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流 돌풍은 철저한 경영마인드에 입각한 마케팅 전략의 승리다. 무작정 중국 진출 → 실패 → 실패 원인 연구 → 시장 분석 → 틈새시장 파악 → 시장 선점 전략 전개 →전방위 마케팅과 소비자 관리→ 사업 다각화 및 수익기반 확대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비즈니스 요소들이 적시에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간 결과다.
전국 네트워크를 이용해 중국 정부나 공산당의 선전·계몽 프로그램을 주로 내보내던 중앙인민방송이 외국음악, 그것도 한국가요를 전문으로 소개하는 정규 프로그램을 편성한 것부터가 파격적이다. 중국도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구조조정 바람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 중앙인민방송도 최근 경영노선을 수정, 광고방송을 시작하는 등 수익사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런 속사정 때문에 이제는 청취율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중앙인민방송이 지금 한창 중국대륙을 달구고 있는 한류(韓流) 열풍에 편승하기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전략적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앙인민방송과 손잡고 이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제작하는 사람이 우전소프트(宇田SOFT) 김윤호(金允皓·42) 사장이다. 김사장은 중국에 한류의 불씨를 지핀 인물. 1998년 5월, 중국 최초의 한국가요 음반인 H.O.T 앨범을 내놓으며 충격적인 중국상륙작전을 감행한 이래 한국가수 음반 50여 종을 펴내고 이들의 중국 공연을 유치하면서 중국 청소년들을 ‘합한족(哈韓族·한국 마니아)’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래서 중국 언론은 그의 이름 앞에 ‘합한왕(哈韓王)’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우전소프트는 김사장이 중국 내 음반 발행, 콘서트·이벤트 기획, 방송활동 등을 위해 베이징에 설립한 회사.
‘한류(韓流)’라는 말도 김사장이 음반 홍보용 포스터에 처음 쓴 단어로, ‘한국의 유행음악’이라는 뜻이다. ‘한류(寒流)처럼 강하게 중국팬들에게 다가서라’는 바람에서 쓴 말이었는데, 이제는 중국 언론과 음악계에서 일반명사처럼 쓰인다.
우전소프트가 중국에서 발행한 음반은 앨범당 대개 10만장 넘게 팔렸다. 히트 음반의 경우 불법 복제음반 유통량이 정판의 20∼30배에 달하는 중국 음반계의 실정을 감안하면 실제 판매고는 200만∼300만장에 이른다는 얘기다. ‘한류기지(韓流基地)’라는 이름의 우전소프트 홈페이지는 하루 페이지뷰가 30만∼40만건에 달한다. 김사장도 밤이나 주말에는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게 쉽지 않을 정도다. 우전소프트 사무실에는 매주 1000여 통씩 날아드는 팬레터가 더미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 한국 가수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들인데, “김선생 덕분에 한국음악을 알게 되어 고맙다”는 격려편지도 적지 않다.
첫 음반을 낸 지 3년 만에 이만한 열기가 조성됐으니 김윤호 사장은 운이 억세게 좋다고 할 수도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우연히 바람을 만나 삽시간에 요원의 불길로 번져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사장의 한류 열풍은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에 입각한 경영전략과 마케팅의 개가(凱歌)다. 무작정 중국 진출→실패→실패원인 연구→시장분석→틈새시장 파악→초기 시장선점(先占)전략 전개→전방위 마케팅과 소비자 관리→사업 다각화 및 수익기반 확대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비즈니스 요소들이 적절한 시기에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간 결과다. 그 과정에 ‘수업료’도 적지 않게 치렀다.
배수진, 그러나 참담한 실패
김사장은 중국에 가기 전까지는 음반회사나 기획사 같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그는 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를 나와 S투자증권에서 10년간 근무한 증권맨 출신이다. 한때는 증권붐을 타고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지만, 그는 늘 ‘뭔가 재미있는 일’을 꿈꾸며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늘 결과로만 평가받는 게 속상했어요. 증권사 일이란 게 그렇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안 좋으면 욕만 얻어먹고, 그저 운이 좋아서 주가가 올라도 돈만 벌어주면 좋은 평가를 받거든요.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간 노력은 노력대로 하고도 사람까지 잃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업 관계로 중국을 드나들던 처남이 우연한 기회에 베이징의 한 FM 방송국(北京音樂台) 관계자를 만나 매주 1시간씩 한국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공급하기로 계약했다. 처남은 김사장에게 이 사업을 해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방송국은 방송시간만 임대해주고, 방송원고 작성과 선곡, 음반 준비는 이쪽에서 맡는 조건이었는데, 학창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한 김사장에겐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거대한 중국시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그는 당장 사표부터 냈다. 회사에선 “아이템도 신통찮은데 그 나이에 무슨 생각으로 그러느냐”며 “정 가겠다면 휴직하고 왔다 갔다 하라”고 말렸지만,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결국 손들고 돌아오게 될 것 같아 퇴사를 고집했다. 아예 귀국할 엄두가 나지 않도록 전재산을 처분하고 베이징에 집부터 샀다. 처음부터 아내와 두 아이를 다 데리고 서울을 뜬 것도 나름의 배수진이었다.
그는 1996년 3월부터 꼬박 1년간 ‘서울음악실(漢城音樂廳)’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다. 비록 베이징 한 도시에서만 들을 수 있었지만, 한국음악 프로그램이 중국의 공중파로 방송된 것은 처음인 만큼 그 의미는 남달랐다. 원고를 쓰고 곡을 고르는 것도 적성에 맞았다. 중국 청취자들의 관심도 조금씩 높아졌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처음에 그는 전파 임대료와 프로그램 제작비, 인건비 등으로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하면서도 사업을 낙관했다. 프로그램 1회당 5분의 광고시간이 할당됐는데, 중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이 기꺼이 광고 스폰서가 돼줄 것으로 기대한것이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기대는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베이징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 기업과 접촉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값이 비싸도 TV 광고나 옥외 광고판처럼 광고효과가 높은 매체에만 관심을 보였다. 광고수입에 100% 의존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광고를 하나도 유치하지 못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1년 동안 수입은 한푼도 없이 서울에서 가져온 돈만 바닥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저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김사장은 그런 실패를 통해 ‘재무장’의 각오를 다졌다. 어쩌면 돈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알량한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한국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극적인 전략으로는 사업을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겠다면 현지화한 비즈니스로 인민폐(人民幣)를 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한번 듣고 날려보내는 방송 외에 무언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건’이 필요할 것 같더군요. 중국 땅에서 한국음악 붐을 일으키고 한국 스타를 키워 이들을 기반으로 음반사업, 콘서트, 이벤트 같은 다양한 비즈니스를 펼쳐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돈은 못 벌었지만 1년 동안 성실하게 방송을 진행하면서 중국 음악팬들의 취향을 분석한 것도 큰 자산이 됐다. 그는 1960년대 ‘뽕짝’에서부터 발라드, 댄스뮤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유행음악을 소개하면서 중국인들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폈고, 이 과정이 중국에서 한국음악을 뿌리내리게 하는 자양분이 됐다. 궁리 끝에 그는 한국의 댄스뮤직으로 중국의 틈새시장을 파고들기로 했다.
“당시 중국 대중음악계는 홍콩과 대만의 발라드풍 노래가 주류를 이뤘어요. 한국에도 좋은 발라드 노래가 많았지만, 한국 음악을 처음 소개하는 단계에서 발라드 노래를 갖고 뛰어들면 차별화를 기하기 어렵겠더군요. 더구나 발라드 곡은 가사의 의미가 웬만큼 전달돼야 팬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홍콩, 대만 가수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10대 위주의 댄스뮤직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이 분야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확실한 강세를 보이고 있었어요.”
방송을 통해 접해본 중국 청소년들도 발랄한 댄스뮤직을 무리없이 받아들일 것으로 파악됐다. 어떻게 보면 간절히 원하고 있는 듯했다. 정부의 산아제한정책 탓에 대부분 독자(獨子)인 중국 청소년들은 부모의 지나친 기대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가정과 학교에서 입시공부 때문에 쌓이는 스트레스가 한국 청소년 못지않았다.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마당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홍콩, 대만 가수들에 비해 비주얼한 요소가 강한 한국 댄스뮤직 가수들은 그런 면에서 먹혀들 법했다.
우선 한국의 음반사들을 찾아다니며 중국 판권을 얻어냈다. 국내 음반사들은 중국 음반시장에 큰 기대를 걸진 않았지만, 별도의 투자 없이 마스터 음반과 홍보자료만 챙겨주면 됐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김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중국에서 음반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중국에서는 국영 음반회사에서만 음반을 낼 수 있는데, 그가 CD 몇 장을 들고 뛰어다니며 접촉한 대형 국영 음반사들은 “중국인들은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음반을 발행하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어 판매가 부진할 것”이라며 한결같이 난색을 보였다. 특히 그가 첫 음반으로 결정한 H.O.T의 댄스뮤직이 그들에겐 영 낯설게만 여겨졌다.
김사장은 중국 최대의 음반회사인 상하이셩샹(上海聲像)출판사를 거의 반 년 동안 집중 공략했다. 처음엔 베이징지사의 말단직원을 만나 설득하고, 그를 통해 베이징지사장과 안면을 튼 뒤 마침내 상하이 본사 사장과 마주앉을 수 있었다. 한 보따리의 음반을 풀어놓고 “홍보는 내가 책임질 테니 한·중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자”며 무작정 매달렸다. 상하이에 다녀온 지 보름 후 발행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회의를 거듭한 끝에 H.O.T 음반을 발행하기로 했다. 수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김선생의 열정에 감동해 내린 결정이다”고 했다. 한류의 ‘씨앗’이 뿌려진 날이었다.
H.O.T 신드롬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즉각 홍보전에 돌입했다.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 음악잡지와 신문을 발행부수 순으로 리스트업한 후 기자들을 찾아다녔다. 사진과 음반, 보도자료를 지겨워할 정도로 챙겨줬다. 처음엔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 대접을 했지만 밑천이 간들간들해지자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밥을 해먹였다. 나중엔 그의 주머니 사정을 알게 된 기자들이 먼저 음식점 초대를 사양하고 “김선생댁 김치가 맛있던데, 그거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1998년 5월17일 마침내 H.O.T 음반이 중국시장에 출시됐다. 사상 최초로 한국 음반이 중국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고 중국 땅에서 발행된 것이다. 그의 각개전투식 홍보전은 음반이 나온 후에도 계속됐다. 온종일 베이징 시내의 음반 매장을 돌며 H.O.T 음반을 틀어달라고, 포스터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달라고 사정했다. 어느 거리에든 잠시라도 차를 세워둘 때는 H.O.T 음반을 크게 틀고 차창을 죄다 열어놓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H.O.T의 노래를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첫 작품인 H.O.T 음반 판매가 시원찮으면 중국에서 다시 음반을 낼 생각은 접어야 할 게 뻔했다. 그로서는 발품을 아낄 처지가 아니었다.
당초 상하이셩샹측은 H.O.T 음반이 잘해야 5000장쯤 팔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도 너무나 열성적인 김사장이 안쓰러웠던지 “많이 안 팔리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이번에 실패해도 우리는 계속 당신을 돕겠다”며 지레 위로해줄 정도였다.
하지만 출시한 지 겨우 한 달 만에 판매고가 5만장을 넘어서자 이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무렵부터는 H.O.T를 홍보하는 자원봉사대가 가동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음반을 들어본 10대들이 입에서 입으로 ‘H.O.T 예찬’을 전하면서 판매고가 수직 상승한 것. 거리에는 H.O.T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중국 음반업계엔 비상이 걸렸다. 대형 음반회사 간부들이 속속 우전소프트를 방문, ‘후속타’를 청했다. 그 결과 H.O.T 음반 출시 한 달 후인 1998년 6월 클론의 ‘쿵따리샤바라’가 2호 음반으로 선보인 데 이어 구피 박미경 NRG 김현정 유승준 안재욱 베이비복스 등 50여 종의 음반이 한 달이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3년 전만 해도 그토록 냉담했던 중국 음반사들이 요즘은 김윤호 사장이 서울 출장을 다녀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이번엔 뭐 좋은 거 안 들고 왔어요?”하며 물어온다.
지난해 2월1일 베이징 공인체육관에서 열린 H.O.T 콘서트는 한류의 열기를 실감케 했다. 1만2000명을 수용하는 대형 체육관인데다, 티켓값이 최하 80위안(1만2000원)에서 최고 1000위안(15만원)으로 중국 청소년들에겐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어서 누구도 결과를 낙관할 수 없었다. 음반이 많이 팔렸다고 해서 그 구매력이 콘서트로 직결되진 않는 것이다. 일부 입장권의 매표업무를 맡은 국영 이벤트회사 간부들은 티켓 매진을 자신하는 김사장에게 “공인체육관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며 박장대소했다.
그러나 공연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그들은 웃음을 거둬야 했다. 자신들에게 배분된 티켓으로는 예약 물량도 충족시킬 수 없어 김사장에게 티켓을 더 달라고 사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콘서트는 폭발적이었다. 중국 청소년들은 100분 동안 목이 터져라 H.O.T를 연호하며 흥분했고, 기성세대는 아들, 딸들의 눈물과 함성을 보고 들으며 경악했다. 베이징의 신문들은 ‘H.O.T, 공인체육관 불사르다’는 제목을 내걸고 대서특필했다. 그 후 베이징과 상하이의 대형 체육관에서 연 NRG, 베이비복스 등의 콘서트도 성황을 이뤘다.
중국에서 50만부 이상 팔리는 음악잡지 ‘땅다이꺼탄(當代歌壇)’, ‘칭춘즈싱(靑春之星)’ 등이 독자 투표로 선정하는 ‘해외 가수 톱10’에선 한국 가수 5∼6명이 1위부터 상위권을 독식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 같은 톱스타들은 이들에게 밀려나 8∼9위권에 겨우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한때는 김사장이 기자들을 쫓아다니며 사정해도 이런 잡지에 한국 가수들의 흑백사진 하나 싣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컬러사진이 나오는 경우는 허다하고, 표지모델로도 자주 실린다. 이런 잡지들은 표지를 누구로 하느냐에 따라 판매량이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젠 김사장이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장사가 된다’고 판단해 한국 가수들을 경쟁적으로 표지에 올리는 것이다.
베이징, 상하이 등 일부 도시에 집중됐던 한국음악 열기도 중국 전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가령 광둥(廣東)성은 최근까지도 한류의 취약지역이었다. 홍콩과 가까워 홍콩 TV를 안방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홍콩 연예인들의 아성이었던 것. 그런데 요즘은 이 지역에서도 한국 가수들이 인기순위 1, 2위를 다투면서 이들의 사진과 보도자료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 베이징에서 한국 가수의 공연이 열리면 광둥성에서 세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보러 오는 팬들도 많다.
김사장은 “아직 큰돈을 만져보진 못했다”고 한다. 중국 음반시장에 해적판이 워낙 많이 유통되는데다, 카세트 테이프와 CD의 판매비율이 98 대 2 수준이라 수익성이 낮고, 인세도 한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시장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고, WTO(국제무역기구) 가입 등으로 국제화가 가속화되면 불법 복제음반도 줄어들 것이므로 전망은 밝다고 한다. 최근 홍콩, 대만 가수들의 음반 매출액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데 비해 한국 가수들의 음반시장 점유율은 약진을 거듭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김사장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수출하는 것은 그저 음반 몇 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을 수출하고 있어요. 중국 청소년들이 보내오는 편지 중 상당수가 한글로 쓰여 있습니다. 한국산 편지지와 카드도 수두룩해요. 이들은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 ‘한국으로 유학 가고 싶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김대중 총통 만세’ 같은 글귀도 심심찮게 눈에 띄죠. 배낭에 한국가수의 사진이 찍힌 액세서리 버튼을 10여 개씩 달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아요. 심지어 태극기 버튼을 단 경우도 있어요. 왜 태극기를 달았느냐고 물었더니 ‘멋있잖아요’라고 되묻더군요.
아이들은 힙합바지와 힙합춤을 ‘한국바지’, ‘한국춤’이라고 부릅니다. 사실은 힙합문화란 게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 아닙니까. 하지만 원조(元祖)는 미국이라도 우리가 잘 가공하고 포장해서 수출하면 우리 것이 되는 거죠. 이런 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소득입니다. 일각에선 한류가 일시적인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베이징의 한국대사관 문화원 강당은 중국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김윤호 사장이 직접 강의하는 한글노래교실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미 한글을 뗀 수강생들은 매주 우리 가요 한 곡을 따라 익히면서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 가수가 중국을 방문해 강사로 나서기도 한다. “한국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 우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는 합한족들의 끈질긴 요구에 김사장은 금쪽 같은 휴일(중국은 주 5일 근무)을 이들에게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고효율 마케팅
한류가 급물살을 탄 데는 한국음악의 대(對)중국 통로를 일원화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에서는 1980년대 한때 일본음악 붐이 일었다. 당시 몇몇 일본 가수가 중국 진출을 시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철수했다. 일본의 음반사와 기획사들이 개별적으로 들어가 산만한 마케팅을 하는 바람에 차별성을 띠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 가수들은 우전소프트라는 하나의 창구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한국에서 상품성이 검증된 가수와 음악을 순차적으로 들여옴으로써 마케팅의 집중력과 효율을 높였던 것이다. 김사장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은 인적 자원이라고 보고 가수들에 대한 끊임없는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중국 청소년들의 친근한 우상으로 만들어갔다.
이들에게 왜 한국 가수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서양 가수는 이질적이지만, 한국 가수는 우리와 여러모로 비슷해 친근감이 든다”고 답한다. 일본 가수에겐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느냐고 물으면 “일본 가수들도 노래는 잘하지만 외양과 춤, 음악 스타일이 너무 인위적이다. 한국 가수들은 세련되면서도 왠지 옆집 오빠, 언니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똑같이 따라하고 싶다”고 한다. “이름도 중국인처럼 두 자 아니면 석 자이고, 중국인과 같은 성(姓)을 쓰는 가수도 많아 남 같지가 않다”고도 한다.
가수와 더불어 한국 가요의 우수성을 알리는 전략도 폈다. 우전소프트는 ‘청춘 미소녀대’라는 5인조 중국 소녀 그룹을 조직, 이들에게 박미경, 김건모, 콜라 등의 가요를 번안해 부르게 했다. 1998년 9월에 나온 이들의 음반은 수록된 10곡 중 9곡이 한국 가요였을 뿐 아니라 반주와 믹싱, 마스터링까지 서울에서 작업했다. 목소리만 빼고는 모두 한국산인 이 음반이 15만장이나 팔려나가 한국가요의 ‘품질’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한류가 일방적인 ‘문화침투’가 아니라 ‘문화교류’의 물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김사장은 지난 8월 베이징 중심가에 한국 연예인들의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팬시점을 열었다. 전시된 상품의 95%는 한국에서 들여왔고, 하루종일 한국 노래만 틀어놓는다. 벽면은 한국 가수들의 사진으로 ‘도배’돼 있다.
내년부터는 이 매장을 중국 전역에 프랜차이즈화할 계획이다. 한류 비즈니스를 다각화·광역화해 새로운 수익기반을 창출하려는 첫 시도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매장에 한류 팬클럽 센터 기능을 맡기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다.
우전소프트가 베이징에서 콘서트와 한글노래교실을 열자 지방 팬들로부터 “베이징 팬만 팬이냐”는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렇다고 전국에 우전소프트 지사를 열 수도 없는 노릇이니 팬시점 프랜차이즈를 통해 전국적인 비즈니스와 팬 관리를 함께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김사장은 “이제 베이징은 내버려둬도 저절로 굴러간다. 파종을 마친 한류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위한 관건은 광역화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속은 빠르게, 겉은 느리게
김사장은 “한류 비즈니스가 유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고 경계했다. 한류의 겉모습만 보고 ‘식기 전에 빨리 해먹자’고 달려드는 것은 위험천만이라는 것이다.
“한국 스타가 중국에 올 때 많은 팬들이 공항과 호텔까지 달려나와 열광하는 것은 주최측이 유도한 겁니다. 게다가 이런 팬들은 극소수의 마니아들이에요. 한국 가수가 기자회견을 하면 30분도 지나지 않아 회견장 밖에서 스냅사진을 만들어 파는데, 한 장에 우리 돈으로 7000원이 넘는 사진이 불티나게 팔려요. 이런 광경을 보면 ‘이거 정말 돈 되겠다’ 싶겠지만, 그런 사진을 사는 이들도 일부 마니아에 불과해요.
중국은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우전소프트 정도의 명성이면 한국에서 거액의 투자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런 돈이 있어도 쓸 데가 없어요. 중국은 물량공세로 승부를 보는 곳이 아닙니다. 물량공세로 될 것 같으면 미국이나 일본이 왜 풀 베팅을 하면서 덤벼들지 않겠습니까.”
그는 “안에서는 중국인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생각하고 일하되, 밖에서는 ‘만만디 중국인’보다 템포를 더 느리게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상대방이 너무 앞서나가면 중국인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중국인들이 먼저 몸이 달아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정부가 중국에 ‘한류 체험관’을 만들고 국내 연예인들의 중국 공연을 지원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은 것도 김사장에겐 적잖이 걱정되는 대목이다.
“중국은 다른 민족의 문화에 대해 퍽 개방적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주변 문화를 흡수해 자기화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유입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반드시 제동을 겁니다. 홍콩과 대만 가수들이 중국에서 너무 뜨니까 어느날 갑자기 ‘홍콩, 대만 가수는 한 사람이 1년에 한 번밖에 중국에 올 수 없다’는 규제를 만들었어요. ‘대륙의 문화 발전을 위해’라는 명분을 내걸면 못할 게 없는 거죠. 우리도 조심해야 해요. 한류도 가뜩이나 속도가 빨랐는데, 우리 정부까지 나선다고 하면….”
그와 절친한 중국 국영 이벤트회사 간부들에 따르면 올 들어서만 수십 명의 한국 이벤트회사 직원들이 한국 가수의 중국 공연을 위해 접근해 왔다고 한다. 그들이 김사장에게 “제발 좀 자제시켜라. 그러다간 너희에게도 쿼터가 생긴다”고 걱정해줄 정도였다. 김사장은 올해 예정했던 두세 차례의 공연을 무기 연기했다.
“지금은 한국 대중문화의 콘텐츠 퀄리티가 중국보다 분명히 우위에 있습니다. 이 우위를 지켜가야 해요. H.O.T와 NRG가 군대 가고 나이 들면 그 뒤를 이을 스타를 발굴해 키워야 합니다. 이건 한국에서 할 일이에요. 제 일은 한국에서 찾아내 키운 스타를 중국에 데려와 상품화하는 거니까요.
정부가 한류를 지원하겠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정작 정부가 해줘야 할 일은 이런 스타들이 국내외에서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고 우수한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마당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한류의 영향으로 요즘 중국에선 토종 댄스뮤직 가수들이 부상하고 있어요. 이들은 계속 성장하는데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한다면 ‘역(逆)한류’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라면서 말을 이었다.
“한류 팬들은 대개 ‘오빠부대’들입니다. 한국의 남자 댄스뮤직 가수들에게 열광하죠.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병역 미필자들입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갈 때는 단수여권이 나오기 때문에 중국에 홍보차 한 번 다녀가면 여권이 폐기됩니다. 다시 중국에 오려면 병무청과 문화부를 뛰어다니고 새 여권과 비자를 받느라 열흘씩 걸려요. 그러니 자주 부를 수가 없죠. 대수롭지 않아 보이겠지만 우리한테는 아주 답답한 일이에요. 이런 편의나 좀 ‘지원’해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