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신문과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과 친밀하게 소통해왔을 뿐 아니라, ‘여자의 허물벗기’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 ‘한국사회와 그 적들’ ‘당신은 나의 상처이며 자존심’ 등 다양한 책을 통해 바람직한 삶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심리적 조언과 성찰을 선사해왔다. 광복 70년을 맞아 그에게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인지를 물었다. 인터뷰는 9월 25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에서 진행됐다.
김호기 1961년 태어나고 서울에서 성장하셨죠. 어느 고등학교를 다니셨습니까.
이나미 마포에 있는 서울여고를 다녔어요. 내신이 없어서 예비고사하고 본고사만 잘 보면 학교를 잘 가던 때예요. 당시 공동학군이었는데 공립이라 선생님들이 참 좋으셨어요.
김호기 79학번이지요. 서울대 의대를 간 걸 보면 공부를 무척 잘했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의학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이나미 어릴 때 꿈 중 하나였죠. 집이 워낙 대가족이라 복잡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세계가 불행하다는 걸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 때 프로이트 책을 봤는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싸우는지, 왜 불행한지에 대한 답이 거기에 다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프로이트처럼 정신과 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외할머니께서 저를 키웠는데 치매에 걸리셨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부터 정신병원이란 데가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됐고, 그냥 정신과 의사가 나한테 맞나보다 생각했죠.
14대 宗婦의 유학
김호기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공부하셨지요. 어떤 계기로 유학을 갔습니까.
이나미 고등학생이 될 무렵 아버지가 바레인에서 항만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의대를 나오면 평생 편하니까 유학 가지 말고 혼자 여기서 졸업해라” 그렇게 얘기하시고 나머지 가족을 데리고 떠난 거예요. 제가 3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서 제가 분석치료를 받게 됐죠. 제가 14대 종부(宗婦)예요. 시누이들과 시동생들이 굉장히 끈끈해 주말이면 열 명 이상의 식구에게 밥을 해줘야 했어요. 힘들다고 생각한 게 아버지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피크였던 것 같아요.
김호기 정신과 의사이면서 분석가이기도 한데요.
이나미 분석가가 되고 싶었는데 못했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들거든요. 의사 일을 해도 집에 가면 소고기를 입에 넣을 수 없었어요. 식구가 많다보니 두 근 사 가도 싹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이부영 교수님(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이 융 연구소를 만들면서 분석가 과정으로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시어머님이 점을 쳤더니 제가 없어져야 신랑이 출세한다는 거예요. 저는 유학을 갈 생각도 안 했어요. 남편이 “당신이 14년 동안 너무 힘들었다. 유학도 다른 형제들은 다 갔는데 당신만 못 갔고. 그러니 가서 공부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애들까지 데리고 갔어요.
김호기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종교심리학 석사, 뉴욕 융 연구소에서 분석심리학 디플롬을 받으셨어요.
이나미 원래는 뉴욕 융 연구원에 지원했어요. 문제는 융 연구원이 외국인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시아 여자가 가서 환자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을 못한 거죠. 그래서 비자를 안 주는 거예요. 마침 융 연구원에 있는 교수 몇 분이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같이 가르쳐서 유니온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갔어요. 융 심리학은 신학에 대한 베이스가 없으면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아요.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뉴욕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쳤어요. 융 연구원에서는 첫해에 환자를 못 보겠더라고요. 2년째부터는 환자를 봤고, 디플롬을 마친 거죠. 2005년까지 융 연구원에 있다 한국에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