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노르웨이의 예술적 아이콘은 화가 뭉크다. 그의 ‘절규’와 ‘마돈나’는 보석 중에 보석이다. 뭉크의 그림을 보기 위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들렀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위대한 화가로 거듭난 뭉크의 삶과 작품이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작은 나라 큰 미술관
노르웨이는 면적이 남한의 4배 정도 되지만 인구는 남한의 10분의 1인 520만 명에 불과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만 달러로 우리의 2.5배에 달한다. 생활환경도 매우 쾌적하고 복지정책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완벽한 사회안전망으로 죽을 때까지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당연히 국민의 행복지수도 높고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힌다.문화 인프라도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데,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노르웨이 국립미술관(National Museum of Art, Architecture and Design)’이다. 수도 오슬로의 한복판에 있는데, 연간 7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뭉크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꼭 찾아가야 하는 미술관이다.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70만 명이 수도 오슬로에 몰려 있다. 어느 나라나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인구가 몰려 있다는 것은 좋은 문화시설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유리한 조건이다. 미술관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관람객이 많이 찾아와야 한다. 인구가 밀집해 있을수록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유리하다. 외국 관광객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내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노르웨이는 독립된 역사가 오래지 않은 만큼 국립미술관의 역사도 일천한 편이다. 1524년부터 1814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고, 1814년부터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과 같은 독립국가는 1905년에야 만들어졌다. 국립미술관은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1837년에 처음 시작됐지만 정식으로 미술관 체제를 갖춘 것은 완전 독립을 추구하던 1903~1907년이다.
부자들의 기부
정부는 운영상의 비효율성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을 하나의 행정조직 아래 묶는 작업을 진행했다. 2003년 7월 1일부터는 행정적으로는 ‘국립미술관(Nasjonalmuseet)’이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합해졌다. 지금은 물리적으로도 한곳에 모으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국립미술관이지만 미술관의 발전에는 민간 기부자들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1900년대 초 미술품 수집가 올라프 쇼(Olaf Schou)는 뭉크 작품을 비롯해 노르웨이 화가의 작품 115점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뭉크 작품은 80%가 민간이 기부한 것이다.
역사가 100여 년에 불과한 데다 국립미술관이어서 당연히 노르웨이 작품을 중시했다. 그런데 거상 크리스티안 랑가르드(Christian Langaard)가 서유럽 작품을 대량 기증하면서 지금은 서유럽 유명 화가들의 작품도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다. 역시 부자들의 기부 덕분이다. 미술관 컬렉션이 프랑스 모더니즘으로 확대돼 지금은 인상파는 물론 마티스, 세잔, 고흐 등의 작품과 노르웨이와 국제적 유명 작가의 드로잉과 판화도 대량 소장하고 있다.
뭉크의 나라
노르웨이는 덴마크로부터 독립하면서 겨우 미술 분야도 독립적인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와서야 독창적 미술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초상화 부문에 불과했다. 이어서 풍경화 부문에서 독창적 회화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19세기 말 드디어 걸출한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가 탄생한다.
뭉크는 상징주의 또는 표현주의로 분류되는 작가인데 독보적인 예술 영역을 개척한 노르웨이의 국보와 같은 화가다. 어디를 가나 어떤 형태로든 뭉크를 접할 수 있는 노르웨이는 가히 뭉크의 나라다.
관람객은 대부분 뭉크의 작품을 보기 위해 이 미술관에 들른다. 뭉크 작품이 아니면 구태여 이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어쨌든 미술관에는 뭉크 작품이 많이 전시돼 있다. 그중 ‘절규(The Scream)’와 ‘마돈나(Madonna)’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꼭 사진을 찍는다. 한국 관광객에게는 미술관의 포토존이다.
‘절규’는 1893년에서 1910년 사이에 4개의 버전이 만들어졌다. 두 개는 유화이고 두 개는 파스텔화다. 국립미술관 소장품은 1893년에 만들어진 유화다. 나머지 유화 1점과 파스텔화 1점은 ‘뭉크 미술관(The Munch Museum)’이 갖고 있다. 유화는 1910년에 그린 것이고 파스텔화는 1893년에 만들었다. 이 3점은 좀체 다른 곳에 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슬로에 와야만 볼 수 있다.
‘자연의 절규’
뭉크는 1895년 ‘절규’의 석판화도 만들었다. 이 중 일부가 남아 있다. 뭉크는 이 작품에 ‘자연의 절규(Scream of Nature)’라고 독일어 제목을 붙였다. 뭉크의 ‘절규’는 아주 분노한 표정으로 절규하는 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 뒤에는 휘몰아치는 강물과 소란스러운 오렌지색 하늘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이것은 인간의 절규이고 자연의 절규다. 이미 100년 전에 뭉크는 절규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을 묘사했다. 이 그림을 현대 회화의 아이콘이자, 우리 시대의 모나리자라고 묘사한 사람도 있다. 석판화는 뭉크 사후에 다시 제작되기도 했다.
‘마돈나’도 뭉크의 대표작이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인의 상반신 그림으로 매우 전위적인 자태다. 여기에는 여인의 절규가 있다. 1892년에서 1895년 사이에 그려진 유화로 이 그림 역시 여러 개의 버전이 있다. 국립미술관과 뭉크 미술관에 각기 한 점씩 있고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에도 한 점이 있다. 개인이 소장한 작품도 있다. 판화도 제작돼 여러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는 더 많은 뭉크 작품이 있다. 뭉크는 표현주의 작가인데 발생지인 독일의 표현주의를 압도하는 표현주의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화가다. 그런 만큼 국립미술관의 전시만으로는 전 세계의 관심과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따로 뭉크 전용 미술관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오래전부터 논의됐다.
그러던 차에 뭉크는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을 모두 오슬로 시에 기증했다. 그의 누이도 소장하고 있던 뭉크 작품을 모두 시에 기증했다. 오슬로 시는 뭉크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별도의 뭉크 미술관을 기획했다. 오슬로 시는 뭉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1963년 ‘뭉크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후 미술관은 뭉크의 판화도 대량 구입해 소장품을 보강했다. 뭉크 미술관은 뭉크가 그린 전체 회화 작품의 절반 이상을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판화는 거의 모두 소장하고 있다. 그림 1200여 점, 판화 1만8000여 점, 드로잉 4500여 점이다. 그 밖에도 조각, 쟁반, 서적 등을 소장하고 있다.
뭉크 사망 50주년을 맞은 1994년에는 미술관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확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미술관이 대중의 수요를 충족하지 못해 오슬로 시는 바닷가에 새로운 뭉크 미술관을 짓고 있다. 2018년에 완공해 이전할 예정이다.
뭉크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정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죽은 후부터는 외골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가족관계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지만 시끄럽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 이런 뭉크의 성정이 작품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나중에는 알코올 중독까지 이르렀다. 40대에 와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기도 했다. 1940년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부터는 많은 핍박을 받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노르웨이를 넘어 세계적인 대화가로 우뚝 섰다.
뭉크의 작품은 유달리 그림 도둑들에게 시달려왔다. 1994년 2월 12일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동계 올림픽이 개막하던 날 두 명의 도둑이 국립미술관을 침입해 뭉크의 ‘절규’를 훔쳐갔다. 이들은 “허술한 경비에 감사한다(Thanks for the poor security)”라는 쪽지를 남기면서 국가를 비웃기까지 했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범인들은 같은 해 3월 작품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 경찰은 특별팀을 구성해 수사에 나섰으며 1994년 5월 범인을 잡고 그림은 아무런 손상 없이 회수됐다.
작품 수난사
이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8월, 이번에는 뭉크 미술관에 복면을 한 권총강도들이 들이닥쳐 ‘절규’와 ‘마돈나’를 강탈해 갔다. 관람자들이 전시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는 대낮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또 한 번 온 나라가 뒤집혔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으로 이듬해 4월 마침내 범인들이 잡혔다.그러나 작품은 회수되지 못했다. 증거 인멸을 위해 불태워버렸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시 정부는 작품 회수에 도움을 주는 자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밀 보안 검사를 위해 미술관 문을 열 달이나 닫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2006년 8월 경찰은 두 작품을 모두 안전하게 회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회수 과정에 관한 자세한 정황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림들은 약간 손상이 있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양호한 편이라고 발표했다. 그해 9월 2점의 그림은 손상된 채로 5일간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이를 보려고 5500여 명이 다녀갔다.
다음 해 5월에는 ‘다시 방문한 절규와 마돈나(Scream and Madonna-Revisited)’라는 제목으로 수선된 작품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런 그림은 훔친다고 해서 팔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도둑이 붙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또 왜 이렇게 중요한 그림들을 도난당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기야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도 도난당한 적이 있으니 도둑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스릴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노르웨이 미술의 아버지, 달
대형 풍경화인데 나는 그 그림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 그 작품은 요한 크리스티안 달(Johan Christian Dahl·1788~1857)의 그림이었다. 달은 노르웨이의 첫 낭만주의 화가로 노르웨이 풍경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져 있던 노르웨이 미술의 황금기를 열어준 화가다.
노르웨이 화가로는 처음으로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았고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달은 죽은 지 6년 후에 태어난 천재 화가 뭉크에게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 자리를 내줬지만, 19세기 전반까지 노르웨이 화가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걸출한 화가였다.
달은 생애 대부분을 독일과 외국에서 보냈지만 조국 노르웨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남달랐다. 틈나는 대로 노르웨이를 방문했고 고향 베르겐에서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미술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공헌해 노르웨이 문화예술사에 큰 인물로 기록됐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창립 멤버로서 미술관 설립에 핵심적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은 물론 그의 수집품도 모두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달은 베르겐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건이 좋았더라면 더 크게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어릴 때는 매우 궁핍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회고했다.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는데 교회 선생님이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화가 선생을 주선해주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도 체계적인 화가 수업은 받지 못했다. 1811년 코펜하겐으로 유학을 가면서부터 비로소 체계적인 화가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줄곧 외국에 머물면서 그는 화가로 대성했다. 독일 드레스덴은 작가로서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주된 활동 무대였다.
유달리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스탈하임에서 본 풍경(View from Stalheim)’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크기도 190×246cm나 되는 대작이다. 이 그림은 달의 풍경화 중 최고 걸작이고 노르웨이 미술의 아이콘이다. 달은 피오르 산간 마을 스탈하임에서 바라다본 자연 풍광을 그렸다. 석양 무렵 피오르 산악 풍경으로 무지개까지 아름답게 걸쳐져 있다.
이 그림의 첫 번째 목적은 사실주의를 완성시키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적은 조국 노르웨이의 찬란한 풍광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달은 이 그림을 1836년에 시작해 1842년에 완성했다.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작이다. 달은 이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나 고생을 해서 이후에는 이런 크기의 그림은 그리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한 백작부인을 위해 그렸는데 그 후손이 1914년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림 속 계곡은 이후 화가라면 꼭 가서 한번 그려보고 싶은 성지가 됐다. 화가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몰려들었다. 그 덕에 1885년 스탈하임에는 고급 호텔까지 들어섰다.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무엇까지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새로운 콘텐츠가 만들어져 유명해지면 사람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후손들에게는 돈벼락도 안겨주었다.
새 미술관에 대한 기대
노르웨이 의회는 2013년 새 미술관 프로젝트를 통과시켰고 정부는 2020년까지 새로운 건물로 통합 미술관을 개관할 계획이다. 오슬로 부둣가의 ‘노벨평화센터’ 뒤에 새로운 미술관 건물이 건설 중이다. 새 미술관은 전시 공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지금은 미술관의 중심인 ‘내셔널 갤러리’ 건물에 중요한 소장품이 모두 전시돼 있고 관광객은 뭉크 그림이 전시된 이곳만 들른다.
거기다가 전시 공간 문제로 뭉크의 작품조차 방문객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새 미술관이 준공되면 노르웨이 국민은 뭉크를 전 세계에 마음껏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르웨이 풍경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달도 신나게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은 컨템퍼러리 작품도 소장하고 있지만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작품들을 보려면 1990년에 개관한 컨템퍼러리 미술관으로 찾아가야 했다. 관람객들은 시간적 제약이나 여러 가지 불편함 때문에 이곳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컨템퍼러리 미술관은 노르웨이는 물론 세계적인 동시대 작가의 1945년 이후 작품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새 미술관이 지어지면 건물 그 자체도 컨템퍼러리 작품일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전시되는 컨템퍼러리 작품은 새 건물과 어우러져 그 품격이 한층 드높아질 것이다. 앞으로 노르웨이의 보석 같은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정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前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