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서울 반포동 강남고속터미널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눈에 익은 경부선 터미널 뒤에 우뚝 솟아있는 고층 빌딩. 몇 년 동안이나 ‘공사중’ 푯말이 붙어있던 호남선 터미널 부지에는 깔끔한 매무새의 초대형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센트럴시티. 신세계 강남점과 JW메리어트호텔, 호남고속터미널 등이 입주해 있는 고품격 복합생활문화공간.
센트럴시티가 들어선 1만8781평 대지는 땅값 비싸다는 강남에서도 ‘금싸라기’에 해당하는 곳이다. 반포천 복개 주차장 1만여 평까지 합친 감정가는 약 6000억 원. 여기에 건물 값어치까지 합산하면 센트럴시티의 자산 규모는 1조800억 원에 이른다.
23년 전, 복부인들조차 외면하던 배추밭 시외버스터미널 부지를 사들여 오늘의 ‘도시(시티)’로 변모시킨 이는 신선호(申善浩·53) (주)센트럴시티 회장이다.
70년대 ‘율산(栗山) 신화’의 주인공. 79년 외국환관리법 위반 및 업무상 횡령 혐의(횡령 부분은 이후 재판에서 무죄 확정)로 구속되면서 ‘재계 신데렐라’에서 ‘실패한 기업인’의 표본으로 급락했던 비운의 청년사업가. ‘한 번 망하면 아주 간다’는 한국의 재계 풍토에서, 그는 꼭 21년만큼의 피와 땀과 투지를 끌어 모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센트럴시티는 율산의 후신(後身)에 다름 아니었다.
신회장이 구속된 것은 79년 4월3일. 그가 지난 9월1일 메리어트 호텔 개관식 자리를 빌어 공식석상에 재등장하기까지는 무려 21년 5개월, 날 수로 따져 8857일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율산의 신선호’ 혹은 ‘신선호의 율산’은 도대체 어떤 세월을 살아낸 걸까.
“나는 자유인이야!”
9월29일 오전 11시 30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신세계 백화점 10층에 있는 (주)센트럴시티 사무실을 찾았다.
“회장님께선 인터뷰를 싫어하십니다. 혹 때가 맞으면 얼굴이나 뵐 수 있을지….”
전화로 이렇게 말해주었던 기획부장은 마침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칸막이 뒤로 저만치 넘겨다 뵈는 한 백발신사의 뒷모습에 자꾸 시선이 갔다. 홍보담당 직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분, 신선호 회장님 맞지요?”
“네, 맞습니다.”
거기 자신감 넘치는 청년실업가 대신 백발 성성한 ‘장년의 신선호’가 서 있었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다가섰다. 임원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던 신회장은, “신동아 기자”라며 인사를 건네자 그 자리에 멈칫 섰다. 마지못해 명함을 받아드는 손길에서 당황스런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난감한 시간이 길어지는 게 싫었던 걸까, 신회장은 인사 한 마디 없이 몸을 돌려 갈 길을 재촉했다. 뒤를 좇는 과정에서 한 임원과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별안간 뒤편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남의 회사에 와서 횡포야?”
“죄송하다”며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신회장은 한 번 더 언성을 높였다.
“나는 자유인이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권리가 있다구!”
신회장과의 조우는 이렇듯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을 맺었다. 잠시 고성이 오갔던 임원과는 곧 오해를 풀었지만, 마음 속에선 몇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신회장을 찾은 것은 지난 20여년 간의 힘겨웠던 재기 과정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언론마저 ‘보기 드문 경우’라며 감탄해 마지않는 ‘율산 부활’이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단 말인가.
또 한 가지. 인터뷰 요청에 대한 신회장과 직원들의 반응이다. 보통의 기업인이라면 ‘성공기’를 취재하러 오겠다는 데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설사 싫다 해도 그토록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원치 않는 취재의 대상이 된 모든 사람들이 “나는 자유인”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성품 탓이라기엔 이립(而立)의 나이에 대그룹을 이끌었던 전력이 무색하고, 세상 탓이라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낯가리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신선호 회장과 재회한 건 10월 6일, 그의 부친인 율산 신형식(申衡植·99세) 옹의 백수연(白壽宴)과 어머니 임옥빈(林玉彬·88) 여사의 미수연(米壽宴)을 겸한 자리에서였다. 센트럴시티 중앙부 ‘센트럴웨딩’에서 열린 연회는 직계손들과 임여사가 집사로 봉직 중인 광주중앙교회 신도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 행사가 파한 뒤 식장 밖 로비에서 신회장을 만났다. “지난번엔 본의 아니게 결례했다”며 한껏 고개를 숙였지만 역시 반응은 묵묵부답. 미소는커녕 말 한 마디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서 ‘기자와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강한 고집이 엿보였다.
신회장은 7남 2녀 중 여섯 번째 아들이다. 장남 은호씨는 하버드대 박사 출신의 물리학자. MIT를 거쳐 마이애미대 교수로 있다. 2남 상호씨는 (주)타임포인트디자인 회장, 3남 동호씨는 버클리대와 피츠버그대에서 각각 생화학과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안과 의사로 활약 중이다. 4남 춘호씨도 마이애미대 화학박사 출신. 같은 대학 교수를 거쳐 미국 소재 화학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5남 명호씨는 행정고시 합격 후 재무부 제2차관보, 주택은행장을 거쳐 현재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로 재직 중. 막내 아들 민호씨는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 장녀 연영씨와 둘째 딸 혜영씨는 미국에서 각기 사업가와 공인회계사로 활약하고 있다.
얼른 훑어보아도 만만치 않은 이력들이다. 어쩌면 누구 하나 모자람 없이 이렇게들 잘 풀렸을까. 그러나 화려하게만 보이는 가족사에도 ‘율산 부도’의 아픈 상처는 여전히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75년 6월17일. 남대문 근처 그랜드빌딩 302호실에 경기고등학교 동문인 엘리트 청년 7명이 모여들었다. 리더는 서울대 응용수학과 출신 신선호(당시 28세). 그는 부친의 호를 빌어 ‘율산실업’이란 작은 무역회사를 차렸다. 자본금 100만 원의 일개 오퍼상에 불과했던 율산은 그 해 말 일약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곧이어 신진알미늄과 금룡해운, 동원건설을 인수하고 76년 4300만 달러, 77년에는 1억6500만 달러 수출에 성공해, 삼성 현대 대우 등 쟁쟁한 재벌그룹들의 뒤를 이어 13번째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그 결과 회사 설립 3년 후인 78년 말에는 자본금 100억 원, 종업원 8000여 명에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그룹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사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78년, 위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그룹 기획실에 근무했던 김모씨는 “78년 말, 벌써 월급이 제대로 안나오기 시작했다. 관리 체계도 허술해져 수출선이 들고나던 부산항에선 ‘율산 돈 못 먹으면 바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승승장구하던 율산이 창업자 구속-부도-공중분해라는 최악의 수순을 밟게 된 연유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진단과 증언이 쏟아져 나와 있다. 간략히 정리하면 ▲단기성 자금을 고정자산에 묶어놓는 등 관리능력 부족 ▲차입 경영으로 몸집 불리기 몰두 ▲주 수출국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마찰이 과장돼 자금 시장 신용도 하락 ▲저돌적이고 독창적인 경영 스타일이 기존 재벌들의 반감을 삼 ▲부동산 경기 냉각으로 인한 소라아파트 분양 차질 등이다.
이에 덧붙여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정치적 외압설. 율산 측에서는 79년 1월25일 발생한 신회장 납치사건이 그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고 주장해 왔다. 괴청년들에 납치됐다 극적으로 탈출한 신회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범인들이 정부 고위 비서실을 사칭하는데다, 도심의 경제기획원 구내에서 만나자고 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것. 이 ‘솔직한’ 답변이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던 김계원(金桂元)씨의 심기를 건드려, 율산과 채권은행단 간에 거의 합의돼 있던 90억 원 규모의 금융지원 방안이 돌연 취소되는 등 그룹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율산 정리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을 여럿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취재 중 만난 옛 율산맨 중에는 아직도 심중에 ‘억울하게 당했다’는 울분을 품고 있는 이가 적지 않았다. “젊고 정직했던 까닭에 정권에 아부할 줄도, 돈 써가며 로비 할 줄도 몰랐다. 그게 죄가 되느냐”는 항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회장이야말로 지난 20여년을 말로 표현할 길 없는 분노와 절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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