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부는 퇴직연금제의 도입 이유를 근로자의 수급권 강화와 안정적인 노후 보장의 두 축으로 설명한다. 사내에 적립해 장부상으로만 기재돼 있던 기존의 퇴직금과 달리, 퇴직연금은 사외 금융기관에 맡겨 놓아 사업장이 도산하더라도 근로자가 떼일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경제활동을 마친 고령자가 노후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퇴직금의 본래 취지를 살린다는 의도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근로자는 이직이나 중간정산을 통해 받은 퇴직금을 생활자금으로 써버리고 만다. 그렇다보니 정작 이 돈이 절실히 필요한 노후에는 기댈 곳이 없어진다. 국민연금이 기본적인 생계를 지탱해준다면 퇴직연금은 생활을 보장받는 방법이 된다. 여기에 개인연금이 포함되면 3층 노후보장 논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현재 퇴직연금은 확정급여형(DB·Defined Benefit)과 확정기여형(DC·Defined Contribution)으로 나뉜다. 사업장별로 한쪽만, 혹은 복수로 도입한 후 근로자가 하나를 선택할 수가 있게끔 돼 있다. DB와 DC는 적립금을 운영하는 주체가 사용자인 사업자냐, 근로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DC형은 사업자의 사외 적립금 외에 근로자가 추가로 적립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DB형은 기업이 매년 말 예상 퇴직금의 60% 이상, DC형은 매년 1회 이상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을 납부하도록 돼 있다. DB형은 기존 퇴직금과 동일하게 사전에 급여가 정해져 있고 DC형은 수익에 따라 결정된다. 상품 설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DB형은 안정, DC형은 수익을 추구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근로자는 퇴직연금 제도에 깜깜
기업의 적립금을 운용하는 퇴직연금 사업자는 현재 은행, 보험, 증권업계에 걸쳐 총 52개에 달한다. 2009년 6월 기준으로 은행이 77만5992명의 가입자를 보유해 선두를 차지하고 있고 생명보험사가 27만여 명으로 2위, 증권사가 20만여 명으로 3위를 달리고 있다. 이 중 은행권이 유치한 적립금은 4조2157억원으로 전체의 51%나 된다. 관련 업계에서는 현 52개 인 퇴직연금 사업자가 너무 많아 어느 정도 정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 간에는 과열이라고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정작 이 제도의 수혜자가 되는 근로자들은 퇴직연금 제도를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DB와 DC가 무언인지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고, 각각 그 안에 원금보장형과 실적배당형 상품이 설계돼 있다는 사실도 복잡하게만 여긴다. 대부분의 가입자들은 예적금, ELS, DLS, 채권 등으로 배분된 상품 가운데 연금사업자가 제시한 안을 막연하게 선택하고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30대 직장인 신씨는 DC형의 퇴직연금 상품에 가입한 상태다. 그러나 자신이 가입한 상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회사의 대출거래가 있는 은행에서 세 가지 상품을 제시했는데, 동료들이 많이 가입한 상품 계약서에 덩달아 서명했다. 재정 관련 부서에서 개인별로 설명해주는 과정이 있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씨는 “퇴직금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담당자가 문제없다고 해서 일단 서명했다”고 말했다.
미가입 사업장에 다니는 근로자들은 퇴직연금 제도에 대해 더욱 캄캄하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한 근로자는 언론을 통해 아는 정도였고, 대기업 계열사의 한 근로자는 퇴직연금이 뭐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에서 2007년 말 서울과 수도권 근로자 7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가입자 가운데서도 퇴직연금 인지 여부에 대한 온도차가 확연히 드러났다. 노후를 아직 먼 미래로 생각하는 20대일수록, 기업 규모가 작거나 임금 소득이 낮을수록 퇴직연금 인지도는 낮았다. 노후와 재테크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어야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근로자들의 관심과 이해 부족은 여러 원인을 내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아직 가입률이 낮아서 피부에 와 닿는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퇴직연금 제도는 ‘퇴직연금규약’을 작성해 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 퇴직연금 제도 시행의 근간이 되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근퇴법)에서는 근로자 대표의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과반수 근로자가 소속된 노동조합이나 근로자협의회,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가 있어야 시행이 가능하다. 일단 제도를 도입한 기업의 근로자는 어떠한 형태로든 설명회를 듣고 동의서를 제출한 후, 나아가 DC형의 경우에는 상품설명까지 받은 것이기에 퇴직연금에 대한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대기업 가운데 퇴직연금의 본격적인 포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기업은 LG전자다. LG전자는 올 3월 DB형을 선택한 후 산업은행, 대한생명, LIG손해보험, 미래에셋증권 등 9개 사업자를 선정했다. 퇴직보험과 신탁 형태로 적립해온 4000억원의 자금을 연말까지 배분하고,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LG전자의 한 직원은 “기존과 같은 일시불 수령 형태도 가능해서 근로자에게는 수급권이나 지급 형태에 차이가 없다고 들었다. 별 부담 없이 동의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이 불화의 씨앗?
대기업의 경우는 LG전자처럼 이미 사외에 퇴직보험과 신탁 형태로 퇴직금을 위한 적립금을 예치해왔다. 2010년까지만 퇴직보험이 인정되고, 이후에는 퇴직연금으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이 자금이 유입되기를 기대하는 실정이다. 6조원이 넘는 퇴직보험을 이미 가지고 있는 보험사들은 그동안의 운용 경험까지 더해, 기존 가입 대기업의 DB형 전환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가입자 수는 DC형이 많지만, 적립금 규모는 DB형이 더 많고 특히 보험권의 DB형 비중이 높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기업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2006년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구조조정 특별위원회는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지표에 ‘퇴직연금제도 정착 노력’을 10점 반영해 110점으로 평가하라고 권고했다. 노사 합의에 따른 자율이 아닌 사실상 강제 도입이라는 점에서 13개 정부투자기관 노동조합위원장이 퇴직연금 가입을 전면 거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정부투자기관의 길은 결국 갈렸다. 한국조폐공사는 ‘공기업 1호 도입’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한국전력공사(한전)는 아직 미가입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