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땅장사’ 기질 있으면 절반은 성공, 길목 지키면서 ‘이야기’ 만들라

  • 허 헌 자유기고가 parkers49@hanmail.net

    입력2005-01-25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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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목을 지키면 유통업은 ‘백전백승’이다. 길목이 꽉 차면 새로운 길목을 만들면 된다.
    • 그것도 힘들면 ‘이야기’를 만들어라. 물건에 담긴 의미와 물건을 팔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 소비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면 그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땅장사’ 기질 있으면 절반은 성공, 길목 지키면서 ‘이야기’ 만들라
    “‘만드는 ’사람보다 ‘만나는’ 사람의 힘이 더 강해졌다.”

    과거 제조업체의 힘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유통업체가 오히려 제조업체를 쥐락펴락하는 것을 두고 유통업계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소비자를 ‘만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유통업체의 구매력(buying power)이 커져 제조업체에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거나 디자인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소비자의 기호를 파악해 물건을 대량으로 주문하는 힘이 제조업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유통업체가 제조업체보다 한 발짝 앞서 소비자의 기호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조업체를 설득하려면 유동인구가 많은, 소비자들이 빈번히 드나드는 목 좋은 곳을 찾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신세계 구학서 사장은 “유통은 부동산업”이라고 정의한다. 구 사장은 좋은 길목을 찾아 유통업체를 세우면 80%는 이미 성공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신세계 이마트는 환란 이후 헐값에 나온 땅을 대거 사들여 할인점 업계의 맹주가 됐다.

    그런가 하면 패션에 예술을 접목시켜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쌈지 천호균 사장은 “차라리 길목을 창조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좋은 길목은 이미 안목이 높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방법은 길목을 ‘창조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경쟁자들이 좋은 장소를 선점한 상황에서 신규 진출자들은 막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 사장은 주문한다. “길목에 연연하지 말고 ‘이야기’를 만들라”고.

    물건을 팔고 싶은 사람은 물건에 담긴 의미와 물건을 팔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갖고 고객들과 만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유통업은 ‘만남’이다.

    35년 동안 문구제품을 판매해온 알파유통(주) 이동재 회장은 유통업을 ‘나눔’이라고 정의한다. 거창하게 공생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눌 때 사람은 감동하게 마련이며 있고, 이들이 이름 없는 홍보맨이 되어 업체는 날로 발전한다는 의미다. 식탁 위의 간장처럼, 작지만 나누면 맛좋은 음식으로 되돌아온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이 회장은 나눔 경영을 실천하는 ‘작은 거인’이다.

    국내 최대의 할인점을 일군 경영자, 뒷골목에서 손님을 만나 거대한 패션그룹을 탄생시킨 CEO, 30년이 넘도록 문구 한 분야의 유통에만 전념한 회장님, 이들에게서 유통업의 미래를 들어보자.

    미국 유통업체 월마트는 매출액 규모로 따지면 세계 1위다. 세계 최대의 전자업체 제너럴 일렉트릭(GE)보다 크다. 유통업체의 매출액이 제조업체보다 많다는 것은 한국인의 눈엔 좀 이상하게 보인다.

    한국으로 치면 이마트가 삼성전자의 매출을 능가했다는 얘긴데,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상하기 어렵다. 2003년 매출총액은 삼성전자가 64조원이고, 이마트는 5조1000억원이다. 지난해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이마트는 7조원대의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삼성전자와 비교하면 아직도 10분의 1 수준이다.

    그러나 이마트를 국내 최대의 할인점으로 키운 구학서 신세계 사장의 눈엔 이마트가 삼성전자를 추월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구 사장은 지난해 ‘뉴스위크’ 한국판과의 인터뷰에서 “유통업은 경쟁업체들이 쉽게 모방할 수 있고, 로열티를 보호받기도 힘들어 삼성전자처럼 이익을 많이 내기란 쉽지 않다”고 하면서도 “조만간 이마트가 외형적으로 삼성전자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구 사장은 “제조업만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라고 지적하면서 유통업도 제조업 못지않게 한국경제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엔 일리가 있다. 실제로 할인점업계는 연간 총 20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세금으로 2조원을 낸다. 한국에서 이만한 산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구 사장은 지난 2003년 유통업계 대표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유통업계에서 할인점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다.

    유통업계에서 할인점을 빼놓으면 사실 할말이 별로 없다. 백화점의 매출을 추월한 지는 이미 오래고, 전체 유통시장에서 할인점의 영향력은 해마다 커지고 있다. 지난해 카드업계가 수수료를 올리기 위해 가장 먼저 시비를 건 곳도 할인점이다. 할인점을 꺾을 수 있다면 그밖의 유통업체는 쉽게 설득할 수 있다는 속셈에서였다. 실제로 유통업계가 조금 버티는 듯하다가 카드업계와 수수료 문제를 매듭짓자 백화점 홈쇼핑 영화관 등이 줄줄이 카드업계의 의도대로 수수료를 올렸다.

    할인점을 이용하는 고객도 증가일로다. 예를 들어 이마트를 다녀가는 소비자는 연간 2억5000만명이나 된다. 이마트에서 경기 불황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힘들다. 지난해 국내 경기가 극심한 내수 침체로 바닥을 기고 업체 도산이 속출할 때도 이마트의 매출은 지칠 줄 모르고 올랐다.

    그뿐인가. 할인점 점포 수가 늘어날수록 물가는 떨어진다. 생산자와 유통업자가 직접 거래하면서 상품 가격이 낮아진 덕분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도 “할인점의 유통구조 단순화로 소비자 가격이 하락하면서 물가가 하락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한 예로 이마트가 제주도에 처음 입점할 때 현지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이마트가 제주도 물가를 20%나 낮춰 지역 소매상들의 손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호점을 낼 때는 오히려 제주시가 적극적으로 유치에 나섰다. 이마트의 존재가 소비자뿐 아니라 지역 농가에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제주도민들이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마트는 제주도 명물인 흑돼지와 귤, 그리고 무를 전국에 판매하고 있다. 이처럼 할인점은 한국 경제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며 생산성 증대를 이끄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통업은 ‘부동산업’

    그렇다면 구학서 사장이 말하는 할인점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구 사장은 할인점이든 백화점이든 유통업의 본질은 부동산업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먼저 유동 인구가 많은 길목에 점포를 세우느냐에 유통업 성공의 열쇠가 달려 있다는 얘기다. 입점 장소만 잘 선택하면 이미 80%는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마트는 1997년 계열사이던 프라이스클럽을 1억달러에 매각하고, 이마트용 부지 20여곳을 매입했다. 환란 직후 땅값이 떨어졌을 때 부지를 구입해 결국 할인점 운영비를 낮춰 뒤늦게 출발한 할인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판매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남들보다 먼저 좋은 목을 찾는 것이 유통업의 성공요인임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을 실천하고 성공하기는 매우 어렵다.

    전국 70여개 이마트 중 매출 부문에서 전국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서울 은평점의 경우를 보자. 당초 이 지역은 백화점이 들어설 부지였지만 환란 직후 시행업체가 부도가 나서 이마트가 매입해둔 곳이다. 그러나 막상 매입해놓고 보니 주위에 백화점은 물론 대형 할인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아파트와 주택만 빽빽하게 늘어선 지역이었던 것. 이런 곳에 대형 할인점이 들어섰으니 얼마나 영업이 잘 됐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마트가 먼저 진출해 터를 잡아놓았으니 다른 할인점이 들어서도 장사가 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우선 이마트가 들어서면서 주변 땅값이 오른다. 그러면 할인점이 들어설 대형 부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설령 있다고 해도 먼저 진출한 이마트보다 비싼 가격에 땅을 매입해야 한다. 따라서 영업 초기부터 비용이 많이 들어가 이익이 줄고, 그러다 보면 경쟁업체보다 투자 여력이 줄어들어 경쟁력이 떨어진다. 누가 먼저 ‘명당’을 찾느냐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 사장은 직원들에게 “내가 한국에서 땅을 가장 많이 산 부동산업자”라고 말한다. 땅을 보는 데는 구 사장의 안목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 회사 안팎의 평가다. 실제로 그가 눈여겨봐둔 곳은 어김없이 할인점이 들어섰고, 가는 곳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자본회전율’이 가장 중요

    길목에 따라 어떤 업종을 진출시킬 것인가도 중요하다. 백화점을 지을 것인지 할인점을 지을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으로 구 사장은 ‘자본회전율’을 든다. 자본회전율은 투자한 자본과 비교해 얼마나 높은 매출을 올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 예를 들어 100원을 투자해 연간 200원의 매출을 올리면 자본회전율은 2가 된다.

    경기도 산본에 부지를 매입한 구 사장은 원래 이 자리에 백화점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결국에는 할인점을 지었다. 계산해보니 백화점을 짓는 데는 1600억원이 들어가고, 매출은 연간 1600억원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할인점은 600억원이면 짓는 데다 연 매출은 1800억원으로 예상됐다. 이렇게 되면 백화점의 자본회전율은 1이지만, 할인점은 3이 된다. 백화점을 지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땅장사’ 기질 있으면 절반은 성공, 길목 지키면서 ‘이야기’ 만들라

    유통업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통업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만나게 해주는 사람’이다.

    ‘좋은 부지’는 매출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마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백화점을 제치고 유통업계의 새로운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을 다니며 좋은 상품을 찾아내고, 이 같은 노력을 통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상품을 대거 등장시킨 덕분이다.

    이마트는 생산자와 직접 거래하면서 판매 가격을 대폭 낮추었고, 자체 브랜드 상품을 개발해 다른 유통업체와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백화점이 입지에 집착한 반면 이마트는 중소기업과 손잡고 다양하고 값싼 상품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능력을 갖춘 것이다. 소비자들이 할인점을 선호하게 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할인점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가죽패션업체를 운영하는 쌈지 천호균 사장은 유통을 ‘만남’이라고 정의한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유통이라는 것이다.

    천 사장은 1984년 사업을 시작, 1992년 쌈지라는 브랜드를 창조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디자인으로 각종 디자인상을 수상한 바 있고, 특히 ‘거지백’으로 알려진 그의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과거 사각으로 정형화된 디자인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다양한 느낌을 주는 백을 내놓은 것이 의외로 고객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데 주효한 것이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통이라는 천 사장의 논리는 쉬운 듯하지만 유통업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정의에는 유동인구가 많은 길목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유통업 본래의 개념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말에선 후미진 골목에서 장사를 하더라도 고객이 찾아오게 만드는 ‘무엇’을 갖춰놓고 기다리겠다는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패션업계에선 이런 가게를 진짜 가게라고 여긴다. 실제 그가 들려준 패션업체 오브제 사장의 경험담이다.

    ‘패션 스토커를 노려라’

    “그가 크게 성공하기 전, 서울 압구정동 뒷골목에 옷가게를 하나 냈다고 합니다. 가게를 찾아가기도 어려울 뿐더러 한창 유행하는 옷을 파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부터 많이 팔릴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대요. 그런데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문을 연 첫날 만들어 내놓은 제품이 모두 팔렸답니다. 패션업계에는 새롭고 강렬한 옷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늘 있어요. 좋은 옷을 보면 참지 못하는 ‘스토커’라고나 할까요. 이들이 오브제 사장의 가게에 와서 기대 이상의 환상적인 옷을 발견하자, 본인이 직접 옷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주위에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이런 입소문을 듣고 또 다른 마니아들이 찾아온 덕분에 이 가게의 옷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좋은 길목은 때론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죠.”

    장사에서 길목이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사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좋은 길목은 이미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신세계처럼 대규모 자금으로 대형 할인점을 세워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길목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 사장은 ‘유통은 길목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목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천 사장은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을까. 그는 서울 인사동에 ‘쌈지길’이란 유통가(街)를 창조했다. 이 길은 그가 패션사업에 접목시킨 ‘아트’를 길거리에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거리다.

    간판 대신 그림을

    인사동에 쌈지길을 구상하던 시절, 그는 무엇보다도 인사동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물건을 유통시키기 전, 길거리의 특성을 알아야 길목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인사동에 들러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인사동에 오는 사람들은 무엇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을 구경하고 싶어서, 혹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그곳에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만남’이 있는 곳, 즉 쌈지길이란 개념을 창조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천 사장은 어떻게 하면 쌈지의 정신도 알리고 사람도 많이 찾아오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했다.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는 길거리에 그림을 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친분이 있는 화가에게 부탁한 그림이었다.

    그 후로 화려한 간판이나 알록달록한 로고를 만드는 대신 담백하지만 창의적 정신이 담겨 있는 그림을 매장에 걸어놓았더니 고객들이 그 앞에 몰려들어 디지털카메라나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천 사장은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짜릿한 승리감에 온몸이 떨려왔다”고 말했다. 그가 구상한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객들이 알아주었을 때, 그래서 말은 안 했지만 서로의 느낌이 짜릿하게 통했을 때 ‘기적의 순간, 진실의 순간’을 맛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유통업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으로, 경영자는 ‘소비자와 이심전심이 되도록 제품을 끊임없이 보완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만나게 하는 사람’(유통업자)은 소비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길목을 초월한 장사를 할 수 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곳, 그곳이 천 사장에겐 인사동이었다.

    천 사장은 어릴 적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대문 신발가게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이 무엇을 살지 알아맞히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탐정’이었다. 천 사장은 당시에도 상당한 적중률을 보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어려서부터 소비자 심리 예측 훈련을 한 셈이다.

    그런 그가 만드는 사람(제조업자)에서 만나게 하는 사람(유통업자)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긴 이유는 소비자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다. 그가 생각하는 패션 명품업체의 특징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패션업체의 어떤 직원보다 재봉사들이 소비자들의 심리와 욕구를 잘 파악하고 있다면 그 회사가 바로 명품회사라는 것이다. 최고경영자나 마케팅 담당 임원이 아니라 재봉사가 소비자의 감각에 가장 충실한 회사, 이런 회사가 오랫동안 명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회사인 것이다.

    천 사장은 “우리 사회에 다양성과 창의성을 자극하는 패션회사가 많이 생기려면 백화점의 힘이 약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고급제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의 힘이 셀수록 이들의 눈에 들지 않는 업체는 고객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는 얘기다. 다양한 길거리 전문점이 등장하고, 실험적인 유통업체들이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낼수록 개성 있는 제품이 많이 나온다고 천 사장은 믿는다.

    알파의 ‘수돗물 경영’

    천 사장이 유통을 ‘만남’이라고 생각한다면 알파유통(주) 이동재 회장은 유통업의 본질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알파는 1971년부터 문구유통을 시작한 업체로 지금은 사무기기, 문구류, 미술·화방용품, 설계·제도용품 등을 종합 판매하는 생활문구 유통그룹으로 발전했다.

    이 회장은 1971년 조그마한 문구점을 시작으로 오늘의 알파그룹을 일궈온 경영자다. 현재 알파에서 판매하는 제품의 종류만도 1만5000가지. 사무기기나 문구류 판매 분야에서 단연 독보적인 업체이다 보니 한국의 장래 경기를 예측하려면 알파에 가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알파에서 사무기기가 많이 팔린다는 것은 곧 창업하는 회사가 늘고 기업들도 신규직원을 많이 채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알파의 사무기기 판매는 5% 이상 줄어들었다.

    특정 분야에서 종합 유통을 지향하는 업체를 ‘카테고리 킬러(category killer)’라고 부른다. 해당 분야에서는 없는 것이 없는, 다양한 제품을 판매한다는 뜻에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전자제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하이마트나 문구유통업체 알파는 한국에서 대표적인 카테고리 킬러다.

    특히 알파는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유형의 업체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회사다. 외국에선 대개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에서 문구제품이 판매되며, 알파처럼 한 곳에서 모든 문구 제품을 판매하는 업체는 없다.

    문구 유통에 관한 한 이 회장의 안목을 따라갈 사람은 없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경쟁업체가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알파만은 승승장구했다. 유통에 대한 그의 철학은 ‘나눔’이다.

    1970년대 알파가 서울 남대문에 첫 번째 가게를 열었을 때 일이다. 이 회장은 남대문상가 상인들이 장사를 하다가 물이 필요해도 시설이 열악해 필요한 물을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 수돗물을 마음대로 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 회장은 알파가 들어선 건물을 개방해 수돗물을 주변 상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쓰게 했다. 그랬더니 주변 상인들이 너도나도 알파 건물의 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알파의 팬이 됐다. 문구제품을 쓸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알파를 찾았고, 직접 문구를 사서 쓰지 않더라도 스스로 나서서 주위에 알파라는 기업을 알리는 ‘홍보맨’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화는 주변 상인들에게 다시 입소문을 타고 퍼져 더 많은 고객을 끌어 모으는 기폭제가 됐다.

    지금도 그의 나눔 경영은 계속되고 있다. 알파가 설립한 남대문 갤러리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는 것. 꼭 학생이 아니어도 알파에서 판매한 미술용품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갤러리를 이용할 수 있다. 미술관이 없어서 작품을 전시하지 못하는 미술학도들에게는 무엇보다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땅장사’ 기질 있으면 절반은 성공, 길목 지키면서 ‘이야기’ 만들라

    새로운 핸드백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은 ‘쌈지’는 매장에 그림을 걸어놓는 전략으로 소비자들의 발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

    전국에 370개의 프랜차이즈를 구축한 알파는 이 회장의 ‘수돗물 경영’을 회사 운영 전반에 접목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회장은 1980년대 후반, 직원들이 평생의 목표로 삼는 ‘사장’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프랜차이즈 방식을 도입했다. 전국 어디서든 알파라는 상호를 사용하도록 해주고, 저렴한 가격에 문구제품을 공급해 직원들이 은퇴한 뒤에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물론 프랜차이즈 방식을 도입한 데에는 알파라는 상호를 전국에서 사용하게 해주면 고객들이 알파문구를 사려고 서울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도 있었다. 프랜차이즈란 말조차 없던 시절 이런 방식의 사업모델을 처음 도입한 이동재 회장은 지금도 한국프랜차이즈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전국의 문구점주들에게 알파라는 상호를 사용할 경우 연 30%의 매출 상승을 보장해주기도 한다.

    ‘밥상 위의 간장’

    이런 방식을 통해 그가 프랜차이즈 1000개에 도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유통업의 성패는 ‘경쟁사보다 싸게 물건을 사서 소비자에게 경쟁사보다 싼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자면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해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프랜차이즈가 도움이 된다. 전국에 있는 상점들이 한꺼번에 물건을 구입하면, 저가에 물건을 들여올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남는 수익은 다시 고객들에게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통업이야말로 진정 ‘나누는’ 사업이다.

    이 회장에게 문구업의 핵심을 짚어달라고 하면 ‘밥상 위의 간장’이라고 말한다. 간장 종지는 비록 밥상 전체를 놓고보면 작은 것이지만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 꼭 필요한 재료라는 것. 문구제품도 마찬가지다. 1만5000가지의 제품이 있지만 대부분 부피나 크기가 작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고 해서 쓸모도 작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덩치 큰 다른 제품들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조그마한 문구제품들이다. 그래서 그는 ‘작은 거인’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우리 생활에서 큰 역할을 하는 문구야말로 ‘작은 거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작은 것을 나누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한다. 작지만 소중한 것을 나누다 보면 손님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작은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왜 그것을 나누려고 하는가. 어떤 사연이 있는가. 그 사연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진 경험이 있는가. 그래서 흥분한 적이 있는가. 때론 고객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알아줄 때까지 개선한 적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훌륭한 유통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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