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美 재벌 ‘정신적 고향’ 줄지은 기부, 웅장한 결실

클리블랜드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5-08-21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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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중부 내륙 오대호와 인접한 클리블랜드는 산업혁명 시절 수많은 ‘미국 재벌’을 배출한 부자 도시였다. 유전, 광산, 철도 등에서 큰돈을 번 재벌들은 앞다퉈 예술과 문화사업에 기부했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그 ‘열매’로 4만 점 넘는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한다.
    美 재벌 ‘정신적 고향’ 줄지은 기부, 웅장한 결실
    미국 중부에는 캐나다와의 국경 사이에 ‘오대호(Great Lakes)’라고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가 있다. 오대호를 구성하는 5개 호수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호수가 에리호(Lake Erie)이다. 미국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에리호의 남쪽 끝자락에 오하이오 주에 속한 커다란 도시 클리블랜드가 있다. 이 도시 동북쪽의 널따란 웨이드 공원(Wade Park) 한가운데 들어선 웅장한 석조건물이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이다. 바로 옆에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Cleveland Museum of Natural History)도 있어 이 일대는 이곳 시민들의 정신적 휴식 공간이 돼준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1913년 재단이 설립되고 1916년 정식 개관해 100여 년 역사를 가진 곳이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4만5000여 점의 소장품은 6000년이 넘는 인류 역사를 아우른다. 특히 훌륭한 아시아 예술품을 많이 소장한 미술관으로 미국 내에서 손꼽힌다. 6억 달러나 되는 수익재산을 보유해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미술관이기도 하다. 2012년 확장 공사로 1만8000평의 전시공간을 갖췄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미국 최대의 예술 전문 도서관 잉걸스 도서관(Ingalls Libraries)의 본부이기도 하다. 예술 전문 서적 43만 권과 디지털 자료 50만 점을 갖췄다. 도서관은 1913년 미술관 설립 계획이 시작됐을 때 동시에 추진됐다.

    철도왕, 발명가, 땅부자…

    클리블랜드는 오대호로 통하는 항구도시이고, 수많은 운하와 철도가 내륙으로 뻗어나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덕분에 1796년 처음 마을이 생긴 이후 제조업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1814년 정식 행정구역이 됐고, 1836년 시(市)로 승격했다. 인근 지역과 합쳐 인구가 300만 명 가까이 되는, 미국에서 14번째로 큰 도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돈 많은 부자로 기록된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1870년 그 유명한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을 설립한 곳이 이곳, 클리블랜드다. 많은 사람이 스탠더드 오일이 뉴욕에서 시작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1885년에 본사를 뉴욕으로 옮겼을 뿐이다. 록펠러는 소년 시절 클리블랜드에서 조그만 상점의 경리 보조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고, 당시 막 발견된 석유사업 투자에 ‘올인’해 돈으로 성을 쌓았다. 한때 미국 전역 석유 공급의 90%를 록펠러가 장악했다. 이처럼 당시 ‘사통팔달’ 클리블랜드는 사업가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 도시는 많은 부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1800년대 산업혁명기에 철도, 광산, 철강, 석유, 금융 등 새 산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문화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클리블랜드 미술관도 그 결과물 중 하나다. 1913년 재단을 만들 때 자금을 출연하며 참여한 재벌로는 히만 헐버트(Himan Hulbut·1819~1884), 존 헌팅턴(John Huntington· 1832~1893), 호러스 켈리(Horace Kelley·1819~1890) 등이 있다.

    개인 미술관 대신 공공미술관

    헐버트는 변호사로 금융업에 진출해 큰돈을 벌었다. 나중에는 철도사업에까지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즐겨 수집하던 예술품을 사후에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기증해 이것이 미술관의 초석이 됐다. 발명가 헌팅턴은 석유산업 관련 특허를 많이 따내 거액을 벌었다. 그는 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기부했으며 미술관에도 큰돈을 쾌척했다. 켈리는 클리블랜드 토박이로 할아버지 때부터 유명한 집안이었다. 주로 부동산으로 부를 쌓았다. 예술과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해외여행을 즐겼다.

    이 재벌들의 기부금은 당시 화폐가치로는 어마어마한 액수인 125만 달러나 됐다. 이 자금으로 웨이드 공원에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을 지었다. 웨이드 공원 역시 클리블랜드의 대재벌 제프타 웨이드 1세(Jephta Wade I·1811~1890)가 기증한 10만여 평의 땅에 지어졌다. 웨이드 1세는 전보(telegraph) 통신을 개발한 사람으로 당시 전보는 최첨단 통신수단이었다.

    美 재벌 ‘정신적 고향’ 줄지은 기부, 웅장한 결실


    1916년 클리블랜드 미술관 개관식에는 웨이드 1세의 손자인 웨이드 2세가 참석했다. 손자도 문화사업에 관심이 많아 미술관 이사회의 초대 부의장을 맡았다가 1920년에는 의장에 올랐다. 미술관은 공공시설이지만, 이를 만들고 유지한 주역은 재벌들이었다. 재벌의 공익 정신이 미국 사회를 기름지게 만들어왔다는 사실이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도 읽힌다.

    레너드 한나 주니어(Leonard C Hanna Jr·1889~1957)가 아니었다면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결코 오늘날 같은 위상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 미술관에는 인상파 및 후기인상파 유명 작품이 유달리 많은 편인데, 이 중 절반은 한나가 기증했다. 필립스 컬렉션이나 게티 미술관 같은 훌륭한 개인 미술관을 만들 만큼의 소장품을 보유하고도 한나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개인 미술관을 세우는 대신 공공미술관에 기증했다.

    한나는 클리블랜드 태생으로 예일대 출신의 인텔리 사업가였다. 잠시 철강업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느라 사업을 중단했고,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광산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했다. 광산업은 위험부담이 크지만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다.

    한국에도 광산업으로 재벌이 된 이가 있다. 일제강점기 북한에서 금광 발굴에 뛰어든 최창학이란 인물이다. 그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광복 후 김구 선생이 귀국하자 자신이 살던 저택을 김구 선생에게 내줬다. 그 집이 그가 암살될 때까지 머문 경교장이다. 그러나 최창학은 미술관도, 미술품도 남기지 않았다.

    한나는 광적인 예술품 수집가이자 연극 애호가였고, 예술 후원자이자 복싱과 야구 등 스포츠팬이었다. 전문가 도움 없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무조건 구입했지만, 훗날 소장품 대부분이 명품 대열에 든 것을 보면 안목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각종 자선단체에 평생에 걸쳐 9000만 달러를 기증했는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기부 내역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고 한다. 미술관 봉사활동도 즐겨 했다. 1914년부터 클리블랜드 미술관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1920년부터는 작품확보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사망할 때는 미술관에 3300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에게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후손인 셈이다.

    美 재벌 ‘정신적 고향’ 줄지은 기부, 웅장한 결실
    빌 게이츠가 300억에 구입

    나는 주로 미술관 2층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보고 싶은 그림이 대부분 2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미국 사회상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두 미국 작가의 작품이 시선을 끌었다. 조지 빌로스(George Bellows)의 ‘샤키 살롱의 수컷(Stag at Sharkey´s)’과 윌리엄 마운트(William Mount)의 ‘음악의 힘(The Power of Music)’이다.

    ‘샤키 살롱의 수컷’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샤키 살롱에서 벌어진 복싱 경기 장면을 그린 그림. 샤키 살롱은 빌로스 화실 건너편에 있는 유명한 살롱이다. 빌로스가 이 그림을 그린 1909년에 복싱은 불법이었지만, 개인 살롱이란 점을 이용해 샤키 살롱에선 공공연하게 복싱 경기가 벌어졌다. 당시 복싱은 뉴요커들이 즐긴 밤 문화 중 하나이면서 서민들의 중요 오락거리였다. 복싱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동물적 본성을 끄집어내는 스포츠다. 당시 복싱은 싸움 구경을 즐기며 도박까지 곁들이는 사행성 오락이었다. 미국으로 몰려든 이민자들의 정서가 이런 것 아니었나 싶다.

    이 그림은 복싱 경기를 매우 실감 나게 묘사했다. 빌로스는 프로야구 선수 출신 화가임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운동선수의 특징을 잘 잡아냈다. 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실감 나게 포착했다. 경기의 격렬함도 현장감 넘치게 묘사됐다. 흥분한 관중의 모습도 생생하다.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실제로 링 옆에 서서 복싱 경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빌로스는 20세기 초반 사실주의 미국 화가다. 오하이오 주 태생으로 오하이오주립대 재학 시절 야구선수와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프로야구단 입단과 잡지사 삽화작가 제의를 동시에 받았을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하지만 그는 1904년 뉴욕으로 옮겨와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다. 빌로스는 사회개혁을 주창한 급진주의자였다. 그런데 ‘보수 재벌’ 빌 게이츠가 1999년 빌로스의 1910년 작품 한 점을 무려 2750만 달러(약 300억 원)에 구입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더니 둘 사이에 통하는 데가 있는 모양이다.

    클리블랜드의 여인들

    美 재벌 ‘정신적 고향’ 줄지은 기부, 웅장한 결실
    윌리엄 마운트의 ‘음악의 힘’은 인간의 측은지심을 자극한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이 그림은 남북전쟁(1861~1865)이 일어나기 전인 1847년에 그려졌다. 마구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놀고 있는 백인들과 달리 흑인은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숨어서 음악에 귀 기울이고 있다. 음악을 즐기는 데 흑과 백의 차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마운트는 묘한 상황을 통해 현실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흑백차별을 애틋하게 표현했다.

    마운트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이 그림의 배경은 롱아일랜드 스토니브룩에 있는 그의 집. 마운트는 초기에는 역사화를 주로 그렸지만 후기에는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표현한 그림을 많이 선보였다.

    제임스 티소(James Tissot)의 1878년작 ‘7월(July)’엔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한다. 소파에 편하게 기댄 그녀는 화창한 햇볕을 받으며 예기치 않게 찾아온 행복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인이 입은 화려한 옷은 소파를 가득 덮으며 웨딩드레스처럼 흘러 내린다. 창밖 해변에는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양산을 받쳐 든 사람들이 한여름을 만끽한다. 그림 속 여인은 티소의 동거녀이자 모델 캐슬린 뉴턴.

    티소는 프랑스인으로 영국에서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한 화가이기에 그의 대표작을 미국 내륙 도시에서 만난 것이 놀랍고 반가웠다. 티소는 두 아이를 가진 이혼녀 캐슬린과 사랑에 빠지며 화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고 명작을 쏟아냈다. ‘7월’ 역시 그 시절 작품이다.

    그런데 그림에서 표현된 것과 달리 캐슬린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17세 때 약혼자를 만나러 인도로 가던 중 선장과 눈이 맞아 그의 아이를 가졌다. 남편으로부터는 곧 이혼당하고 런던으로 돌아와 새로운 남자를 알게 됐고, 그와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았다. 어린 나이에 아이 둘 딸린 이혼녀가 된 것이다. 1876년 티소와 캐슬린을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이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1882년 불과 28세의 캐슬린이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티소는 슬픔을 못 이기고 파리로 떠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캐슬린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뇌며 살았다.

    티소의 일생도 매우 드라마틱하다. 젊은 시절 파리에서 미술학교를 다니며 드가, 마네 등과 교우했다. 1874년 드가에게서 첫 인상파전에 참가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독자적인 길을 추구했다. 보불전쟁에 참전했고, 파리 코뮌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나 런던을 너무 좋아해 1871년 런던으로 건너가 캐슬린이 사망할 때까지 런던에서 살았다.

    프랑스 여류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의 ‘독서(Reading)’란 그림도 눈길을 끌었다. 정숙한 여인이 풀밭 위에 다소곳이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여인은 모리조의 언니로 한껏 성장하고 있다. 그녀의 옷에는 매우 아름다운 무늬가 장식돼 있는데, 이 그림이 그려진 1873년 당시 프랑스에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섬유산업이 발전해 여성 복식이 매우 화려해지던 시기였다.

    모리조 등 인상파 작품 다수

    이 그림은 모리조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녀는 당시만 해도 매우 드문 여성 화가였고, 인상파에 속했다. 그녀 작품은 1864년부터 살롱에 전시됐고, 1874년 첫 인상파전에도 참여했다. 당시 전시에 참가한 작가로는 세잔,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리 등이 있다. 그녀는 마네의 모델이 되어 그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했고, 훗날 마네의 동생 유진 마네(Eugene Manet)와 결혼했다.

    美 재벌 ‘정신적 고향’ 줄지은 기부, 웅장한 결실
    최정표

    美 재벌 ‘정신적 고향’ 줄지은 기부, 웅장한 결실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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