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업실에서 -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배운 한문 실력에 그의 솜씨가 더해져 어느덧 전각이 취미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팠다.
‘기술’은 소병진의 특기이자 모든 것이다.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술’이라는 한 낱말로 남을 것이다. 교복에 모자를 쓴 또래 학생들을 보고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지만, 기술이 곧 인생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행운아다. 처음 들어간 공방에서 솜씨 좋은 장인들을 만나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배운 즉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가구가 잘나가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기술을 배우고 계발해나가는 그 자체를 정말로 좋아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쉴까 말까 한 그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과 말투에 그토록 자랑스러움이 묻어날 리가 없다.
“노는 날 목욕하고 이발하고 영화 한 편 보면 기분 최고였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잘 해나가고, 그 보답마저 바로바로 주어질 때, 사람은 미친 듯이 일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맞는 잠깐의 휴식이란 꿀처럼 달콤했으리라. 김석환 사장과 ‘백골반’(칠하기 전 원목 상태의 가구를 백골이라고 한다)의 어느 여름휴가 기념사진을 보여줄 때도 그의 얼굴은 영광스러운 순간을 회상하는 승리자의 표정이었다. 사진에는 김 사장을 비롯해 최규환, 이해민, 그리고 소병진과 그의 제자 서영길까지 차례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의 기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계보를 그리고 싶었나보다.
소목 일에 몸담은 열다섯 살 이후 기술은 그의 인생에서 화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기술이 곧 돈이고 독립이었다. 기술자가 되면 사장에게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도급공으로서 만드는 만큼 돈을 받기 때문이었다. 기술을 빠르게 익힌 어린 그에게 김 사장은 비싼 공구 일습을 사주며 그를 기술자로 대접해주었다.
“남보다 더 많이 일했습니다. 만드는 만큼 돈을 받으니, 기술자도 좋고 사장도 좋아라 했지요. 일거리는 늘 쌓여 있었으니까요.”
새마을운동이 한창 벌어져 농촌집이 개량되고 양복을 입게 되면서 옷을 걸어두고 이불을 넣어두는 새로운 장롱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던 시기였다. 그때는 약혼하면 장롱부터 맞추러 왔다. 가장 큰 혼수품이었던 만큼 뭉칫돈이 들어왔고, ‘농방쟁이’(가구 기술자)라면 누구든 딸을 주려고 하는 ‘잘나가는’ 신랑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단순한 돈벌이 이상이었다. 늘 자기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도전해보는 데 서슴지 않는 그는 1971년 기능올림픽이 전주에서도 처음 열리자 가구제작 부문에 참가해 은메달을 받았다. 그런데 왜 금메달이 아니고 은메달일까?
“전주공고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심사위원 등 대회와 관련된 인사들이 죄다 전주공고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입디다. 금메달도 전주공고 조교가 차지했고….”
그는 지금도 억울한 표정이다. 기술에서 최고가 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로서는 우선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이고, 안 그래도 학교를 중퇴한 그이기에 더욱 비애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때 받은 상처 때문인지 그 자신 각종 대회와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나 시험 출제자가 된 오늘날, 심사만큼은 엄격하게 해 과거 자신처럼 억울한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그때 참가자가 스물네 명이었는데, 어쨌든 학교 출신 빼고 사회인 가운데서는 제가 최고였잖습니까. 그 자부심만큼은 대단했지요.”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가행진까지 했던 그날 이후 그는 이 일이 자신의 길이라는 걸 확신했고, 정확히 21년 뒤인 1992년 드디어 가구제작 부문에서 명장 1호가 되었다. 그것도 마흔을 갓 넘긴 최연소 명장이었다. 어린 시절 그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전주중앙가구에서 기술자로 한창 날리던 시절,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게 해준 또 한 사람의 은인을 만난다. 김 사장이 새 디자인을 계발하기 위해 서울에서 초빙한 소목 유춘봉이 그 은인이다. 남원 출신인 유춘봉은 당시 이름난 장인으로 제자를 세 명이나 거느리고 전주로 내려왔는데, 공방에서 함께 일하던 소병진을 지켜본 유씨가 어느 날 그를 부르더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공장에서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직감했지요.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쉬는 날 음료수를 사들고 유 선생님이 머물던 도토리골로 찾아갔더니 대뜸 저더러 ‘자네는 돈을 벌랑가, 기술을 배울랑가?’ 물으시더군요. 그래, 기술을 배우겠다고 했지요.”
유춘봉은 소병진이 전북에서는 더 이상 배울 기술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능성 있는 젊은이가 전북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며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서울 동일가구로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동일가구라면 일본에 수출까지 하는 동양 최대의 가구공장이었습니다. 농방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이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