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항쟁이 아니라 촛불혁명이다”
- 박정희 현상은 신화인가 실체인가, 사라질 것인가 부활할 것인가
-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좌파신자유주의가 원조 헬조선을 낳았다”
- “독일 모델을 도입하고 라틴적 삶에 대한 관점도 바꾸자”
진보성향의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펴낸 이 책의 제목에서 눈길을 끄는 키워드는 ‘혁명’과 ‘체제’다. 손 교수는 지난해 11월 이후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진 촛불시위가 대통령 파면으로 귀결될 것임을 예견한 듯 항쟁도 아니고 혁명이란 표현을 썼다. 책에선 ‘11월 혁명’과 ‘촛불혁명’이란 표현이 번갈아 등장한다. 처음엔 광화문이란 공간에 주목해 ‘광화문 항쟁’이라고 쓰려 했으나 이 현상이 전국적 항쟁이란 점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본받아 ‘11월’을 붙였고, ‘박근혜 퇴진’을 넘어 한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쟁’이 아닌 ‘시민혁명’을 택했다고 설명돼 있다.
지난해 11월 시작된 혁명은 올해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혁명의 이름값을 충족시켰다. 하지만 손 교수의 시선은 대통령 파면에 멈춰 있지 않다. 그것이 단순한 정권교체 수준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 체제변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치체제는 보통 4, 5종류가 거명된다. 정부 수립과 함께 성립된 48년 체제(건국), 5·16군사정변으로 군부정부 수립을 알린 ‘61년 체제’(산업화), 유신정부가 출범한 ‘72년 체제’(독재), 정치적 민주화로 성립된 ‘87년 체제’(민주화)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성립된 ‘97년 체제’(신자유주의)다.
손 교수는 ‘박근혜 게이트’를 단순한 권력농단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 정치체제의 모순이 겹겹이 쌓여서 발생한 중층적 사건으로 풀어냈다. 먼저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사건사’ ‘복합국면사’ ‘구조사’라는 3가지 역사층위를 변용했다. 이 층위는 각각 시간적으로 단기, 중기, 장기적 원인과 결부돼 있다. 그러나 손 교수는 이를 수평적 시간이 아니라 수직적 층위의 문제로 전환해 표층, 중층, 심층의 3중 구조로 수정했다. 그리고 표층은 61년 체제, 중층은 87년 체제, 심층은 97년 체제와 맞닿아 있다고 풀어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이 결정된 10일 오전 11시 반으로부터 3시간 뒤 서강대 다산관 6층 그의 연구실에서 손 교수를 만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대통령 파면으로 결정 난 탄핵 심판 결과를 본 소감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기쁘고 슬프다. 한편으론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고, 법이 살아 있고, 뭔가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점에서 기쁘다. 동시에 어떻게 이런 사태까지 초래됐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슬프다. 그 과정에서 심화된 분열과 앞으로 일어날 상처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답답하다.”
11월 항쟁이 촛불혁명 됐다
▼ 그 결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 앞으로 국민이 유의할 점은 무엇일까.“국민이 후보를 충분히 검증하고 미래를 숙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칫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졸속으로 투표할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 역사의 과거에 있었던 열망과 실망이 되풀이될까 우려스럽다. 원래 선거라는 게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게임이다 보니 갈등적이고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번 탄핵 과정에서 심화된 사회적 균열 갈등 이런 것들이 대선 과정에서 악화되거나 심화되지 않을까도 걱정스럽다. 선거 과정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후보보다 통합과 치유로 승화시키려는 후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조기 대선으로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당선 가능성이 더 커졌다. 다른 후보들이 ‘개헌’이란 기치 아래 집결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책의 키워드 중 하나도 개헌인데.
“앞으로 대선 정국에선 2개의 키워드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계개편’이고 다른 하나가 ‘개헌’이다. 정계개편은 (문재인의) 패권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걸 것이다. 하지만 정계개편은 국민에겐 식상하고 부정적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다는 점에서 형식은 정계개편이 되더라도 내용은 개헌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60일 안에 선거를 해야 하는데 이 시간 동안 개헌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당장 개헌하자는 목소리보다 집권 뒤 개헌이나 임기 단축(3년 임기)을 요구하는 변형된 형태의 개헌연대가 가능할 것이라 본다. 두 번째 문제는 여론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70~80%의 민심이 탄핵지지, 부패청산과 적폐청산을 지지하는 상황이라 개헌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선(先)대선 후(後)개헌’이나 ‘선(先)과거청산 후(後)개헌’ 주장도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역대 개헌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결국 ‘자기들만의 리그’, 정치인들만의 밀실협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방치할 경우 ‘2017년 체제’도 불가능할 수 있다.”
“7공화국이 아닌 2공화국이 돼야”
▼ 개헌을 통해 수립될 공화국은 ‘제7공화국’이 돼선 안 되고 진정한 시민들의 바람에 기초한 ‘제2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했다.“정치인, 학자, 전문가의 손에만 맡겨두지 않고 일반 대중의 참여 속에 개헌을 이뤄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촛불혁명을 ‘박근혜 퇴진’으로 한정하는 것은 최소주의적 접근이다. 이번 기회에 다 둘러엎자고 달려드는 최대주의적 접근도 잘못이지만 최소주의적 접근도 문제다. 박근혜의 퇴진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와 대중적 정서를 잘 조화시키는 최적화한 접근이 필요하다. 시대적 과제는 박근혜의 물리적 퇴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표 정치’의 퇴진이고, ‘헬조선’으로 표현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노와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열망에 있다. 이를 담아낼 수 있는 ‘큰 그림’이 개헌이다. 대중적 정서도 ‘쇠도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한 만큼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무엇이고 ‘이러한 나라를 만들어달라’고 하는 주권자로서의 요구를 정치권의 화두로 전달해야 한다. 대선 역시 그런 것에 대한 정치권의 화답이 도출되는 장이 돼야 한다.”
▼ ‘박근혜 게이트’의 표층은 61년 체제, 중층은 87년 체제, 심층은 97년 체제와 맞닿아 있다고 풀어냈다.
“박근혜 게이트를 일반인의 눈, 저널리즘 시각에서 보면 최순실 등등에 의해 초래된 국정농단 사건으로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번 사건을 우발적 사건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선 저토록 문제가 많은 박근혜란 인물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 생각해보자. ‘박정희 신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번에 드러난 블랙리스트, 권력의 사유화, 공작정치, 정경유착 등 박근혜 정치의 여러 문제 역시 ‘박정희 체제’라 불린 61년 체제와 공명하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대통령의 이런 문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 때 아들 김현철 씨가 감옥에 갔고, 김대중 대통령 때는 두 아들이 감옥에 갔고, 노무현 대통령 때도 어쨌든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됐다. 이를 보면 박정희·박근혜의 문제를 떠나서 1987년 민주화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의지한 ‘불완전한 민주화’였기에 초래됐다고도 볼 수 있다. 더 심층으로 들어가면 촛불혁명의 제일 밑바닥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초래된 ‘헬조선’에 대한 흙수저들의 분노가 깔려 있다. 이는 “돈 많은 부모 만난 것도 실력”이라는 정유라의 발언과 진주 촛불집회에서 “사람을 돈과 이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로 보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10대 소녀의 발언에 응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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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1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촛불혁명의 표피에는 박근혜 게이트로 표출된 블랙리스트,공작정치 등 박정희 체제가, 중간 수준에는 제왕적 대통령제 등
87년 헌정 체제가, 깊은 곳에는 97년 경제위기와
시장 만능주의 신자유주의체제가 만든 헬조선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책 본문 중
▼ 촛불혁명의 심층원인은 87년 체제보다 97년 체제에 있다고 역설했다.
“87년 체제의 성립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박정희가 왜 부활했는가. 진보정권을 표방하면서 신자유주의주의 정책을 채택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민생파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헬조선’이라 부르는데 헬조선 2기가 맞다. 헬조선 1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다. 앞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나더라도 민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헬조선 3기로 불리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문재인은 ‘노무현 정부가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 못한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당시의 시대정신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되, 권위주의를 타파하자는 것’이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문재인은 지금도 뭐가 문제인지를 모른다. 당시나 지금이나 시대정신은 양극화 해소에 있다. 흔히 박근혜가 아버지를 다시 죽였다고 말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새 정권이 들어서도 헬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박정희 신화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 좌파정부 10년이 끝난 뒤 우파정부 10년 집권에 대해 ‘등 따숩고 배부른 운동권 엘리트(먹물)에 대한 대중의 복수’라는 표현을 썼다.
“박정희 현상을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무지의 산물로 봐선 안 된다. 그 현상엔 구체적인 물적 기반이 존재한다. 두 가지다. 첫째는 구체적 삶의 체험이다. 현재 태극기시위대의 주축을 이루는 기성세대는 박정희 시절 보릿고개와 그것을 극복한 탈가난을 체험했다. 그런 그들에게 아무리 박정희 신화가 허구라는 분석을 들려줘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마는 이유다. 두 번째는 좌절과 분노의 체험이다. 1997년 대선에선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다. 하지만 10년 뒤인 2007년 대선에선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그 10년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다면서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민생 문제를 악화시킨 진보정권의 엘리트들을 대중이 심판한 것이다.”
독일 모델 & 라틴 라이프
“외국인들은 촛불시위, 희망버스, 골리앗 투쟁을 보며 열정적인 정치운동을 펼친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자랑스럽지 않다. 한국에서 거리의 정치가 활성화한 것은 제도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제도 내에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절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대의정치의 실패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대의정치가 제대로 기능을 하도록 하려면 독일식 정치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내각제, 18세 이상 투표제,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리고, 국민소환제처럼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도 강화해 승자독식의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헬조선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영미식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아니라 독일식 이해당사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전환해야 한다. 주주의 이익만 중시할 게 아니라 하청업체 노동자, 소비자의 이익을 모두 반영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소액주주운동도 결국 주주자본주의인데 소액주주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이 결국 외국투기자본의 이익을 챙겨주는 꼴만 되고 있다. 삼성이 돈을 몰래 빼돌려 정치자금으로 쓴다면 그게 주주의 이익만 침해한 것인가. 노동자와 하청업체가 열심히 일한 몫도 빼돌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도 허용해야 한다.”
▼ ‘보수는 작은 정부, 진보는 큰 정부’라는 신화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수정부라는 레이건과 트럼프가 낙태를 풀자고 하나, 규제하자고 하나. 레이건과 트럼프가 국방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하나, 줄여야 한다고 하나. 정부에 따라 특정 부위나 기능을 강화하거나 약화할 뿐이다. 규제 완화도 무조건 선(善)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것도 연령이 오래된 선박에 대한 규제를 풀어줬기 때문 아닌가. 흔히 보수정부는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다고 생각하는데 박근혜 정부가 민간기업인 CJ의 사장을 바꾸라 마라 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폴라니가 말했듯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면 사회는 무너지게 돼 있다. 사회를 위해 필요한 규제는 강화하고 불필요한 규제는 풀어줘야 한다.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민간이 참여하는 검찰위원회를 만들어 사회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이윤효율성이 아니라 공공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개혁을 해야 한다. 한국이 헬조선이 된 것은 취업이 곧 복지였던 사회에서 언제든 해고가 가능하게 만들어버려 복지 시스템이 부족한 동아시아 모델과 해고가 유연한 유럽 모델의 나쁜 점만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경제적 지옥이 된 것이다. 정리해고만 고집할 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같은 대안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남미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도 바꾸자. 일할 줄만 알고 놀 줄은 몰라 세계 최장 노동시간에 시달리느니 삶을 즐길 줄 아는 라틴적 삶도 좀 배울 줄 아는 ‘문명관의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