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공적자금이 외국자본에 대해 지나치게 저자세였다는 것이 이학장의 지적이다. 외국에 매각한다고 하면 앞뒤 재보지 않고 무작정 공적자금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5분의 1인 17조 원을 쏟아부은 제일은행은 외국자본에게 ‘단돈’ 5000억 원에 팔렸다. 그렇다고 건전한 은행으로 탈바꿈한 것도 아니다. 부실은 부실대로 커졌고, 혈세인 공적자금은 은행 임원과 사외이사의 수억원대 연봉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해놓고도 기업을 수혈해 되살릴 생각을 하기보다는 잔돈푼 챙기는 소비자금융에나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
―IMF 체제로 들어가면서 외국자본의 국내시장 잠식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 아닌가요?
“IMF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요구한 것이 고금리와 긴축정책, 경제개방정책이었습니다. 이건 교과서 같은 정책이긴 해도 우리 경제현실에는 적절하지 않았어요. 우리나라에 자기 돈으로 기업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너나없이 부채율이 높은데, 10%이던 금리가 30%로 뛰어오르니 어떻게 되겠어요. 돈을 빌리려 해도 긴축정책 때문에 빌릴 데가 없었죠. 그 결과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흑자도산 했습니다. IMF 프로그램이란 것은 잠깐 정신잃고 쓰러진 환자에게 링거 주사 놓아서 정신 차리게 하는 건데, 우리 경우는 아예 회복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증권시장, 주식시장, M·A 시장을 다 개방하니 그 아까운 흑자기업들이 고스란히 외국기업들에게 먹혀버린 겁니다. 그때는 주가가 폭락한데다 환율도 높았기 때문에 400억 달러면 우리나라 상장기업 전부를 살 수 있었어요. 외국자본으로선 빨리 들어가서 먹으면 임자였습니다. 외국자본이 증시에서 그렇게 벌어간 돈이 최소 50조 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를 이끄는 주력기업들의 외국인 지분율이 크게 높아졌어요.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이 60%가 넘고, 주택은행 국민은행 같은 우량은행 지분율도 50%가 넘습니다. 포항제철은 공기업이라 외국인 지분율이 30%로 묶여 있었는데, 이걸 풀어주니 금방 40%를 넘어섰어요. 만일 이들이 담합해서 경영권을 위협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더라도 우리 근로자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의 절반이 외국자본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얘깁니다.
경제가 살려면 개방은 불가피하지만, 준비는 해놓고 개방을 했어야지요. IMF 프로그램으로 기업 초토화시키고 주가 폭락시키고 외국자본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먹도록 하는 게 개방정책입니까?”
개혁엔 순서가 있다
이학장은 정부가 초기부터 역점을 둔 재벌개혁에 대해서도 낙제점을 줬다. 사업구조 개혁, 재무구조 개혁, 지배구조 개혁, 투명성 확보 등 재벌개혁의 핵심과제 가운데 제대로 성과를 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재벌을 개혁실적 올리기 위한 대상물로 생각하고 무작정 ‘과감한 개혁’만 외쳤어요. 주먹만 휘두른다고 개혁이 됩니까. 가령 사업구조를 개혁하려면 개혁의 큰 틀을 마련한 다음 법적·제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재벌에 대한 금융지원을 단계적으로 중단해 기업이 구조조정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빅딜을 하라면서 사업부문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라고 일방적으로 지시만 했으니 구조조정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또한 부채율을 200%로 낮춰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고 해놓고 결국은 순환출자를 허용해 도망갈 길을 열어줬어요. 지배구조도 변한 게 없어요. 말만 요란했지, 실질적으로 이뤄진 건 없습니다. 관치 구조조정의 한계지요.”
관치경제는 더 심화됐다. 금융감독위원회라는 무소불위의 기구가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특히 금융기관들은 공적자금 투입을 명목으로 사실상 국유화되다시피 했다. 과거보다 통제하기가 훨씬 쉬워진 것이다. 정부가 강조해 온 시장경제논리를 무색케 하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개혁에 순서가 없었다는 게 이학장의 주장이다. 재벌과 금융 등 민간부문의 개혁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정치개혁, 정부와 공공부문 개혁, 관치금융을 청산하는 등의 관료주의 개혁을 솔선해야 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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