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의 70년, 회복의 70년
- 보수진영에 유승민 같은 사람 늘어야
- 새정연은 ‘원로 간섭’ 벗어나길
- 보수도, 진보도 과거에 매달려
그는 노무현 정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민주당 공천심사위원(2008),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후보의 새정치위원회 간사(2012), 민주통합당 정치혁신위원회 위원장(2013) 등을 맡았다. 그 어떤 이보다 야권의 정치개혁에 깊이 관여해온 정치학자다. 광복 70년을 맞아 정 교수에게 한국 정치의 현주소와 향후 과제에 대해 물었다.
김호기 어디서 태어나고 성장하셨습니까.
정해구 1955년생인데 충남 서천이 고향이에요. 서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서울에 와서 졸업했어요.
김호기 학부에선 정치학이 아니라 행정학을 공부하셨네요.
정해구 연세대 행정학과 75학번입니다.
김호기 그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셨고요.
정해구 1985년이에요. 학부를 졸업한 후 군대 갔다 와서 결혼했고 직장 생활도 좀 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김호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고려대 정외과 교수진이 정말 훌륭하지 않았나요.
정해구 한배호, 최상룡, 최장집, 서진영 교수님 등 좋은 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다른 학교에서도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 많이 진학했어요.
최장집 교수를 만나다
김호기 1986년 ‘10월 항쟁’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방 공간에 대해 저도 논문을 쓸 때 읽었습니다만.
정해구 처음에는 국제정치를 공부하다가 비교정치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그때 현대사 연구가 한창 붐을 이루던 시절인데, 자연스럽게 최장집 교수님으로부터 한국현대정치를 배우게 됐고, 석사 논문 주제로 ‘10월 항쟁’을 잡았어요.
김호기 곧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하신 건가요.
정해구 한 학기 쉰 다음 1988년에 들어갔어요. 졸업은 1995년에 했고요. 그리고 2000년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김호기 저는 대학원 다닐 때 비판사회학회(당시 산업사회연구회)에서 당시 대학원생이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과 함께 공부했지요. 김진균 서울대 교수께서 돌봐줬고요.
정해구 저 역시 대학원 다닐 때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역사문제연구소에 나가 공부했어요. 그러다가 정치학에서도 연구회를 만들자고 해서 1988년 전후에 한국정치연구회(한정연)를 만들었어요. 이성형, 김광식, 김창진 등 당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대학원생들이 중심이 됐지요. 활동을 하면서 이수인 교수(영남대), 손학규 민주당 대표(당시 서강대 교수), 최장집 교수 등이 돌봐주셨어요.
김호기 박사 논문은 어떤 주제로 쓰셨습니까.
정해구 남북한 분단정권 수립에 관한 것으로 썼어요. 현대사를 정치학적으로 연구하려는 관심이 계속 이어진 셈입니다.
김호기 최장집 교수께서 석사와 박사 지도교수셨지요. 지도교수에 대해 말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선생님이 보기에 어땠습니까.
정해구 최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제대로 공부했어요. 대학원에 와서 최 교수 강의를 처음 들었는데, 정말 날카로운 거예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론과 현실 모두 잘 알고 계셨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한 분들이 대개 이론적으로는 강해도 그걸 한국에 적용하는 능력은 약한데, 최 교수는 이론도 강하고 한국에 적용해 분석하는 능력도 탁월했어요. 당시 대학원 학생들과 호흡이 잘 맞아 최 교수를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김호기 그 가운데 유명한 연구자가 된 사람이 많지 않나요.
정해구 강명세 박사(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박찬표 교수(목포대), 박명림 교수(연세대), 박상훈 박사(정치발전연구소 학교장) 등이 있었어요. 지도교수는 달랐지만 김태일 교수(영남대), 고성국 박사도 함께 공부했어요.
산업화, 민주화의 기억
김호기 10대까지는 시골에서 보내신 거잖아요? 서울로 와서 유신체제에서 생활했는데, 당시 산업화 시대를 평가하신다면.
정해구 시골에 있을 때는 농업사회였어요. 전기도 안 들어와서 저녁에 캄캄하면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했어요.
김호기 저 역시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도시로 나왔는데, 아침마다 남포(램프)를 닦던 생각이 나요.
정해구 서울로 와서 급격하게 산업사회로 편입됐어요. 네온사인이 화려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됐습니다.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어요. 1987년 정대화 교수(상지대)가 부정선거 실태를 밝히겠다고 컴퓨터로 작업을 했는데, 그때 컴퓨터를 처음 봤어요. 그때가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인 것 같아요. 돌아보면 농업사회, 산업사회, 정보사회 세 단계 사회를 거쳐 살아왔어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은 변화를 겪은 거지요.
김호기 거시적으로 광복 70년을 돌아본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됩니까.
정해구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뺏긴 다음 1945년까지 식민지 시대가 계속됐어요. 외세의 침탈을 받아 몰락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70년이지요. 그리고 1945년 광복을 한 다음 압축적 근대화로 70년을 보냈어요. 분단과 전쟁, 개발독재와 민주화가 이어졌어요. 이 압축적 근대화의 70년이 다 끝나가는 것 같아요. 산업화와 민주화 동력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한계에 이른 게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호기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정부 수립,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가 지난 70년의 역사였어요.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 1945년까지가 나라를 상실해간 시간이라면, 1945년 광복부터 현재까지는 나라를 새로 세워온 시간입니다. ‘상실의 70년’에 ‘회복의 70년’이 더해지는 시점이지요.
정해구 뭔가 다른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징후가 나타난 게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인 것 같아요. 양극화가 심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게 복지국가 시대 아닌가요? 시기는 됐는데 아직 과거의 시간에 묶인 것 같아요. 과거는 끝나가는데 미래는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어려운 시대가 우리 시대인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김호기 ‘낡은 것은 사라지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게 위기’ 라고 말한 안토니오 그람시가 생각납니다. 현재는 민주화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2017년이 되면 민주화 시대 30년이 되는데, 민주화 시대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정해구 석사 논문을 쓸 때가 1987년 여름입니다. 청계천에 인쇄를 맡기고 6월 민주항쟁 현장을 쫓아다니느라 교정을 거의 못 봤어요. 그래서 석사논문에 오탈자가 많은 편이에요. 그때는 이런 흐름이 2~3년 계속되면 한국 민주주의가 엄청나게 발전하겠다고 봤어요. 서양의 민주주의도 상당히 따라잡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우울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생각한 게 적잖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특히 핵심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지체됐어요.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우리 사회가 완벽하진 않아도 비교적 평등한 사회가 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양극화, 경제적 격차가 커져왔어요. 게다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여전히 공고화하지 않아 비민주적인 일도 종종 벌어지곤 해요. 최근에는 후퇴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1987년의 폭발적인 힘은 소진됐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거꾸로 가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우울해요.
김호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제도에서 원인을 찾기도 하는데요.
정해구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정치 세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보수는 너무 과거에 매달려서 미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기득권만 고수해요. 진보가 대안 세력이라면 미래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진보 역시 계속 과거의 것을 이야기하고요. 보수와 진보 세력 모두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국민은 변화를 요구하는데도 정치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셈이죠.
정권교체 가능성 있는 정당
김호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소장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정해구 2000년대 중반에 3년 정도 맡았어요.
김호기 어떤 일을 했습니까.
정해구 가장 큰 일은 민주화운동사 3권을 기획해서 펴낸 것이에요. 민주화운동을 전체적으로 정리한 책이 없었는데, 그 작업을 한 게 기억에 남아요.
김호기 2008년 민주당 공천심사에 참여했고,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새정치위원회 간사를 맡아 안철수 후보 측과 새정치 공동선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선 후에는 민주통합당 정치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요. 선생만큼 학계에 계시면서 정당과 긴밀하게 활동하신 분도 드물어요. 이론적 연구와 현실적 개입을 병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정해구 과거에 사회운동을 한 많은 연구자가 매우 진보적이었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학자들이 민주당보다는 진보정당에 더 큰 관심을 가졌어요. 저의 경우 성향은 진보적이지만 민주통합당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권교체 때문이었어요. 진보적이면서 덜 진보적인 곳을 도와주는 것은 사실 모순이기는 해요. 하지만 현실을 감안했을 때 정권교체 가능성이 있는 정당을 도와주는 게 낫지 않으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호기 이제까지의 경험을 돌아볼 때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라고 보십니까.
정해구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은 기득권을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어요. 기득권을 잃어야 새로운 것이 나오는데 기득권이 크다보니 그걸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요. 그러다보니 과거지향적이 되고 미래지향적인 상상력이 부족해요.
반면에 새정치민주연합은 계파 문제가 핵심이에요. 계파를 중심으로 이해관계가 쪼개지다보니 당이 무엇을 할 것인지보다는 계파 이익을 얼마나 관철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집중해요. 계파 이익은 국회의원 개인의 이익과 직결돼요. 당 밖에서는 당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는데, 당 안에 들어가 보니 핵심 관심사가 정권교체에 있다기보다 자신들이 국회의원 되는 데 있더라고요. 계파가 공천을 보장해주니까 어느 계파에 서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돼버린 거죠.
김호기 국회의원의 자기 이익 챙기기는 새누리당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정해구 다른 부분이 있어요. 새누리당은 그걸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고, 새정연은 그걸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내지요.
김호기 새정연을 잘 알고 계시니까 좀 더 말씀해주시지요. 언론 환경 등 외부적 요인이 새정연에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또한 주체적 요인은 어떻게 보십니까.
정해구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은 세계적으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엔 숙명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주체적 측면에서 보면, 새정연은 당 전체로서의 지향과 가치가 불투명해요. 분할된 계파정치가 너무 강하고요. 여기에 더해 최근에 국민의 관심이 약화된 이유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는 거예요.
혁신과 승리
김호기 지방선거를 제외하면 지난 10여 년 동안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이 승리의 유일한 경험이었어요. 길게 보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제외하곤 늘 야당이기도 했고요.
정해구 계속 패배하니까 승리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승리를 못하니까 혁신할 수밖에 없는 순환이 이어졌어요. 승리하면 혁신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승리 자체가 혁신의 동력이 되니까요. 승리를 못하니까 자꾸 혁신하라는 요구를 받게 되고, 요구를 받으니까 혁신하려고는 하는데 정작 실천은 제대로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혁신과 더불어 승리의 경험을 갖는 게 중요해요. 이런 의미에서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새정연은 존립의 기로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김호기 선생님께서 만든 혁신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정해구 당에 제일 중요한 게 계파보다 당을 우선시하는 것, 다시 말해 당의 공공성이에요. 평소에 계파적 이해가 작동할 수도 있지만, 위기에 빠졌을 때 당을 위해 결집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해요. 위기에 빠져도 서로 결집하지 않고 싸우는 것은 문제지요. 새정연이 살아남으려면 그런 정당 문화를 바꿔야 해요.
김호기 세대교체는 어떻습니까. 2004년 열린우리당을 주도한 의원들이 여전히 당의 대주주로 남아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정해구 사람들이 좀 바뀌어야 해요. 세대교체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바뀌면 당의 분위기가 달라질 거예요. 새정연은 원로들 목소리가 큰 정당이에요. 앞으로 나아가려면 젊은 사람들이 나서고, 원로들은 간섭하지 않은 채 이들이 나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해요. 시행착오를 하면서 당의 모습을 새롭게 바꿔야 하는데, 지금은 원로들이 간섭하면서 말을 안 들으면 흔들어 버리는 상황입니다.
김호기 지난 몇 년간 정치개혁에 관한 논의가 진행돼왔습니다. 그 핵심으로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헌법 개정을 계속 이야기해왔어요. ‘신동아’ 8월호 인터뷰에서 강원택 교수는 내각제의 필요성을 얘기했습니다만.
정해구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정치’보다는 ‘통치’가 강한 것 같아요. 정치가 아래로부터 시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면, 통치는 권력자가 위에서 아래로 수행하는 거잖아요? 일제 식민지와 과거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영향 받은 거지요.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역대 대통령들이 과연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했느냐 하는 의문이 듭니다.
김호기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하게 거버넌스를 이야기했어요.
정해구 그게 유일한 사례일 거예요. 정치가 아닌 통치가 이뤄지다보니 국민도 정치보다는 통치를 친숙하게 느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보기에, 우리 현대사는 4월 혁명, 광주항쟁, 6월 항쟁 등 사회운동이 중요한 구실을 했어요. 문제는 이런 운동을 정당과 정치로 연결해야 하는데 그게 잘 이뤄지지 않았어요.
김호기 돌아보면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운동정치가 주연을, 제도정치는 조연을 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해구 사회운동을 제도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죠. 헌법 개정이나 정치문화 개혁으로 연결해야 했어요. 그게 잘 안되다보니 통치가 여전히 강하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된 겁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이다보니 여당이 동등한 파트너가 되지 못하고, 경찰·검찰·국정원 등 이른바 권력기관을 이용해 정치와 시민을 압박하는 통치가 지금까지 이어져요. 권력구조를 개편한다면, 제왕적 대통령의 통치 일부를 국회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의원내각제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국민에게 내각제가 낯설다면, 이원집정부제 같은 중간 단계를 거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통치’보다 ‘정치’
김호기 사회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보기에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하나가 공정한 시장경제라면, 다른 하나는 이를 유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치구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경제 못지않게 정치가 중요한 것 같아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는 1992년 미국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의 선거 슬로건이었어요. 우리 사회에선 경제 못지않게 정치가 문제 아닌가요? 정치개혁이 계속 지체되는 게 무척 안타까워요.
정해구 시장에서 경제권력이 독과점이듯 정치도 마찬가지죠. 권위주의 시대 못지않게 정치권력이 독과점이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그런 사람들끼리 공직을 나눠 먹는 상황인 셈입니다.
김호기 최근 정의당 대표 선출을 흥미롭게 봤어요. 젊은 조성주 후보에 관한 칼럼을 쓰기도 했고요. 새정연보다 왼쪽에 진보정당이 있는 게 한국 정치를 건강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정당이 약진한 게 2004년 총선인데,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세대교체라는 것은 진보정당에도 필요한 것 아닐까요.
정해구 새정연 내 계파처럼 진보정당에도 정파가 있어요. 다만 이익이 크지 않으니 가치와 노선이 중시돼요. 진보정당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정파들이 존재해요. 제가 보기에 진보정당 운동의 제1세대 역할, 첫 번째 사이클이 서서히 끝나가는 것 같아요. 이번 조성주 후보의 등장은 제2세대의 단초, 다시 말해 두 번째 사이클의 출발로 평가해야 할 것 같아요. 당장 조성주 씨와 같은 이들이 진보정당의 당권을 잡아야 한다기보다는 그 출발이 중요하다는 데 주목해야겠지요.
김호기 정치학자로서 새누리당과 새정연에 충고 하나씩 해주시지요.
정해구 새누리당의 ‘유승민 사태’를 면밀히 지켜봤어요. 유승민 의원은 과거의 전통적인 보수에서 벗어나서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아요. 그런데 대통령이 압력을 넣어 찍어낸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삼권분립 제도를 갖춘 나라에서 말이에요. 미국식으로 말하면,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 원내총무를 몰아내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보수 진영에 유승민 같은 정치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봐요.
새정연은 일종의 유럽 봉건체제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자영업자들의 모임’이라고 말하는데, 전근대성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을 갖추면 좋겠어요.
노무현, 손학규, 문재인
김호기 노무현 정부에선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손학규 대표 시절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문재인 후보의 새정치위원회 간사를 맡아 정치개혁안을 주도했고요. 가까이서 지켜본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정해구 세 분 다 과거 정치인들과 다르게 ‘나이스’ 해요. 과거 정치인들처럼 정치를 하지 않았어요. 사실 우리 정치는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해야 바뀔 수 있어요.
손학규 대표는 조금 다르지만, 문재인 대표는 정치적 훈련을 좀 더 받으면 좋겠어요. 정치 능력을 잘 기르면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는 분이에요. 노무현 대통령은 강력한 장점과 단점 둘 다 있었지요. 능력이 탁월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손해를 보는 스타일이었어요. 좋은 리더는 절로 나타나지 않아요. 자질이 키워질 수 있는 기다림이 필요한 것 같아요.
김호기 올해가 환갑이니 정년이 이제 5년 남았습니다. 성공회대가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인 진보 대학인데, 어떻게 지내셨어요?
정해구 교수가 대학과 잘 안 맞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너무 잘 맞아서 상당히 편하게 지냈어요. 가끔은 학교가 더 편할 때도 있어요. 교수는 학문 연구에 주력해야 하는데, 저는 현실과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한 것 같기도 해요. 어떤 면에선 전형적인 폴리페서였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게 꼭 부끄럽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정치학 연구자로서 시대적 구속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김호기 앞으로 어떤 연구 계획이 있습니다.
정해구 사회참여를 좀 줄이고 글 쓰는 데 시간을 많이 내려 해요. 정년 후에도 계속 학문적 연구를 하고 싶어요.
김호기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요.
정해구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요. 하나는 일제 패망 후부터 6·25전쟁까지의 광복 8년에 관한 객관적인 책을 쓰는 거예요. 다른 하나는 민주화운동사예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운동 주체의 헌신성과 평화적 태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의 심층적 기반을 비교정치적 시각에서 다뤄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는 우리 민주주의의 정착 문제예요. 민주화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이론과 현실 간의 긴장에 주목하면서 앞으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안착시킬 것인지에 대해 쓰고 싶어요.
김호기 제가 선생님을 가까이 지켜본 후배 중 한 사람인데, 그동안 정말 연구와 일을 많이 하셨어요.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지요.
정해구 두 가지예요. 하나는 미술사를 공부해보고 싶어요. 미술에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다른 하나는 동료·후배들하고 여행을 좀 다니고 싶어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너무 재미없게 지낸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