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호

정여울의 책갈피 속 마음여행

열네 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7-03-21 1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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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열네 살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열네 살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한 번뿐인 人生

    여성들끼리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한 토크쇼에서 이런 질문을 들었다. 수많은 여성이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고, 더욱 짠한 과거의 자신을 향해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열네 살의 나에게, ‘넌 잘 해낼 거야, 그러니 이제 걱정과 두려움은 그만 접어둬’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표정 속에는 겁 많던 소녀 시절의 나약함에 대한 후회와 이제는 좀 더 씩씩해진 자신을 향한 자존감이 깊게 배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답은 배우 제인 폰다의 것이었다. 그는 열네 살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니오’라고 말해도 괜찮아.(It′s good to say ‘No’.)”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무엇이든 ‘나는 할 수 있다’고, 예스라고, 다 해낼 거라고 자신하면서 살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단호하게 거절하는 용기’야말로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길임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 인생의 화두였다.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없어, 아니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남는 길인 것 같아, 싫으면서도 좋다고 한 적이 수두룩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때가 많았다. 결국 나는 어디에 있어도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기 싫은 일에 ‘노’라고 대답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진짜로 ‘예스’라고 대답하고 싶은 순간에는 너무도 지치고 피로해져 있을 때가 많았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내느라 하고 싶은 일을 해낼 시간이 줄어들어갔다. 그런 위기감을 결정적으로 느꼈을 때가 바로 서른 즈음이었다.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위기였고, 동시에 그 위기 속에서 ‘진정 나다운 나’를 하루에 1ml씩, 그야말로 나무늘보의 느린 속도로 힘겹게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힘겹고 지긋지긋한 인생의 과도기가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열렬하게 나를 탐구하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대신 나 자신에 대한 빛나는 깨달음을 가장 많이 얻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탈리 크납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을 읽으며, ‘가장 힘들고 외로운 인생의 과도기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숙할 수 있는 시기’라는 작가의 주장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춘기든 중년의 위기든 갱년기든 간에 모든 과도기는 탄생의 형태를 내포한다. (…) 탄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경험에 스스로를 열고 변화시킬 때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과도기의 특징은 ‘곧 죽을 것 같이 힘들다는 느낌’ ‘이러다가 내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위기감’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과도기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자아가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거의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에서 그의 소중함을 처절하게 느끼듯이. 우리는 인생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하는 과도기에 ‘더 나다운 나’를 향한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나’에 대한 깨달음

    과도기에 오히려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 것은 개인 단위뿐 아니라 사회적인 단위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위대한 생각은 종종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특히 강력하게 부각되고 그 물결을 더는 막을 수가 없다. 과도기적인 불안과 창조성은 서로 맞물려 나타나기 때문이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위기감 속에서, ‘더 이상 이대로는 계속할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새로운 문화나 아이디어를 향한 절박한 발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탈리 크납은 이렇게 말한다. “불확실한 시기에 삶은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고. 그리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 과연 이별의 슬픔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공포, 은퇴하고 나면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하는 절망, 노년의 나에게는 과연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조바심은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로 전환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이런 문장들에서 큰 용기를 얻었다. “봄의 벚꽃을 보면서 우리는 과도기의 흔들리는 현재와 화해할 수 있다. 벚나무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굽히지 않고 여린 잎을 낸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써야만 그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다.” “삶은 늘 위험에 처해 있고, 늘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그리고 바로 이렇듯 끊임없이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이 상상과 창조성, 창작의 엔진이 된다.” 시인 힐데 도민은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지닌 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했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낯선 세 나라에서 떠돌이와 다름없이 망명 생활을 하다가 비로소 위대한 시인이 됐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모든 경력을 내팽개친 은거 생활 끝에 자연을 탐구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전 세계 자연농법 이론의 시조가 됐다. 피에로로 일하다가 세계적 작가이자 애도 상담가가 된 바버라 파흘-에버하르트,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은 후 마지막 3년 동안 기존에는 전혀 해내지 못했던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 볼프강 헤른도르프…. 그들은 인생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었다. 특히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인생을 바꾼 작가 헤른도르프의 이야기는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일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경험인지 알려준다.



    그는 더 오래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바로 시간이 제한돼 있다는 사실이 그의 어마어마한 창조성을 작동시켰다. 그는 거의 매일 강렬한 순간을 경험했다. 병원 까페테리아에서 참새 모이를 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1학년짜리가 제 몸집보다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신호등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실존의 위협을 문학으로, 그리고 깊은 지각으로 승화시켰다. “다른 사람은 살지 못하는 바로 이 순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해한 일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중에서



    ‘왜 가르쳐주지 않았어?’

    나는 이제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열네 살로 돌아간다면, 인생은 힘들고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고 빛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인생의 아름다움 이전에 인생의 무서움을 먼저 알아버린 열네 살의 나 자신을 깊이 위로해주고 싶다. 미래를 막연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꼭 알려주고 싶다.

    생존, 경쟁, 성공, 이런 단어들의 엄청난 위력과 너무 일찍 싸움을 시작해야 했던 나에게, 그런 것 이전의 삶, 더욱 원초적인 놀이와 생명의 세계가 지닌 가치를 알려주고 싶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인생은 아름답고 소중하고 빛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기 전에,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 남들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는다’는 강박관념을 먼저 심어주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우리는 삶이 지닌 본래의 가능성, 세계가 지닌 원초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나는 서른 즈음이 돼서야 교육과 부모의 영향을 모조리 던져버리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질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삶이 아무리 힘겹더라도 누구에게나 인생 자체가 진정으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 힘들고 괴로운 순간까지도 지나고 보면 아름답고 눈부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 아이들이 어쩌면 이렇게 질문하기 전에. ‘엄마는 왜 가르쳐주지 않았어? 인생이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인생이 무섭고 사람이 두렵고 세상이 지독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전에, ‘세상을 조심하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세상을 즐기고, 쓰다듬고, 사랑하라’고 가르쳐주는 어른이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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