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알갱이
▼ 기청산식물원의 기(箕)가 무슨 뜻이지요?
“난 청산이란 말이 좋은데 그냥 청산이라고 부르면 싱겁잖소. 기란 곡식 까불 때 푸는 키요. 쭉정이는 날려 보내고 알곡만 남기는 도구지. 청산은 유토피아거든. 유토피아의 알갱이만 모아놓은 곳이란 소리지.”
나무는 인간의 역사와 언어를 고스란히 기록한다. 시간의 눈금을 나무만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젊어서 죽지 않는 한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시간은 가차없이 젊음을 지운다. 가차없다는 것은 잔인하다는 말이 아니라 공평하다는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지난해 어처구니없이 저쪽 세상으로 가버려 우리를 억장 무너지게 했던 이윤기 선생이 생전에 말했다. 세월에 방울을 달아놓으라고! 처음엔 보잘것없는 쇠방울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게 은방울이 되고 금방울이 될 것이라고!
물론 그 방울 달기는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꾸준히 계속하란 권유일 것이나 선생은 보다 구체적으로 시간에 방울 다는 법을 제시했다. 그게 바로 나무 심기였으니 회초리만한 묘목 위로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면 나무는 스스로 거목이 된다는 것이다. 거목이 된 나무는 아연 존재감이 달라진다. 저 홀로 의연하게 서서 사람을 마주 바라볼 줄 알게 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인생의 정답은 ‘나무 심기’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내가 그저 들은 풍월로 그런 말을 한다면 이삼우 어른은 평생 동안 그걸 뜨겁게 실천해온 사람이다.
우린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걷는다. 나무 심기는 과연 시간에 방울을 달아놓는 일이로구나. 그 방울이 기청산 여기저기서 자랑자랑 울린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세월이라면 사람은 당연히 나무를 심어놓고 세월을 보내야 한다. 그걸 새삼 절감한다. 38년 전 묘목을 심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선 동행한 친구와 ‘오링 테스트’도 했다. “그건 숫나무요. 오른손으로 둥치를 잡아봐. 아마 왼손가락에 힘이 확 들어갈 걸.” 과연 내 왼손 엄지와 검지는 친구가 도저히 뗄 수 없게 강력해졌다.
나무(木)의 아들(子)인 이(李)씨
▼ 나무와 대화를 하시나요?
“나무의 말을 알아듣는 듯도 하지만 솔직히 아직 대화할 수준은 못되오. 언젠간 그리 되겠지. 하긴 내 이름자부터가 운명적이긴 하지. 항렬을 넣어 지은 ‘參雨’(삼우)를 나무를 심으면서 ‘森友’(삼우)로 바꾸었거든, 하하하. 성(李)부터 나무(木)의 아들(子)아니오? 한국의 사립식물원 원장 대다수가 성이 이씨라오, 재밌지 않소?”
눈앞의 한 그루 나무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상이지만 동시에 추상이다. 그의 수명이 인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고 육안으로 안 보이는 숱한 비밀을 간직하기 때문이고 안에 품은 생명력이 사람의 생명력과 무시로 교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린 나무의 시간과 비밀과 생명력을 콘크리트로, 경제논리로 처발라버렸다. 그래놓고 노상 헛헛해한다. 그가 “왜 나무를 사랑해야 하는지 아시오?”라고 묻는다. 나는 “오래 사니까. 그리고 아름다우니까!”라고 말했다. 내 대답은 빈곤해서 썰렁하다. 그가 스스로 답한다.
“나를 온전하게 이 우주에 묶어주는 것이 나무라오. 사람이 이 세상에 온전하게 존재하려면 나와 주고받은 사랑의 고리들이 얽히고설켜 우주 공간에서 균형을 이뤄야 하거든. 그 사랑의 고리가 많으면 존재의 안정감이 높아지고 반대면 불안해지지. 사랑의 대상이 어디 사람뿐이겠소.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 물건까지 포함되는 거겠지. 다만 생체의 연륜과 덩치, 질에 따라 인연의 끈이 굵거나 가늘 수는 있을 거야. 흔히 노거수를 해치고 해를 입곤 하는데 나는 그것도 같은 이치라고 봐. 수백 년 그 나무를 사랑하던 사람들과 인연의 고리가 단번에 끊어지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거지.”
“….”
“이게 미신 같소?”
“아니요. 온갖 생명이 우주와 인드라망(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의 보배 구슬 그물. 모든 게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상징)으로 연결돼 있다는 철학이로군요.”
우리는 함께 웃고 그 웃음은 나무를 타고 하늘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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