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호

테마파크에 빠지다

강원 정선 ‘삼탄아트마인’

폐광에서 예술을 캐다

  • | 글·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사진·홍중식 기자 free7402@donga.com

    입력2018-01-2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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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파크는 하나의 주제(theme)로 꾸민 ‘환상의 공간’이다. 그곳에는 비루한 일상과 동떨어진 신비한 이야기가 흐르고, 건축양식과 배경 음악, 종사자들이 입는 의상까지 이 ‘테마’를 뒷받침하도록 철저하게 관리된다. 최근 한국에서는 현대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정점으로 불리는 테마파크 산업이 급성장 중이다. 특히 지역적 특수성과 공명하는 개성 만점 테마파크가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신동아’는 2018년 2월호부터 도시인을 매혹하는 전국 각지 테마파크 박물지를 연재한다.
    2001년까지 운영된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조차장. 삼탄아트마인은 작업 현장을 보존하고 곳곳에 광부 마네킹을 설치해 당시 풍경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2001년까지 운영된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조차장. 삼탄아트마인은 작업 현장을 보존하고 곳곳에 광부 마네킹을 설치해 당시 풍경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제공·삼탄아트마인]

    [사진제공·삼탄아트마인]

    1 53m 높이의 권양기와 사무동 건물을 재활용한 아트센터가 어우러진 삼탄아트마인 전경.
    2 현재 한국미술국제대전 수상작가 초대전이 열리고 있는 아트센터 3층 
    CAM(Contemporary 
       Art Museum) 내부. ‘캠’으로 발음되는 CAM에는 ‘석탄 또는 예술을 캐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3 삼탄아트마인 아트센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들.


    ‘우리는 이 나라의 산업의 용사/ 캐내자 무진장의 기름진 탄을/ 조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하자/ 갱마다 발파 소리 맑게 울린다/ 지하에 묻힌 자원 겨레의 보물/ 나르라 벨트여 쉬임이 없이/ 조국의 심장에 열을 보내자’ 

    시인 박목월이 쓴 대한석탄공사 사가(社歌) 가사 중 일부다. 행진곡풍의 이 노래를 떠올리며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왕복 2차선 도로 위를 달렸다. 한때 ‘무진장의 기름진 탄’을 캐려는 이들이 모여 살던 곳. 이제는 눈 덮인 산등성이와 삐죽한 침엽수 외엔 무엇 하나 시선을 끌지 않는 풍경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서 하늘을 뚫고 오를 듯 솟은 거대한 기계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1970년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탄광에서 사용하던 53m 높이의 권양기(捲揚機·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기계)다. 

    한때 이 장비는 최대 초속 11m로 ‘케이지’를 이동시키며 한 번에 400명씩 광부를 채굴 현장에 투입했다. 연간 40만t에 이르는 석탄도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2001년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거대한 고철덩어리가 돼버린 이 장치를 새롭게 되살린 현장을 보러가는 길이었다. 2011년 정선에 들어온 문화사업가 고(故) 김민석·손화순 부부는 약 10년간 버려졌던 탄광을 ‘예술 광산(art mine)’으로 바꿔놓았다. ‘삼척탄좌’ 자리에 둥지를 튼 아트 테마파크, 곧 ‘삼탄아트마인’ 얘기다. 

    권양기를 바라보며 계속 차를 달리자 붓글씨로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고 쓴 하얀색 간판 아래 갱도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맞은편, 삼척탄좌 시절 종합사무동으로 쓰였던 건물이 지금은 삼탄아트마인 본관이다. 



    미술관을 연상케 하는 빨강 초록 노란색 조형물이 문 앞에 있어 그나마 ‘여긴가 보다’ 싶지, 아직은 그저 옛 탄광 느낌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상주차장에서 이어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탄가루를 뒤집어쓴 선량한 눈망울의 광부를 그린 권학준의 작품 ‘세월’이 ‘예술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 뒤로는 탁 트인 강원도 풍경과 회화 작품이 어우러진 카페 ‘850L’이 펼쳐져 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서울 북한산(836m)보다도 높은 해발 850m 지점, 4층 건물의 꼭대기다. 카페 이름이 ‘850L(level)’인 이유다. 

    비스듬한 지형을 따라 흐르듯 지어진 이 건물이 삼척탄좌의 사무동으로 쓰이던 시절, 지하 탄광 작업을 마친 광부들은 1층 ‘세화장’에서 작업용 장화를 씻고, 2층 ‘샤워실’에서 탄가루로 범벅이 된 몸을 닦은 뒤, 탄광 시설의 동력을 관리하던 3층 ‘종합운전실’을 지나쳐, ‘세월’ 작품이 걸려 있는 4층의 바로 그 출입문을 통과해 퇴근했다. 오늘날 삼탄아트마인 방문객은 이 동선을 거꾸로 밟아 점점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역사와 예술을 만난다. 각각 ‘마인갤러리1’ ‘마인갤러리4’ ‘삼탄자료실’ 등으로 변모한 옛 공간들은 현대 예술가의 설치 작품과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매혹적인 장소가 됐다.

    한국판 ‘테이트 모던 갤러리’

    [사진제공·삼탄아트마인]

    [사진제공·삼탄아트마인]

    1 삼탄아트마인 ‘기억의 정원’ 풍경. 1974년 탄광 안에 고여 있던 물이 터지는 사고로 작업자 전원이 
       사망한 일 등 과거 이곳에서 발생한 각종 사고 희생자를 추모 하는 ‘석탄을 캐는 광부’ 조형물이 서 있다.
    2 삼탄아트마인 내 수장고에는 고 김민석 전 삼탄아트 마인 대표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각종 

       미술품이 보관 돼 있다.
    3 지하 깊숙이 매장된 석탄을 채굴하던 삼척탄좌 수평 갱도 입구.
    4 삼척탄좌 시절 광부들이 작업복을 빨던 구형 세탁기 가 삼탄아트마인에서는 하나의  
    설치 작품으로 
       전시 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건물 벽면을 새빨갛게 칠하고 김수영 시 ‘그 방을 생각하며’를 거꾸로 써놓은 김연희 작가의 설치 작품 ‘Cultural Heritage’를 감상하다 고개를 돌리면 ‘經營多角化 積極展開’(경영다각화 적극전개) 등 이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자 일색의 ‘經營方針’(경영방침) 액자가 걸려 있는 옛 사무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마인갤러리1’이 된 과거의 세화장에는 웨딩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광부들이 탄광의 흔적을 털어내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던 공간이, 지금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는 미술품 전시장이 된 것이다. 그렇게 공간 곳곳에 기획이 살아 숨 쉰다. 오직 탄광을 개조한 미술관에서만 즐길 수 있는 예술 체험이다. 

    손화순 대표는 “2011년 2월 남편과 함께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공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10년간 방치돼 있어 사실상 폐허였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남편은 이곳을 영국 ‘테이트 모던 갤러리’ 같은 세계적 문화재생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투철했다. 한겨울 눈 속을 헤치며 광부의 장화 하나까지 일일이 찾아냈을 만큼 노력을 쏟았다”고 했다. 그렇게 살려낸 폐광의 흔적에 현대 예술을 덧붙여 부부는 한국 최초의 ‘예술 광산’을 만들었다. 그 결과 삼탄아트마인은 2013년 개장과 동시에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중 하나로 선정됐다. 

    손 대표가 언급한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는 낡은 화력발전소 건물을 개조해 현대 미술 전문 전시장으로 꾸민 곳이다. 세계의 예술 애호가들은 신축 미술관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발전소 공간만의 멋과 매력에 열광한다. 오늘의 삼탄아트마인도 꼭 그렇다.

    문화예술 선구자의 꿈

    1 삼척탄좌의 각종 서류를 고스란히 보관해놓은 삼탄역사 박물관.
    2 삼탄아트마인 아트센터 3층 설치 작품.


    게다가 삼탄아트마인에는 매력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과거의 탄광 시설이다. ‘마인갤러리1’을 지나 관람 동선을 따라가면 과거의 조차장이 ‘레일 바이 뮤지엄’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2001년까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심장’ 구실을 했던 이곳에는 당시 석탄을 실어 나르던 탄차, 인부들이 타고 이동하던 인차, 업무상황판 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심지어 ‘손잡이를 잡으시면 석탄이 묻으니 조심하여주세요’ 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을 만큼, 과거의 탄가루마저 그대로다. 천장에 걸린 ‘우리는 가정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그 속에 직장을 사랑한다’는 ‘격문’을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30년 전 탄광 속으로 ‘타임 워프’ 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 공간을 지나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으로 나가면 탄광에서 사용하던 각종 기계를 제작·수리하던 공장동 건물이 보인다. 이제는 빈티지 콘셉트 레스토랑 ‘832L’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지하 650m까지 뚫려 있는 갱도에 산소를 공급하던 과거의 ‘중앙압축기실’은 세계 각지의 ‘원시미술’을 소개하는 ‘원시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삼탄아트마인을 가꾸는 데 헌신하다 2015년 10월 세상을 떠난 김민석 전 대표가 평생 모은 소장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1 삼척탄좌 시절 화장실로 쓰인 ‘마인갤러리3’. 갑옷 입은 기사를 형상화한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2 손화순 삼탄아트마인 대표가 권학준의 회화 ‘세월’ 앞에 서 있다.


    김 전 대표는 2006년 자신의 수집 인생을 정리한 책 ‘세계의 모든 스타일’(디자인하우스)을 펴냈을 만큼 유명 수집가였다.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4년 광주비엔날레 등의 전시 기획에 참여해 각각 대통령상과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았을 만큼 명망 있는 문화기획자이기도 했던 그는 말년의 열정을 오롯이 삼탄아트마인에 쏟았다. 손 대표는 “남편 사망 후 짐을 정리하다 ‘내가 이곳에 없더라도 이곳이 영원히 남아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메카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놓은 메모를 봤다. 그때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남편 뜻을 이어가야겠구나, 언젠가 우리 부부가 다 이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남편이 설립자로서의 명예를 존중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삼탄아트마인은 김 전 대표 사망 후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이듬해 초 삼탄아트마인이 배경으로 등장한 송혜교·송중기 주연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큰 화제를 모으며 ‘한류 관광지’로 부상했다. 최근에는 강원도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선정한 ‘올림픽 테마 로드 1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예술 광산’, ‘예술 감성을 향유할 수 있는 아트 테마파크’를 표방하는 이곳이 더 많은 이의 사랑을 받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 주소 강원도 정선군 함백산로 1445-44
    ● 문의 033-591-3001 www.samtanartm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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