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호

보수의 대표지성 박세일 유고 ‘지도자의 길’

“공치, 협치해야 팀워크 작동해”

  • 정리·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7-03-24 1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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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版 목민심서… 경세학·안민학 논해
    • “아랫사람 건의 믿어주되 동조하지 말라”
    • “小言해야… 먼저 생각 밝히면 답변 꾸며내”
    • “소아심(小我心) 줄이고 천하심(天下心) 키우라”
    • 기득권·낡은 옛것 일신할 ‘경장(更張)의 시대’
    박세일(1948~2017)은 경세가(經世家)다. 1990년대 초반부터 산업화,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 연구에 천착했다.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었다.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에서 정책기획수석, 사회복지수석으로 일하면서 개혁을 주도했다. 17대 국회의원으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정책위의장을 역임했다. 2005년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면서 의원직을 던졌다.

    좌우명은 이천하 관천하(以天下 觀天下), 아호는 위공(爲公)이다. 이천하 관천하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천하로 천하를 본다’는 뜻. 천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위공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천하위공(天下爲公·천하는 공공을 위한 것)에서 따왔다.

    그가 지향한 나라는 부민덕국(富民德國). 안으로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뜻하고, 밖으로는 덕스러운 국가로 이웃나라의 존경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국민통합·국가발전의 이념으로서 개인의 존엄 창의 자유를 기본으로 삼되 공동체적 가치와 연대를 중시하는 ‘공동체자유주의’를 주창했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이후의 지향으로써 선진화를 제안했다. 선진화란 부민덕국이 되는 것이다.

    또한 천민자본주의, 인기영합주의의 해법으로 선공(先公), 금욕(禁慾)의 선비민주주의, 선비자본주의를 제시하면서 “한국의 선진화로만 끝나지 않고 반드시 남북통일을 이뤄 한반도 전체의 선진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적 국가경영학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법학과와 미국 코넬대 대학원(경제학 박사)을 졸업한 후 1985년부터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지도자의 길’은 1월 13일 타계한 그의 유고(遺稿)다. 200자 원고지 175장 분량의 이 글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연상케 한다. 이론적 통찰과 현장의 실천에서 비롯한 지도자론(指導者論)은 국가 경영뿐 아니라 기업이나 조직 운영에서도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이 소고(小考)가 경세학(經世學)·안민학(安民學)이라는 학문 체계의 첫걸음이 되길 바랐다. 조선왕조 때 수양학(修養學)은 발전했으나 경세학은 위축했다. “주기적으로 일어난 사화, 옥사가 경세학적 탐구를 위축시킨 게 아니었나 싶다”고 그는 짚었다.

    정도전(1342~1398)의 ‘경국대전’, 이이(1536~1584)의 ‘성학집요’ ‘동호문답’ ‘만언봉사’, 정약용의 ‘목민심서’ ‘경세유표’ ‘탕론’ 등이 경세학적 탐구의 결과물로 꼽힌다.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쓰면서 선비의 일은 수기(修己)가 반(半)이고 목민(牧民)이 반인데 목민에 대한 책은 거의 전해오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내 책(목민심서)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으랴”라고 한탄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구의 국가 정책 및 조직 경영 이론이 수입됐으나 한국적 국가경영학, 조직경영론은 예외적 탐구에 그쳤을 뿐 학문으로서 확장하지 못했다.  

    1월 13일 타계한 박세일이 유고로 남긴 ‘지도자의 길’ 중 국가 경영뿐 아니라 조직 운영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을 발췌했다. 올해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국가를 이끌 적합한 후보를 고르는 과정에서도 그의 탐구 결과를 적용해볼 만하다.  



    “후대의 성공을 고민하라”

    그는 “어느 공동체든 발전하려면 지도자가 훌륭해야 한다. 훌륭한 지도자 없이 발전하는 공동체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구성원의 질과 수준도 중요하나 지도자와 구성원의 역할과 사명은 다르다”고 썼다. 공자 또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고 했다.

    그렇다면 훌륭한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지도자의 길을 가려면 적어도 네 가지 능력과 덕목을 갖춰야 한다”면서 첫째는 애민(愛民)과 수기(修己), 둘째는 비전과 방략(方略), 셋째는 구현(求賢)과 선청(善聽), 넷째는 후사(後史)와 회향(回向)을 꼽았다. 리더가 되려는 이들은 평소에 이 네 가지를 갖추고자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애민과 수기 : 지도자는 애민정신을 갖고 자기 수양에 진력해야 한다. 나라와 국민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돼선 안 된다. 자기 수양의 핵심은 사욕(私慾)과 소아심(小我心)을 줄이고 공심(公心)과 천하심(天下心·천하와 내가 둘이 아니라고 보는 마음)을 확충하는 것이다. 애민과 공심(公心)의 확충이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기본 자질이다. 이것을 강조한 책이 수기치인의 길을 가르치는 ‘대학(大學)’이다.

    ②비전과 방략 : 지도자는 최소한 세계 흐름과 국정 운영의 대강(大綱)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가 나갈 ‘큰 방향과 큰 비전’을 인식하고, 그 비전을 실현시킬 ‘큰 방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니 준비해야 한다. 안민과 경세의 꿈과 방략을 갖지 않고, 치열한 준비, 고민도 없이 경세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역사와 국민에 대해 대단히 무례한 일이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져”

    그는 지도자가 △부민 △흥교 △기강 △자강을 이뤄내려면 △자기학습(自己學習) △존현(尊賢) △구현(求賢) △선청(善聽)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①자기학습 : 세종대왕처럼 사색과 독서를 통해 신하를 뛰어넘는 국정 운영의 전문적 식견을 가졌다면 문제가 거의 없을 것이나 대부분의 리더는 세세한 부분에 대한 전문성은 크게 부족한 게 일반적이다. 또한 세계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리더는 첫째, 천하의 대략을 통찰하는 안목을 기르고자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학습이다. 그래야만 참모(staff)가 제안한 내용의 당부(當否)를 구별할 안목이 생긴다. 공부하지 않고 지도자가 될 생각을 말아야 한다.

    ②존현 : 천하는 천하의 머리로 다스리는 것이지 리더의 머리로 다스리는 게 아니다(율곡, 集天下之智 決天下之事). 옛날에는 현인이 오면 리더는 먹던 음식도 내뱉고 달려갔다.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배울 수 없다. 전체의 대략을 아는 리더에게 상세하고 구체적인 것을 보충해주는 게 인재의 역할이다. 천하의 머리를 찾는다면서 말만 잘 듣는 학생 같은 인재를 모아서는 안 된다. 리더가 가르쳐야 할 사람이 아랫사람인 조직은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스승 같은 사람을 아래에 둬야 한다.

    그는 서양의 리더십 연구를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리더에게 요구하는 것은 △방향(direction) △신뢰(trust) △희망(hope)”이라고 했다.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 조직원의 신뢰를 얻은 후 청사진을 내놓았더라도 정책 능력과 성과가 신통하지 않으면 리더십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구현 △선청 △후사 △회향의 방법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①인재를 찾는 법 : 누구에게 일을 맡길 것인가. 현인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다. 정치는 사람을 얻는데 있다(공자, 爲政在於得人). 현신을 얻으면 성공하고 그러지 못하면 실패한다. 지인지법(知人之法)이 중요한 까닭이다. 사람을 올바로 알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야 적재적소에 맞게 인재를 쓸 수 있다. 첫째, 그 사람의 행동하는 바를 봐라(視·시). 말과 행실을 보라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와 까닭을 살펴라(觀·관). 셋째, 그 사람이 편하게 느끼는 게 무엇인지 살펴라(察·찰). 편안하게 생각하는 게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다. 시(視), 관(觀), 찰(察)을 하면 소인인지, 군자인지 판단할 수 있다. 선한 이가 그를 많이 지지하는지 불선(不善)한 이가 그를 많이 지지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②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는 법 :
    선청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리더는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 한비자(韓非子)가 강조했듯 리더가 먼저 생각을 밖으로 꺼내놓으면 안 된다. 리더가 의욕을 겉으로 나타내면 아랫사람이 자신을 꾸미는 기회로 활용한다. 선호를 나타내지 않는 허정(虛靜)한 마음으로 듣기만 해야 한다. 아랫사람 건의를 믿어주되 동조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다른 아랫사람도 동의한 내용에 따라 의견을 꾸민다. 천하의 지혜를 모으려면 다양한, 상반된 정보를 접해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인재를 잘 찾고(求賢),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는(善聽) 리더는 팀 노력(team effort)을 구축해낼 수 있다. 리더의 소통 능력 외에 중요한 것이 권한의 위임(giving power away)이다. 공치(公治), 협치(協治)해야 팀워크(team work)가 작동한다. 권력은 본래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다. 권한을 위임하기에 믿음직스럽지 않은 인재는 처음부터 함께해서는 안 될 것이다.”



    “時·空의 지평을 넓혀라”

    ③미래를 준비하라 : 역사의 발전은 연속적이고 축적적이다.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중요하다. 내일의 역사까지도 성공시켜야 천하 제1국가, 부민덕국이 될 수 있다. 리더는 차세대 인재를 키워야 한다. 또한 다음 시대에 필요할 과제를 예측해 전략을 짤 때 고려해야 한다. 진정으로 훌륭한 지도자는 ‘천하(天下)에 이익’을 주는 데 끝나지 않고 ‘만고(萬古)에 이익’을 줘야 한다. 한글 창제가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만들고 훗날 성균관이 세워진 것도 후사를 생각한 심계원려(深計遠慮)가 아닐까. 지도자는 시간적·공간적 지평(horizon)이 깊고 넓어야 한다.

    ④공을 타인에게 돌리는 법 : 지도자는 성취에 따른 공과 명예를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된다. 팀의 구성원에게 공과 명예를 돌려야 한다. 또한 오늘이 있게 한 앞선 시기의 리더들 덕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 성과를 나누는 데 참여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반면 실패와 반성에 대한 책임은 리더의 몫이다. 노자는 “공을 이룬 다음에는 공에 머무르지 말라(功成而不居)”고 가르쳤다. 흰 눈이 내리는 밤 역사의 뒤안길로 표표히 떠나야 한다. 떠나는 길에서도 똑바르게 걸어야 한다.

    그는 이론과 실무, 수양과 경세의 간격을 줄여 한국적 경세학, 안민학이 형성되면 “외국의 이론을 수신(受信)만 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이론을 발신(發信)하는 사상적 자주국가, 이론적 독립국가, 성공한 세계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웅비하는 호랑이 꿈꾸자”

    “경세학이 서면 아무나 지도자가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깊은 수양 없이 경세하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사적 욕심은 많으나 공적 준비가 없는 건달 정치인, 건달 공직자가 함부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수양 없는 경세는 역사와 국민을 가볍게 생각하는 짓이다. 안민학을 통해 한국뿐 아니라 이웃나라를 성공국가로 만드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우리의 사상 자본이 세계로 발신할 때 한반도는 변방의 역사를 끝내고 세계 중심 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끝으로 그가 신동아에 기고한 ‘마음껏 펼쳐라, 대한민국의 꿈!’ 제하 칼럼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선진화와 통일을 함께 추구해 한반도 전체를 선진일류국가로 만들면서 나아가 만주와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더 뻗어나가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전체를 경영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그야말로 21세기 아시아 시대에 동북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서야 한다. 그래야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청일전쟁(1894년) 때까지 1200여 년간 중국의 변방속국으로 살아온 치욕의 역사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 통일 한반도가 중국,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북아 3강을 이루는 호혜평등의 ‘신동북아 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선진통일과 신동북아 시대의 큰 꿈을 꿔야 한다. 역사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 시대의 국민이 어떤 꿈을 꾸느냐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다. 나비를 꿈꾸면 나비가 될 것이고 웅비하는 호랑이를 꿈꾸면 반드시 호랑이가 될 것이다.” (신동아 2013년 3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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