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할 때면 늘 친구처럼, 형제처럼 상의하는 두 사람.
쌀 세 가마에 김치 가득 있는 집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제일토건에 입사한 그는 현장에서 험한 일을 한 대가로 받는 월급 20만원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얼마 못 다니고 퇴사했다. 그러고는 1975년, 서른한 살의 나이에 반도건설을 창업했다.
“말이 창업이지 구멍가게나 다름없었어요. 직원이라고 해야 저와 사촌동생, 후배 이렇게 세 명이 전부였죠.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따러 다녔는데, 주위에 성실하고 일 잘하는 청년들이라고 입소문이 나면서 일거리가 하나씩 들어왔어요. 그러다 처음으로 집 한 채 짓는 공사를 따냈는데, 얼마나 기뻤던지 계약서를 쓰면서 눈시울을 붉혔죠. 쌀 세 가마에 김치가 가득한 집을 갖는 게 소원이라 내 집 짓듯 정성껏 지었죠. 그렇게 집 한 채를 짓고 나니 일이 마구 밀려왔어요.”
한 채, 다섯 채, 열두 채, 그러다 병원 건물을 짓고, 59가구의 저층 아파트를 지었다. 당시 건설법 규정상 60가구가 넘으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했다. 그래서 60가구가 아닌 59가구였다.
권 회장이 박 총장을 만난 것은 부산에서 성실을 무기로 건설사업을 키워가던 서른여섯 살 때다. 박 총장은 권 회장의 첫인상에 대해 “젊은 날의 권 회장은 자신감 넘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건실한 기업가였다”고 떠올렸다. 두 사람은 초기엔 “사업 잘되십니까?” “대학은 어떻습니까?” 하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는데, 차츰 서로 운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취향이 같은 것을 확인한 다음부터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권 회장의 말이다.
“취미가 같으니 자주 어울리게 됐어요. 박 총장이 스킨스쿠버를 배우고 있기에 저도 몰래 스킨스쿠버를 배웠죠. 어느 날 박 총장이 스킨스쿠버 하러 간다기에 따라갔어요. 도착해서 저도 장비를 갖추고 물에 뛰어드니 박 총장이 얼마나 놀라던지….”
승마 또한 박 총장이 먼저 시작하고 권 회장이 나중에 배웠는데, 오히려 권 회장이 승마협회장을 지낼 정도로 말 타기를 즐긴다. 운동을 하면서 마음이 통한 이들은 서로 깊은 속내를 주고받기에 이른다. 권 회장은 박 총장을 가까이 하면서 시와 음악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자신의 삶의 이력과 비슷해서 아끼고, 김상훈 전 부산일보 사장이 쓴 ‘내 구름 되거든’을 낭송하며 늘 그렇게 살리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김남조 시인 등 여러 시인과도 교류한다. 권 회장이 건설협회장에 취임한 뒤 ‘건설인송년음악회’를 개최한 것도 뒤늦게 찾아낸 풍류가 기질 때문일 것이다.
“건설사업, 세계를 시장으로 삼아야”
박 총장과의 교유는 권 회장의 사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박 총장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페어레이디킨슨대,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해외 유학파로서 권 회장에게 “건설사업은 세계를 시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후 권 회장은 박 총장의 관심분야인 러시아의 극동지방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를 함께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사업영역도 확대해 나갔다.
IMF 외환위기 때 일이다. 일본에서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매물로 나온 골프장 매입 건을 두고 권 회장은 박 총장에게 자문했다. 두 사람은 즉시 함께 일본으로 날아갔다.
“평소 골프를 좋아하는 권 회장이 어느 날 도쿄 근처의 골프장을 사고 싶다고 해요. 외환위기 때라 다른 기업은 긴축재정과 구조조정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골프장 매입이 웬 말인가 싶어 두말 않고 일본으로 따라갔어요. 라운드를 하면서 본 컨트리클럽은 예상외로 풍광이 아름다웠어요. 역시 권 회장의 사업적 눈썰미는 대단하다 싶었죠. 그래서 매입을 적극 권유했어요.”
권 회장은 “그때 많은 사람이 골프장 인수를 반대해 박 총장에게 최종적으로 조언을 구했는데, 결국 박 총장의 권유로 매입했다”며 “지금은 골프장 시세가 구입가보다 2배 이상 뛰었다”고 귀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