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28일 리비아 트리폴리의 순교자광장(옛 그린광장)에서 총을 든 반군 청년들. 이날 국가과도위원회(NTC)의 트리폴리 이전을 기념하는 차량 퍼레이드가 열려 광장에 모인 반군들은 하늘에 축포를 쏘며 자축했다.
리비아에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원수라는 사람이 전투기까지 동원해 자기 나라 마을을 폭격하고, 건물 위에 저격수를 배치해 국민에게 총을 쏘아댔다. 또 무고한 시민 수십 명을 창고 안에 가둬놓고 무차별 총질을 한 뒤 시체들을 불태웠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눈앞에서 차례로 쓰러졌지만 국민들은 이에 겁먹기는커녕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제 독재자의 축출, 시민혁명의 성공이라는 값진 과실이 눈앞에 와 있지만 이를 위해 흘린 피와 눈물이 너무나 많았다.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또 이에 대항하는 국민의 저력이 얼마나 강인할 수 있는지, 아직도 놀랍기만 하다. 리비아 혁명, 또는 이를 아우르는 ‘아랍의 봄’은 최근 10년, 또 앞으로 10년 동안 9·11 테러에 버금가는 세계사적 사건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리비아에서 기자는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 환경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가며 일주일가량을 보냈다. 매순간 긴장의 연속이었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계속 터져 나왔다. 물론 기자도 기자이기 전에 사람인지라 출장 지시를 받았을 때는 덜컥 겁부터 났다. 우여곡절 끝에 리비아 국경을 처음 넘었을 때의 긴장감, 그리고 리비아 국경에서 벗어났을 때의 안도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리비아는 이런 개인적인 두려움을 넘어 이미 그 어떤 기자도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 됐다. ‘때론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숙명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지난 8월23일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세 번, 자동차 두 번 갈아타고 리비아 진입

8월28일 리비아 트리폴리의 순교자광장(옛 그린광장)에 선 동아일보 유재동 기자.
기자는 파리와 튀니스(튀니지 수도)를 경유, 30시간이 넘는 비행과 대기시간 끝에 이곳에 도착했다. 제르바를 베이스캠프로 선택한 것은 이곳이 리비아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제르바에서 리비아 국경을 넘으려면 두 가지 루트가 있는데 하나는 해안도로를 통해 국경도시 빈가르데인으로, 또 하나는 내륙도로를 통해 데히바로 가는 것이다. 리비아 상공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그 어떤 비행기로도 리비아의 도시에 직접 진입할 수 없다. 기자는 우선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은 ‘해안도로 루트’를 시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첫 국경 통과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차로 2시간을 달린 뒤 도착한 빈가르데인 쪽 국경 검문소에서 튀니지 경찰은 기자의 여권을 한 장 한 장 살피더니 “리비아 비자가 없다”며 결국 월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가라. 여기는 보다시피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다. 비자가 없으면 절대 국경을 넘을 수 없다.” 과연 약 100m 앞쪽에 있는 리비아 쪽 검문소에는 카다피의 녹색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실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이 경찰관은 돌아서는 기자를 다시 불러 세우더니 매우 중요하고 실용적인 ‘팁’을 줬다. “데히바로 가라. 그곳은 이미 반군이 점령한 지 오래다. 비자도 필요 없을 것이다.”
리비아로 가는 길이 명확해진 뒤 기자는 예상 일정에 맞춰 출장 준비를 처음부터 다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랍어와 영어가 모두 가능한 튀니지인 가이드를 구하고, 차량도 섭외했다. 특히 리비아 국경을 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는 제르바에서 트리폴리를 3박4일 일정에 왕복하는 조건으로 튀니지의 한 렌터카 업체에 25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그나마 전쟁터인 트리폴리는 “무서워 안 가겠다”는 운전사가 대부분이어서 섭외에 마지막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트리폴리 인근에서 이탈리아인 기자 5명이 정부군에 납치되고 운전사는 현장에서 사살됐다는 보도가 막 나왔을 때였다. 출장 준비가 복잡해지고 시간이 지체되면서 마음만 초조해졌다. 하지만 치열한 내전의 현장을 혈혈단신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