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죽음의 나라 시리아의 눈물

  •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입력2012-04-20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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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리아는 흰개미에게 잠식당한 거대한 나무처럼 속이 비어가고 있다.
    • 상황이 이렇게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여전히 국민은 자신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 알 아사드의 이런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시리아에서 평화가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지난해 3월 요르단과 인접한 시리아의 남부 국경도시 다라에서 채 17세가 안 된 청소년 열다섯이 장난삼아 담벼락에 낙서를 했다. 낙서 내용은 “시리아 국민은 정권의 전복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아랍의 각 나라에서 유행하던 구호다. 아이들은 인터넷과 위성방송에서 주워들은 대로 아무 뜻 없이 글을 적었는데 비밀경찰이 이 녀석들을 신속히 잡아들였다. 비밀경찰은 시리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 독재정권의 버팀목이면서 국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부모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한 일이니 자식들을 석방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3월 15일이었다. 이 사건이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질지는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지난해 4월 15일엔 아부 칼릴이라는 사람이 ‘시리아 다라청년그룹’이라는 블로그에 자신의 요구사항을 올렸다. 정권 교체 및 언론의 자유, 최저임금 보장 등 20여 가지였다. 칼릴의 요구사항은 곧 시위 현장의 구호가 됐다. ‘시리아 다라 청년그룹’의 한 멤버인 마지드는 “우리는 요구사항을 심사숙고 끝에 결정했다.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우리가 제안한 요구를 구호로 외치자 우리는 감격했다. 아마 시리아 국민 모두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우리의 구호가 흘러나오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어 일어난 시위에 당황한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내려오는 세습 과정에서 48년 동안 유지해온 국가비상사태법을 폐지했다. 국가비상사태법이란 계엄령과 비슷한 것으로 영장 없이도 통신망을 감청하고 보안 사범을 구속할 수 있게 하는 등 그간 시리아 정권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악용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긴급조치법과 비슷하다. 자신들을 옥죄던 법이 폐지됐다는 소식에 시리아 국민은 환호했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예상보다 시리아의 민주화가 빨리 다가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비상사태법이 폐지되고 불과 하루 만에 무참히 깨졌다. 시리아 정부가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다시 시작하면서 사태가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후 시리아에서는 정부군의 잔인한 진압과 그에 맞서는 시리아 국민의 응전이 계속되고 있다.

    벽창호 같은 나라

    취재를 위해 시리아에 여러 차례 들어간 필자로서는 시리아인이 시위를 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통제와 감시가 생활화돼 있어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는 나라였다. 특히 정치적 성향이 담긴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아랍 전반에 걸쳐 민주화 바람이 불어도 시리아에는 별 영향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 나라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해도 얼마 못 가 정부군과 비밀경찰에게 이내 진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시리아는 굳게 닫힌 벽창호 같은 나라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시민들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관영 방송은 처음에는 아무런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시위가 시작된 지 한 달 정도 지나 “무장 테러단체들이 국민을 선동하고 있으며 정부가 곧 진압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시리아 소식이 국제 뉴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갈 때 유튜브에 충격적인 동영상이 올라왔다.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이들에게 정부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동영상 속 풍경은 여기저기 시신과 신발이 흩어져 있고,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이리저리 도망가고 있었다. 대부분 비전문가가 휴대전화 카메라나 홈비디오로 촬영한 조잡한 영상이었지만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정부군이 사살한 시신 수십 구가 길거리에 방치되고 있었으며 아이들까지 학살당하는 놀라운 영상도 올라왔다. 트위터를 통해서도 시리아의 시위소식이 전해졌다. 어느 지역에 시위군중이 몇 명 모였으며 정부군에게 몇 명이 사살됐는지 같은 사항을 실시간으로 소상하게 전했다.

    시위를 촉발한 원인 중 하나는 위성방송과 인터넷, 휴대전화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다. 이전에는 관제 언론이 전하는 세상이 시민들이 아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남부 도시 다라에 사는 청년 아하마드 사르프(24)는 “1년 전 위성방송에서 파업을 하고 정부를 향해 시위를 하는 프랑스 사람을 본 적 있다.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부 관계자들에게 저렇게 불만을 표시해도 프랑스에서는 용납되는구나, 프랑스 정부는 그 사람들을 잡아가두거나 죽이지 않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똑같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오직 우리 시리아 사람만 엉뚱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시리아의 1인당 GNP(국내총생산)는 3000달러에 못 미친다. 인플레이션이 날로 심해져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고 있다. 다른 나라의 잘사는 모습을 위성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보면서 시리아 국민은 괴리감을 느꼈다. 지난해 4월 시리아 북서부고속도로 한가운데서 검정색 히잡을 두른 여성 수천 명이 모여 길을 막고 시위를 했다. 이들의 요구는 빵 값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여성이 모여 정부에 무언가 요구한다는 것은 시리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위대는 대부분 가정주부들로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빵 값이 올라 살기 힘들어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시위를 두고 한 시리아 정부 관리는 “세상이 얼마나 말세면 여자들이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합니까? 저 여자들은 불순분자이고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시위에 참가했던 나디아(29)는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거리에 나왔겠는가. 정부는 우리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고 체포하는 일에만 바쁘다”고 말했다. 주부들은 체포돼 끌려가면서도 “우리는 아이들을 굶겨 죽일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2대에 걸친 세습 독재

    시리아는 2대에 걸친 세습 독재 국가다. 올해 46세인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1970년 무혈 쿠데타로 권력을 쥔 부친 하페즈 알 아사드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이다. 학창시절 그는 조용한 성격의 모범생이었다. 알 아사드는 영국의 한 의대로 진학해 웨스턴 안과병원에서 전문의로 일했다. 그가 안과를 택한 것은 ‘끔찍하게 여기는 피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수한 의사였고 평범한 영국인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대권을 물려받은 후 모든 게 바뀌었다. 잔혹한 독재로 시리아를 통치한 것.

    평화적 시위를 하는 국민에게 피를 요구하는 중심에는 시리아 군대가 있다. 시리아군은 아랍에서도 막강하기로 유명하다. 알 아사드 대통령은 이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다. 친동생 마헤르가 이끄는 제4 기갑사단이 그의 친위부대다. 시리아군은 북한군과 비슷하게 감시 체제가 잘 구축돼 있다. 중앙 정부가 군 지휘관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으며 지휘관은 자기 수하에 있는 장교를 감시한다. 시리아 헌법은 “바트당이 시리아의 여당이며 따라서 바트당을 지키는 것이 바로 국가를 지키는 것”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정권과 대통령에 대한 어떤 위협도 군부 지휘관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민주화 시위가 유독 잔인하게 진압되는 이유 중 하나다. 병사들은 이 원칙 때문에 설령 그들이 원치 않더라도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시민에게 발포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몇 달간 시리아군에서 탈영한 장교나 병사가 털어놓은 증언에 따르면 발포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군인은 처형당했다. 탈영병인 압둘 요세프(21)는 “나는 기갑병이었다. 시위대 앞에 탱크를 세워두었는데 지휘관이 우리에게 앞으로 전진하며 발포하라고 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탱크 안의 동료 병사는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본 것 같았는데 어쩔 수 없이 발포했다면서 괴로워했다”고 증언했다. 본인이 처형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시민을 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군부에선 ‘언제까지 국민을 잔인하게 살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군인이 늘어갔다. 그리고 이들 중 처형당할 각오로 군대에서 탈영해 시민 편에 서는 용감한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지난해 6월 6일 압둘 라자크 무함마드 탈라스 중위가 군대에서 처음으로 탈영했고, 3일 뒤엔 후세인 하르무쉬 중령이 탈영을 시도하다 적발됐다. 이탈한 장교와 병사들이 모여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지난해 8월 시리아 정부군 출신 리아드 알 아사드 대령이 탈영병들을 모아 자유시리아군(Free Syrian Army : FSA)을 창설한 것. FSA는 현재 4만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근동정책연구소에 따르면 FSA는 37개 대대로 구성돼 있다. 최근엔 무스타파 아흐메드 알 셰이크 육군 장군과 아페프 마흐무드 술레이마 공군 대령이 가세해 세를 불렸다. FSA의 등장은 시리아 사태의 전환점이 됐다. 시리아가 내전에 돌입한 것이다. 국민도 비무장으로 정부에 대항하던 방식을 바꾸고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육군 대위 출신의 모하마드 사피크는 북부 도시 홈스에서 비밀리에 FSA 부대를 정비하고 있다. 그는 “교전 중에 들고 있는 총을 지닌 채 FSA 쪽으로 뛰었다. 나의 지휘관이 나를 조준해 쏜 듯한 총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탈영을 한 것은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다. 내 동포를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정권을 퇴진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다. 정부에서 FSA에 알 카에다 조직원이 있다는 식의 흑색선전을 하는데 절대로 믿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자유 시리아 군대다.”

    FSA는 시위 거점인 다라, 홈스,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시리아 전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시리아 국민은 탈영병 부대가 자신들 편에 서서 보호해주자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홈스에서 시위대 영상을 기록하는 시민 활동가 이브라힘(28)은 “탈영병 부대가 등장하자 시민들은 열광했다. 우리를 보호해줄 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시위현장에서 총을 들고 우리 앞에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알 아사드 정권을 퇴진시킬 때까지 모두가 함께 해야 한다는 연대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FSA는 수도 다마스쿠스 주변과 홈스에서 집중적으로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지난해 11월 16일 그들은 다마스쿠스 외곽에 있는 하라스타의 정보부 건물을 공격했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이후 처음으로 국가기관을 타격한 것이다. 또한 같은 날 새벽 2시 반경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를 잇는 고속도로에 있는 또 다른 정보부 건물을 RPG(휴대용 로켓 추진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새벽에 급습을 당한 정부군의 피해는 컸고 반군은 무기도 노획할 수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뉴스였다. FSA가 시리아 영토의 일부를 접수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해준 것은 ‘두마 전투’였다. 올해 1월 21일 FSA가 다마스쿠스 인근의 두마에서 전투를 벌였다. 두마는 다마스쿠스에서 북서쪽으로 14㎞ 떨어진 소도시로 알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 및 시위가 격렬한 곳이다. 또한 대통령궁과 불과 10여 ㎞밖에 안 떨어진 곳이어서 알 아사드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역설적으로 FSA는 국제사회의 딜레마로 떠올랐다. 반군을 도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FSA는 무기나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반면 정부군은 아랍 최고의 군대로 무기나 조직 면에서 탄탄하다. 60만 대군과 4만 소군의 싸움인 것이다. 정부군은 탱크나 전투기를 동원해 전투에 나서지만 FSA가 손에 쥔 무기는 AK소총이나 RPG 정도다. 이런 무기를 들고 지금껏 정부군과 전투를 벌여온 게 기적일 정도다. FSA의 알 아사드 대령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FSA는 경·중화기로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이 무기는 병사들이 정부군에서 탈영할 때 들고 나온 것이거나 정권의 군대와 맞서 싸울 때 노획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아랍권 고위 외교관리는 최근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요르단을 통해 무기와 군사 장비를 FSA에 전달할 예정”이라면서 “이것은 시리아에서의 학살을 중단하기 위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구상”이라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카타르와 함께 중동에서 시리아 정권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는 국가다. 사우디아라비아 외교장관은 “시리아 반정부군은 스스로 무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카타르 국왕 역시 올해 초 중동국가 수반으로는 처음으로 “시리아에서의 학살을 막으려면 군사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시리아의 친구들

    서방국가들은 개입을 쉽게 결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리비아 사태 때는 반군에게 무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기나 무인공격기를 동원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리비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했으며 전투기와 무인공격기 등도 사용했다. 그 결과 카다피는 제거했지만 리비아는 또 다른 갈등을 겪고 있다. 카다피가 죽자 반군들이 서로 ‘포스트 카다피’가 되고자 했다. 국제사회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공급한 무기가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 국제사회가 알 아사드의 국민 학살과 유혈 진압에 명백히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는 있지만 무기 공급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알 아사드 정권을 퇴진시키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으나 리비아의 경우처럼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시리아라고 나중에 리비아 꼴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다 경제 위기로 인해 유럽과 미국이 정신없는 와중에 엄청난 비용이 드는 군사 개입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매일 수십 명씩 죽어나가는 시리아 시민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시리아의 친구들’이라는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는 국제 연대를 조직했다. 전 세계 70개국이 동참한 시리아의 친구들은 알 아사드 퇴진과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이다. 2월 24일 시리아의 친구들에 소속된 나라 외무장관들의 첫 회담이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열렸다. 이날 회담에서 시리아의 친구들은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유혈 진압 즉각 중단과 구호활동 허용 등을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에게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여행 금지, 자산 동결, 원유 금수를 비롯한 일련의 제재를 통해 시리아 정권이 폭력을 중단하도록 압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시리아국가위원회는 이날 회담에서 실질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지 못했다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부르한 갈리운 시리아국가위원회 의장은 선언문과 관련해 “시리아 국민의 열망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무기 공급에 대한 그 어떤 사항도 시리아의 친구들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리아국가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당장 하루에도 수십 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지원이다. 알 아사드가 우리를 죽이려드는데 ‘친구’라면 방어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편을 생각해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기력한 유엔

    4월 1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두 번째 시리아의 친구들 회의에서는 시리아의 반정부 세력에 물질적 지원을 하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아랍권에서 시리아에 강경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4개국이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FSA에 재정과 통신장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회의에 참석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시리아 반정부세력과 외부 세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통신장비를 제공하는 것이라고만 했다. 1차 회의 때 크게 실망한 시리아국가위원회의 갈리온 위원장은 “FSA 소속 장교와 병사, 레지스탕스에 대해 일정한 급여를 지급할 수 있게 됐다”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급료가 지불되는 것의 의미는 상당하다. 월급이 나오면 정부군에 소속된 장교와 병사의 탈영이 가속화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제껏 생계의 문제로 마음은 있으나 탈영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장병들이 적극적으로 탈출에 나설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도 무기 공급에 대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시리아의 친구들은 유엔(UN)을 통한 정치적 해결을 바라고 있다. 무력이 아닌 외교력을 동원해 평화가 오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 일을 유엔이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유엔은 시리아 사태에 직면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지난해 12월 4일 시리아 사태 해결을 위한 결의안을 의결에 붙였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결의안을 채택하는 데 실패했다. 러시아는 시리아와 군사적,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크다. 6년 전 시리아가 빚진 100억 달러를 탕감해준 일도 있다. 이를 계기로 알 아사드 대통령과 러시아 최고위층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또 시리아는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국가 중 손꼽히는 큰손이다.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 발발 이후에도 활발하게 무기 판매 계약을 맺어왔다. 지난해 12월 야크 130 제트 훈련기 36대를 파는 계약을 시리아 정부와 체결했다. SS-N-26 대함 순항미사일 72기도 팔았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만약 유엔 제재가 단행돼 시리아에 무기를 팔지 못할 경우 러시아가 당하는 피해가 50억 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또한 시리아 항구도시 타르투스에 있는 러시아 해군기지는 러시아로서 포기하기 힘든 곳이다. 러시아는 알 아사드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 아사드 정권 시절인 1970년대 타르투스 항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타르투스 항은 러시아의 지중해 연안 전략기지다. 이 항구를 잃으면 안보적 손실이 크다.

    중국도 시리아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올해 1월 원자바오 총리가 시리아 사태와 관련해서 “중동지역 국민의 변혁 욕구를 지지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중국은 시리아 사태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안보리 결정 과정의 문제점을 근거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중국은 “논의 과정에서 국가 간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는데도 투표까지 시도하는 것은 안보리의 권위가 훼손될 수 있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구실을 내세웠다.

    하지만 중국의 진짜 속내는 시리아에서 부는 민주화 바람의 여파가 중국 본토까지 미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중국은 최근 위구르족 문제가 부각되며 이슬람 세력의 자국 내 확장을 경계하고 있는데다, 중국에 민주화운동 바람이 이식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에너지 회사인 CNPC는 시리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시노켐은 시리아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시리아 편을 들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투자한 공든 탑이 모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 역시 1980년부터 시리아에 무기를 제공해왔다. 중거리 탄도미사일 체계를 전수해준 적도 있다. 중국으로서도 시리아는 놓치면 안 되는 고객인 것이다. 중국의 거부권 행사는 이 같은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무시 전략은 시리아 정부가 최초 시위가 벌어진 지 1년이 넘도록 건재한 이유 중 하나다.

    유엔이 결의안을 채택하는 데 실패한 이후 시리아 편을 들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도 싸늘해졌다. 아무리 시리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지만 이 두 나라가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학살 행위에 동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랍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요르단에선 활동하는 이슬람 단체 ‘무슬림형제단’ 은 아랍 국가에서 중국과 러시아산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무슬림형제단의 함만 사이드는 “안보리 결의안을 거부함으로써 러시아와 중국은 알 아사드 정권이 자행하는 학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자명해졌다”면서 “이슬람교도와 아랍인 모두가 자유와 존엄을 요구하는 시리아 국민을 지원하려면 중국과 러시아제 상품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혁명으로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린 리비아 국민들로 구성된 50여 명의 시위대가 4월 7일 트리폴리 주재 러시아대사관을 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들은 주리비아 중국대사관에도 돌과 계란, 토마토를 던지며 항의했다. 시위대가 던진 돌 탓에 대사관 창문이 깨졌다. 일부 시위대는 대사관 담에 페인트칠을 했다.

    유엔은 최근 시리아 사태 해결을 위해 히든카드를 꺼내 들었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휴전안을 제시한 것이다. 아난 전 사무총장은 3월 10일 시리아를 방문해 알 아사드 대통령과 만나 폭력사태 종식 방안을 모색했다. 아난 전 사무총장은 시리아 분쟁 해결을 위한 특사 자격으로 시리아를 찾았다. 아난 특사가 제안한 6개항의 평화안에는 4월 12일까지 유엔 감시 아래 교전을 중단하고, 교전지역에서 정부군과 중화기를 철수하며 인도적 구호활동을 위해 교전지역에서 매일 2시간씩 휴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내전의 끝은…

    하지만 시리아 반정부 세력은 정치적 해법을 강조한 아난의 휴전안에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홈스의 활동가 하디 압둘라는 “탱크가 마을을 공격하고 저격수가 여성과 어린이를 사격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대화도 거부한다”고 못 박았다. 또 다른 활동가인 알리 샤리파는 “아직도 유엔은 시리아의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알 아사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휴전이 이뤄진다 해도 말 그대로 잠깐의 제스처일 뿐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다시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할 것이다. 그가 국민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지금 이 상태까지 사태를 끌고 오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의지를 꺾고자 도시의 전기, 통신, 수도를 끊었다. 아이들과 부상자가 넘치는 홈스를 보면 유엔의 제안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당신도 알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FSA의 견해도 마찬가지다. 휴전 시한을 4일 앞둔 4월 8일 알 아사드 대령은 공식 성명을 통해 “시리아 정부는 코피 아난 특사의 평화안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평화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FSA에서는 유엔 중재와 관련해 불만이 적지 않게 터져나왔다. 육군 중위로 두 달 전 탈영해 FSA에 합류한 메디 아르난(27)은 “우리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유엔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위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무기를 조달받아 정부군을 밀어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게 우리의 공통된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 자유 시리아의 군인들은 알 아사드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탈영을 한 이상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내 조국 시리아가 자유로운 민주 국가가 되는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싸울 것이다. 유엔보다는 내 손에 들려 있는 AK소총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휴전 제안은 오히려 양측의 더 치열한 교전을 불러왔다. 6·25전쟁 때 휴전 직전 백마고지 탈환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처럼 말이다. 시리아 북부 홈즈와 알레포에서도 평소보다 전투가 더 치열했다. 사망자도 속출했다. 하루에 100명 넘는 사망자가 기록된 날도 있다. 4월 7일에는 하마 인근 라탐나 등 주요 도시를 시리아군이 공격해 이날에만 13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지금껏 사망한 시리아 시민의 숫자가 1만 명을 넘는다. 4월 5, 6일 이틀간 시리아인 2800명이 터키로 몰려가는 등 전체 난민 수는 2만4000명에 달한다. 터키로 피신한 난민 중 3분의 1은 아난 특사의 평화안이 논의되던 최근 2주간 시리아를 탈출한 사람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외무장관은 4월 7일 “난민이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리아인권관측소의 라미 압델 라만 대표는 4월 12일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약속했던 정전 시한 직후 수도 외곽의 자바다니 마을에서 폭발음이 몇 차례 들렸다”며 “군대를 도시에서 철수하겠다는 알 아사드 대통령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에도 홈즈와 다마스쿠스 외곽에서는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FSA가 알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유엔보다 더 좋은 도구라고 보도했다. 워싱턴에 위치한 근동정책연구소의 군사분석가 제프리 화이트는 “병력과 무력이 점점 늘고 있는 FSA가 향후 시리아 상황을 해결하는 추진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군 내에서 비밀 채널을 통해 FSA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체제 내부의 이탈 세력도 늘고 있다고 한다. 알 아사드 대통령에게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사태는 외부 테러리스트의 폭동일 뿐이다. 알 아사드의 이러한 믿음이 부서져야 시리아에 평화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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