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기·삼성SDI·삼성SDS·삼성코닝. 한해 40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삼성전자에 가려 빛이 약한 듯하지만, 이들도 수조원대 매출규모와 탄탄한 기술력을 자랑하는 거대 기업이다. 끌어주고 밀어주며, 때로는 협력으로, 때로는 경쟁으로 시너지를 창출하는 삼성 전자부품 연합군의 힘.
삼성 이건희 회장(가운데)이 지난 7월 ‘디지털 신제품 전시회’를 찾아 전시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말까지 40조원의 매출과 7조원의 세후 순익을 올려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삼성SDI·삼성전기 3개사의 시가총액은 증권거래소 전체 시가총액의 22%(11월8일 기준)를 차지한다. 올 상반기 국내 510개 상장사들이 올린 순익의 4분의 1에 달한다.
삼성전자에서 언론매체에 자주 오르내리며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메모리 반도체와 휴대전화 등 2∼3개 사업에 불과하다. 그러나 삼성전자에는 비메모리반도체, LCD(액정표시장치), 생활가전 등 다양한 사업부가 있고, 사장도 10명이나 된다.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코닝, 삼성SDS 등은 브라운관, 콘덴서 등 각종 전자부품 생산과 서비스를 담당한다. 이들은 삼성전자의 그늘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각자 연 1조∼6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만만찮은 기업들이다. 삼성전자의 화려한 오늘도 이들 ‘연합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연말 평가를 앞두고 요즘 삼성 전자부품 계열사 사장들은 비상이 걸렸다. 이건희 회장이 핵심 인재 확보 실적을 사장 평가에 반영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사장들은 최근 해외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줄이어 출장을 다녀왔다. 올 들어 이건희 회장의 관심은 온통 핵심 인재 확보와 차세대 핵심 사업 발굴에 쏠렸다. 내년 초에 발표될 사장단 인사에서도 이 두 가지가 주요 기준이 될 게 확실하다. 그러다보니 서로간에 누가 핵심 인재 확보 목표치에 근접했는지, 회장이 납득할 만한 차세대 사업을 발굴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다.
경쟁사인가, 협력사인가
경영실적에 따라 이익배분(PS·Profit Share)이 달라지는 것도 사장들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다. 어차피 매출과 이익, 성장률은 회사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브랜드 파워와 조립으로 먹고 사는 완제품 회사와 1원, 2원짜리 부품 수십억개를 팔아야 하는 회사는 그 기반부터 다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연봉의 최고 50%를 더 받는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는 임직원들의 사기가 달라진다. 벌써부터 계열사 임직원들은 올해는 어느 회사, 어느 사업부가 PS를 가장 많이 받을 거라는 둥 말들이 무성하다. 얼핏 보면 삼성이라는 큰 우산 아래 함께 들어가 있는 계열사들이지만, 그 안에서는 이처럼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전자업계에서는 디지털 TV 수요가 늘고 40인치급 대형 LCD가 개발되면서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TV와 초박막 트랜지스터 액정화면(TFT-LCD) TV가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 PDP TV는 40∼60인치급 대형 TV에 유리한 반면, LCD TV는 얇고 해상도가 높지만 20인치를 넘으면 가격이 급등한다.
삼성 울타리 안에서도 PDP와 LCD가 혈전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LCD)와 삼성SDI(PDP)의 경쟁이 그것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큰 46인치 TFT-LCD를 개발했고, 삼성SDI는 두께 46mm(42인치의 경우)인 초박형 PDP를 개발했다. 삼성전자는 “TV는 물론 모니터나 노트북용으로 돌릴 수 있어 LCD가 원가절감에 훨씬 유리하다”고 주장하고, 삼성SDI는 “원가절감을 가속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쪽은 PDP”라고 반박한다.
삼성전자 안에서도 휴대전화 사업부와 컴퓨터시스템 사업부가 차세대 모바일 기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들 분야의 경쟁 역시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래 사업을 향한 세계 전자업계의 라이벌전이 그대로 축소되어 삼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삼성이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종합 전자계열 군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전자부품 업체 간엔 서로 좋은 사업을 차지하려는 경쟁도 뜨겁다. 세계적인 디스플레이 업체인 삼성SDI 임직원들은 1999년 TFT-LCD 사업을 삼성전자에 넘겨준 뒤 상실감에 젖었다. 당시 삼성그룹은 TFT-LCD 사업이 생산라인 하나를 설치하는 데 1조원 이상 투자해야 하는 대규모 장치산업이고, 제조공정도 반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삼성SDI의 TFT-LCD 사업을 삼성전자로 이전했다.
삼성SDI는 브라운관과 보급형 LCD(STN-LCD), PDP,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불리는 유기발광소자(유기EL)와전계방출소자(FED)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디스플레이 전문기업. 브라운관 생산부문에서 세계 일류지만 새로운 사업 품목을 삼성전자에 넘겨주고 속앓이를 하던 삼성SDI는 이내 미련을 버렸다. 대신 2차전지와 PDP, 유기EL, FED 등 미래 유망 사업들을 발굴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 삼성전기 강호문 사장/ 삼성SDI 김순택 사장(왼쪽부터).
“삼성전자 실무자들은 형제 같은 계열사라고 납품가격이나 협상조건에 어드밴티지를 주는 법이 없다. 오히려 일본 등 경쟁 부품업체에서 납품받는 가격보다 5∼15% 싸게 납품하라고 요구한다. 일본에 수출하면 관세, 운임 등 각종 비용이 들어가지만, 국내에 납품할 때는 그런 게 필요 없으니 공장도가격에 납품하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품질을 잘 봐주는 것도 아니다. 값은 싸게 달라면서 품질은 경쟁사의 것과 같거나 그 이상을 요구한다.”
계열 부품회사들은 “가까운 데서 언제라도 손쉽게 공급받을 수 있어 재고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비스도 수시로 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일본 제품보다 값을 더 받아야 한다”고 승강이를 벌인다.
삼성전자가 삼성내 전자부품 계열사로부터 납품받는 부품 비율은 55%에 불과하다. 계열사들을 국내외 다른 부품회사들과 동일한 조건에 경쟁시켜 가장 싼 가격에 좋은 품질을 보장하는 업체의 제품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전자부품 계열사들도 관계사에 납품하는 비율이 40∼50% 수준이다. 이들은 삼성 관계사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전자업체를 대상으로 영업한다.
삼성이 일본의 종합전자회사들을 본 따 완제품에서 각종 부품에 이르는 사업들을 수직 계열화하고도 일본 회사들처럼 동반 침체에 빠지지 않은 비결을 여기에서 찾는 이가 많다. 계열사 제품이라고 엄격한 기준 없이 써주면 경쟁력 제고를 기대할 수 없다. ‘근친상간’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것이다.
삼성처럼 핵심 부품 파트를 한 회사내 사업부로 묶어두지 않고 별도의 회사로 독립시킨 경우는 일본의 마쓰시타 그룹 정도 외에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에서 배우자
삼성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1980년대 초반에는 우리도 삼성전자, 삼성전관, 삼성전기 등의 계열사 통합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통합을 하면 CEO를 비롯한 임직원의 수를 줄일 수 있고, 간접 부문이나 노사정책 등도 효율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검토 끝에 독립 사업체로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합병하면 주력사업에만 치중하느라 다른 부문의 발전이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합병을 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전자부품 시장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규모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많다는 것. 지금 당장의 삼성전자 효율성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시장을 더 멀리 내다보자는 수(手)였다.
부품산업의 중요성은 이건희 회장이 늘 강조해온 것이다. 이회장은 “세트의 경쟁력은 핵심 부품의 경쟁력에 좌우된다” “부품사들은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기반을 갖추라”고 했다. “한국 경제가 튼튼해지려면 설비, 기계 등 자본재와 부품산업이 발전해야 한다”며 정부에 지원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국은 현재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지만 반도체 장비와 핵심 부품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다. 일본이 극심한 경제침체를 겪으면서도 국민소득 수준은 여전히 세계 2위를 유지하는 것도 자본재와 부품산업 경쟁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회장은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40%가 넘는 품목들을 우리가 좀 뺏어오자”며 사장들을 독려한다. 삼성에는 메모리 반도체와 LCD 등 한때 일본이 지배하던 시장을 파고들어간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 삼성의 전자부품 관계사들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장기 마스터플랜과 단기 계획을 속속 내놓고 있다.
삼성SDI는 컬러 브라운관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디스플레이, 신에너지, 신소재 사업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삼성전기는 현재 32가지, 2만여 종의 전자부품을 생산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광픽업, 첨단 콘덴서인 MLCC, 차세대 인쇄회로기판 MLB 등 세계 1위가 될 수 있는 전략 품목 9개를 선정해 집중 육성하기로 했다.
삼성코닝은 디스플레이 유리 중심의 기업에서 차세대 반도체용 연마재, TFT-LCD용 평판형 백라이트 등 디지털 정보소재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IT서비스 업체인 삼성SDS도 2010년까지 해외 매출 비중을 60%로 확대할 계획이다.
전자제품의 경쟁력은 핵심 부품에 달려 있다. 삼성은 전자산업에 뛰어들 때부터 핵심 부품 위주로 수직 계열화를 이뤘다.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가 처음 도전한 것은 ‘품질 좋은 TV’였다 . 그래서 TV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들을 중심으로 ‘브라운관 유리를 만드는 삼성코닝→이 유리로 브라운관을 만드는 삼성전관(지금의 삼성SDI)→브라운관과 완제품 TV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을 만드는 삼성전기→이들을 조립해 TV를 만드는 삼성전자’ 식으로 수직계열화한 것이다.
처음엔 기술이 모자라 일본의 산요와 NEC, 미국의 코닝 등 선진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만들었다. 훗날 삼성산요전기가 삼성전기로, 삼성NEC가 삼성전관으로 독립했으며, 삼성코닝은 지금도 합작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경영은 삼성에서 하고 있다.
삼성은 ‘모래에서 TV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완벽한 연계를 통해 경쟁력 있는 TV를 만들려 했다. 삼성은 결코 단순 조립에 그쳐선 안되고, 핵심 부품을 함께 개발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몇차례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1980년대에 삼성전자가 만든 TV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일본의 부품업체가, TV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품인 ‘칩 저항’의 공급량을 제한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핵심 부품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복합되고, 휴대전화에 카메라와 녹음기가 붙고, 가전제품에 인터넷이 융합되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가 열리고 있다. 새롭고 차별적인 기능을 가진 전자제품을 만들려면 반도체를 비롯한 각종 부품이 변해야 한다.
불과 몇 년 전 e-비즈니스가 기업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황금의 손처럼 여겨졌을 때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업계 ‘빅3’는 경영 효율화를 위해 인터넷에 부품 공동구매 사이트를 만들었다.
‘코비신트(Covisint)’라는 이 사이버마켓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지만 이내 한계에 봉착했다. 다른 회사가 모르는 나만의 기술, 나만의 부품을 만들어야 상품을 차별화할 수 있기 때문에 부품 공동구매는 매력을 잃었던 것이다.
요즘 삼성전자에는 전략적 제휴를 하려는 세계 일류 기업들이 줄을 서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IBM, 휴렛팩커드, 소니, 도시바 등 유수 기업들이 삼성과 제휴하려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삼성에 오면 ‘토털 솔루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기술과 제품이 융합되는 추세에서 이들에 관한 기술과 시장을 모두 가진 회사가 어깨에 힘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는 홈네트워크와 관련된 세계 표준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여러 기업과 제휴를 모색하고 있지만, 이왕이면 가전제품과 반도체칩 등을 직접 만드는 삼성과 제휴하는 편이 유리하게 마련이다.
3원화 연구·개발체제
최근 삼성은 ‘삼성 펠로우’ 제도를 도입했다. 세계 일류 기술을 갖고 삼성을 대표할 수 있는 기술자들을 ‘삼성 펠로우’로 선정해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인텔, IBM, HP 등도 이와 유사한 제도를 시행, 자사의 기술수준이 세계 최고임을 과시한다. 삼성 펠로우로 선정되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연구팀을 구성해 회사의 지시가 아닌 독자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다.
삼성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세계적인 기술선도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선언이다. 선진업체들로부터 2류 기술을 전수받아 그저 좀 개선된 제품을 내놓거나 저가 공세로 시장을 파고드는 게 아니라 최첨단 제품을 개발해 세계 정상의 기업들과 정면 승부를 펴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황창규 사장은 최근 90나노미터 공정을 통한 2기가 플래시메모리 개발을 발표하면서 “삼성전자가 창조(創造)의 길로 접어들었다”며 감회에 젖었다. 기존 제품의 기능이나 공정(工程)을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기술과 제품으로 시장을 창출하는 선도적 기능을 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입문한 지 30여 년 만의 일이다.
삼성의 기술개발을 담당하는 R&D 조직은 3원화 체제로 구성돼 있다. 종합기술원, 각 전자계열사 연구소, 각 회사의 사업부 개발실 등이 그것이다.
종합기술원이 미래 사업을 대비하기 위해 원천특허 확보에 주력한다면, 전자 계열사 연구소들은 신제품 개발, 핵심 애로 기술 개발 등을 주임무로 삼는다. 각사 사업부 개발실은 제품 개선, 공정 혁신 등에 집중한다. 미래 원천기술에서 상용화단계 기술까지 체계적인 연구 시스템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들은 그룹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 노릇을 하는 종합기술원을 주축으로 활발히 교류하면서 제품을 공동 연구·개발하고, 기술 로드맵(Roadmap)을 통한 미래 사업 전략과 기술개발 전략을 공유한다.
삼성종합기술원 손욱 원장은 “기술개발 과정은 합리적이라야 한다. 앞으로 시장이 무엇을 요구할 것이며(Market Roadmap), 이에 따라 어떤 제품이 각광을 받을 것인가(Product Roadmap), 이런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Technology Roadmap)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삼성SDS 김종기 사장/ 삼성코닝 송용로 사장/ 삼성종합기술원 손욱 원장.(왼쪽부터)
때마침 기술들이 융합하고 있다. 가전제품과 디지털이,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나노테크놀로지(NT)와 정보기술(IT)이, 정보기술과 바이오기술(BT)이 융합하고 있다. 삼성의 다양한 제품 기술과 다층적 연구소들이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룹, 그 딜레마와 시너지
삼성의 전자부품 계열사들은 ‘긴밀한 상호 협력’과 ‘독자적인 세계 일류화’라는 모순된 과제를 끌어안고 있다. 이들은 삼성전자의 완제품을 잘 만들기 위한 수직 계열사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 일류 기업이 돼야 한다. 관계사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글로벌 기업들에도 제품을 공급하며 세계시장에서 홀로서야 한다.
이들 계열사에 그룹이라는 우산은 종종 영업에 걸림돌이 된다. 한 부품회사 실무자는 “삼성전자 계열사라는 이유로 부품 납품과정에 불이익을 당할 때가 더러 있다”고 털어놨다.
새로운 전자제품을 개발하는 완제품 회사는 개발단계부터 부품회사에 이러저러한 부품을 만들어 달라며 서로 머리를 맞댄다. 그런데 경쟁이 치열한 전자업계에서 ‘선수’들은 어떤 부품을 납품하는지를 알면 대번에 완제품의 컨셉트를 눈치챈다. 그러니 삼성전자와 경쟁관계인 국내·외 전자 완제품 회사들이 삼성의 전자부품 계열사에 신제품 부품 납품을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요즘 기업들은 계약 비공개 협정(NDA·Non-Discloser Agreement)을 맺어 어느 완제품 회사와 어느 부품회사가 계약했다는 사실 자체를 밝히지 않도록 명문화하고 있다. 기술수준이 높고 기업 정보에도 밝기 때문에 어느 회사와 어느 회사가 계약을 했다는 것만 드러나도 무슨 제품을 개발하려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
삼성의 전자 계열사들은 “삼성전자와 우리는 별개의 회사다. 하루 이틀 장사하고 말 것도 아니니 절대로 고객 정보를 삼성전자에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경계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범용 기술의 제품을 싸고 품질 좋게 만들어 공급하든지, 아무리 싫어도 자사가 아니면 공급받을 데가 없는 핵심 부품 기술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그룹으로 묶여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룹에 속해 유리한 점도 있다. 부품회사들로선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을 때 멀리 돌아다닐 것 없이 삼성 안에서 안정적인 공급처를 찾을 수 있어 좋다. 별도의 마케팅이나 영업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그만큼 절약할 수 있다. 아예 제품개발 단계에서부터 삼성전자나 종합기술원과 보조를 맞추기도 한다.
삼성종합기술원이 그룹 기술최고책임자라면 소프트웨어업체인 삼성SDS는 그룹 최고지식최고책임자(CIO)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뛰는 것은 물론, 그룹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도 한다. 삼성SDS는 그룹 및 계열사 정보화를 추진하고 삼성의 IT 인프라 수준을 끌어올리는 책임을 맡고 있다. 그 과실을 계열사들이 따먹는 셈이다.
종합기술원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전자 관계사 핵심 사업의 기술력을 높이는 것이다. 가령 삼성전자와 함께 차세대 반도체나 MPEG4를 개발하고, 삼성SDI와 유기EL이나 FED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식이다. 아울러 소음과 진동을 줄이는 기술 등 모든 전자제품 공정에 필요한 기초 기술을 개발해 삼성전기 등 관계사들에 보급한다. 자산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삼성SDI나 삼성전기가 그룹에 속하지 않은 독자 회사였다면 막대한 기술개발 비용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경영혁신 측면에서도 그룹의 덕을 톡톡히 본다. 삼성은 오래 전부터 세계적인 경영혁신 프로그램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 모두가 효과적으로 적용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시도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1970년대의 품질관리(QC), 1980년대의 산업혁신(IE)과 가치혁신(VE), 1990년대 미국의 리컨스트럭처링, 리엔지니어링, 전사적 자원관리(ERP) 등 첨단 혁신 기법이라면 앞장서 받아들였다.
삼성전자는 1994년 ERP 시스템을 도입했다. 초기엔 돈도 많이 들고 고생도 컸지만, 경험이 축적되면서 훈련된 인력이 양성됐다. 이들은 다른 계열사에 훈련된 전문가를 파견하거나 임직원 교육을 위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면서 경영혁신을 확산시킨다.
요즘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6시그마 경영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다. 6시그마는 공장의 불량률을 100만개당 2∼3개꼴로 줄이는 생산공정 혁신기법. 모토로라에서 시작됐지만 꽃피운 곳은 제너럴일렉트릭(GE)이다. 삼성전자·삼성SDI·삼성전기는 1997년에 6시그마를 도입했다. 그중 삼성SDI에서 가장 성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삼성SDI의 경험이 관계사들로 전파되고 있다.
삼성SDI 김순택 사장이 말하는 성공 비결은 톱다운(Top-down)방식. 6시그마는 톱다운이나 버텀업(Bottom-up) 두 가지 방법으로 추진할 수 있는데, GE가 성공한 방식이 톱다운이다. 어떤 경영혁신이든 그 회사의 기업문화와 잘 어우러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GE의 톱다운 방식은 삼성의 기업문화와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급 인력의 교류가 활발한 것도 계열사들에 큰 힘이 된다. 삼성전기 강호문 사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분야에서 오래 근무했다. 그는 올들어 삼성전기 경영을 맡으면서 사업 구조조정과 차세대 핵심 사업 발굴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삼성전자가 1996년 일찌감치 구조조정에 착수한 덕분에 세계 톱 기업들이 적자에 허덕이는 지금도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음을 잘 보아온 터다. 강사장은 “삼성전자에 있다가 삼성전기에 와보니 버려야 할 것과 새로 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이더라”고 한다.
삼성 전자부품 군단의 그랜드 디자인은 구조조정본부가 챙긴다. 삼성은 어느 그룹보다 막강한 구조조정본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여러 대기업에서 비서실을 대신해온 구조조정본부의 기능과 임무에 대해서는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삼성 계열사들이 높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과시하면서 도약하고 있는 현실은 이런 논란에 일단 쐐기를 박는다. 기업인 이상 실적 앞에서는 어떤 시비도 설득력을 잃는 것이다.
이학수 사장이 이끄는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한 회사, 한 업종의 관점이 아니라 전체적인 관점에서 정보를 수집, 제공하고 조언하는 일이다. 재무팀 인사팀 기획팀 홍보팀 등 구조조정본부에 있는 100여 명의 전문가들은 각 계열사의 국내외 지사에서 들어오는 최첨단 정보와 삼성경제연구소 전문가들의 분석을 취합해 밑그림을 그린다.
게다가 각 계열사에 대한 경영진단도 실시한다. 단기 경영실적은 어떻고 장기 미래 대책은 어떠하며, 재무구조나 인력구조에 문제점은 없는지 살핀다.
구조본은 이밖에도 재무구조 가이드라인을 통해 견실화를 유도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비(非)핵심사업을 정리하게 하며, 계열사간 중복사업을 조정하고, 글로벌 인적 자원 확보 및 양성방안을 제시하는 등 개별 회사 단위에서는 추진하기 어려운 일들을 지원한다.
그러나 각 회사에 이사회와 주주총회 기능이 강화되고 외국인 주주가 늘어나면서 그룹 회의에서 회사 현안을 시시콜콜 논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기능별 소모임이 늘어났다. 전자 관계사 사장단도 분기마다 모여 현안과 협조방안 등을 논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