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는 ‘쿠데타 모의’ ‘소련 유학 출신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 정도로만 알려진 이른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은 거사일까지 확정한 북한 최초이자 마지막 반(反)김정일 쿠데타다. 한국 학계가 이 사건을 북한 급변사태와 관련해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제대로 알려진 사실이 없어 의문투성이다.
북한에서 향후 일어날 수 있는 급변 사태를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오류다.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도 마찬가지다. 쿠데타 세력은 김일성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을 일본 ‘천황’과 같은 상징적 인물로 세우고 정치·군사적 준비를 잘해 ‘남조선’을 먹어치우려는 강경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하던 시기, 북한 군부의 오진우는 물렁물렁했고, 최광은 머저리였다. 쿠데타 시도 세력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의 몰락을 소련에서 지켜본 터였다. 그들은 군대가 강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견장, 훈장 떼고 체포하라우”
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본부 성원에게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로 집합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조선인민군이 창건된 날(북한군은 1948년 2월 8일 조직됐는데,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등극한 후 김일성이 반일 유격대를 조직했다고 선전하는 1932년 4월 25일을 창건일로 바꿔 기념해왔다. 올해부터 다시 2월 8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에 즈음해 훈장을 주려나보다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회의실에 집합했다.
회의장 주석단에는 인민무력부 총참모장 최광이 혼자 앉아 있었다. 연탁에는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원흥희가 서 있었다. 성원들이 회의장에 집합하자 원흥희가 “이제부터 인민무력부에 잠입한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를 숙청하겠다”고 발표했다. 회의장 좌우측 출입문이 열리면서 인민무력부 보위국 군관들과 하전사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두 줄로 들어와 회의 참가자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일명 소련 군사 아카데미아 유학생 숙청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홍계성 상장(빨치산 최현의 사위, 현 노동당 비서 최룡해의 매부),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중장과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을 비롯해 장령급(한국의 장성급)을 포함한 70여 명의 고위급 군관이 체포됐다. 보위국장 원흥희가 이름을 부르면 보위국 하전사 2명이 호명된 이에게 다가가 총구를 들이대고 군관 1명이 군복의 김일성 초상화와 훈장, 견장을 떼고 신분증을 회수한 후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어깨에 망토를 걸쳐준 뒤 데리고 나갔다. 성원들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이날부터 1998년까지 5년에 걸쳐 소련 군사 유학생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뤄졌다.
1986~90년 250명 소련 유학
홍계성을 비롯한 쿠데타 모의 핵심 인사들이 모스크바 프룬제를 비롯한 군사 아카데미아 출신인 터라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련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1984년 김일성이 300명 넘는 사절단과 함께 소련을 방문했다. 콘스탄틴 체르넨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서방에 강경했다. 김일성과 체르넨코는 북한의 군사 간부와 국방 과학자 양성을 위해 북한에서 소련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데 합의했다. 북한은 1986년부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소련의 각 가맹 공화국에 있는 군사대학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소련 군사 유학은 1950년대와 1980년대 두 차례 있었다. 1950년대 군사 유학생은 100명가량으로 오극렬, 김일철, 조명록 등이 대표적이다. 오극렬은 1기다. 오극렬은 6년 만에 5년제 과정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소련에 흐루시초프가 등장해 수정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소련 유학생 철수를 검토했다. 사회 유학생(군사학 아닌 일반 학문 유학생)은 모두 소환했으나 군사 유학생은 100명가량이 남아 소련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훗날 북한군의 주력을 이뤘다.
2차 소련 군사 유학은 1986~1990년 5년간 이뤄졌다. 사회 유학생은 5년간 1500명에 달했으나 군사 유학생은 한 해 50명가량이다. 50명이 안 되는 기수도 있다. 5년 동안 250명 정도가 소련 군사학교에 입교한 것이다. 250명은 예외 없이 집안 배경과 토대가 좋았다.
지휘, 작전, 참모, 비행, 잠수함 등 병종(병과)별로 3인조, 5인조, 7인조로 구성돼 군사대학에 입학했다. 장령급, 좌급(영관급), 위급(위관급)을 망라해 유학생이 구성됐다. 소련 연방에 속한 우크라이나 키예프, 아제르바이젠 바쿠의 군사 아카데미아에도 북한 군인들이 입교했다.
인민군의 각 군단, 각 병종 사령부에서 군무하던 군사 작전 및 기술 부문의 현직 군관 중 전망이 좋고, 토대가 우수한 사람들로 유학생이 선발됐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엘리트 장성과 영관급, 위관급 장교를 선별해 유학 보낸 것이다. 또한 인민무력부 산하 각 군사대학과 제2자연과학원 산하 평양국방대학(당시는 강계공업대학), 룡성약전공업대학 미림전자전대학 2~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3차례 선발 시험을 거쳐 토대가 좋은 학생 위주로 소련의 군사 아카데미아에 파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