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디반 오케스트라를 창단할 때 아랍 국가에서만 200명이 넘는 연주자가 오디션에 몰렸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성취를 이루면서 2002년에 스페인의 세비야로 오케스트라 본거지를 옮겼다. 세비야는 7세기 동안 유대인과 무슬림이 평화롭게 살았던 상징적인 곳이다.
외로운 지휘자와 뒤 프레의 그림자
바렌보임은 2002년 이스라엘 대통령과 문화부장관이 참석하는 시상식에서 최고 문화상을 받게 됐지만, 시상식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중동정책이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에 상반된다. 팔레스타인과 아랍국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뜩이나 이스라엘 종교 관계자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상황에 그의 폭탄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가정의 평화도 못 지키고 야망에만 눈이 뒤집혀 병든 아내를 버리고 도망가는 남편이 세계 평화를 논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연일 쏟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평화 콘서트의 진정성이 알려졌고, 비난 수위도 그만큼 낮아졌다.
2005년 이후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 오페라극장 객원 수석지휘자를 맡고 있다. 예술감독 자리가 공석이어서 예술감독처럼 주요 공연 지휘를 도맡다시피 하고 있다. 2010년 12월 7일 스칼라극장이 시즌 개막작으로 올린 작곡가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 공연에서도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대통령과 각료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는 지휘봉보다 마이크를 먼저 잡고 돌출 발언을 했다.
“문화는 사치품이나 순전히 미학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문화는 바로 윤리적인 것입니다. 인간 윤리는 문화와 예술 속에서 진정으로 표출됩니다. 문화예산을 줄여서 다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 각국 정부가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문화예술 분야 예산을 먼저 삭감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렌보임은 외로운 사람일 수 있겠다. 영국에서는 자국 최고 스타 뒤 프레를 버렸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는 남미 출신 음악가라는 이유로, 독일에서는 피해망상의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스라엘에서는 철천지원수인 바그너의 신봉자라는 이유로, 미국에서는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며 그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주는 것을 유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그너 전문 지휘자와 모차르트 전문 피아니스트로 기억되는 대가 바렌보임의 이름 뒤에 항상 따라다니는 뒤 프레의 그림자와 정치적인 활동가라는 수식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되는 슈만과 클라라 부부와 달리 바렌보임과 뒤 프레는 너무나 처절하고 애달픈 사랑을 했으니 세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을 수밖에.
차라리 애초 이념적 사상적으로 의식 있는 거장이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여성편력으로 여자문제에서는 자유스럽지 못했던 피카소와 바렌보임이 비교대상이었다면 어땠을까. 또 ‘나쁜 남자’ 바렌보임이 비운의 뒤 프레를 버린 것이 아니고, 긴 병에 장사 없는 현실에서 음악을 너무 사랑한 바렌보임이 음악을 떠나지 않았다고 본다면 편파적인 해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