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테연구가 박찬기 교수.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라는 괴테의 아포리즘에 천착해 살아가는 그의 삶은 엄격하고 열정적이다.
마감시간에 대기 위해선 오늘만은 인터뷰를 성사시켜야 하는데 주인공은 행방이 묘연하다. 그의 하와이 여행 일정 때문에 인터뷰 일정이 미뤄지고, 귀국하자마자 약속한 미팅시간이 또 버그러졌다. 일부러 골탕을 먹이나,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지만 아직 그가 골탕을 먹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필자는 박찬기 교수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초급독일어’란 책의 저자가 박찬기 교수였는데 그가 지은 참고서로 공부한 결과였는지 고1 독일어 중간고사에서 100점 만점을 받은 것이다.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그 후의 ‘씁쓸한 사건’ 때문이다. 독일어 교사가 100점 만점자인 필자를 호명하며 “잘했다”고 했을 때 필자는 “커닝했어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반에서 우스운 행동이나 엉뚱한 화제로 관심을 끌어보려는 이상한 취미를 갖고 있던 그 시절, 필자의 엉뚱한 대답이 나오자 그릇 깨지는 듯한 급우들의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예 화가 났던지 독일어 교사는 필자의 성적을 50점으로 감점해버렸다. K시의 한 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아버지의 주선으로 M시의 고교에 뒤늦게 입학한 필자에게 이 같은 평가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K시의 학교로 전학을 간 쓰라린 기억이 있다. 이런 추억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박교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과자봉지가 굴러다니는 연구실
궁금하던 차에 슬며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방은 연구실이 아니라 흡사 마귀들이 놀다 간 자리인 양 지저분하고 너저분하다. 소문대로 그의 괴팍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후에 이야기를 나눈 그의 운전기사 설명으로는 그나마 손님이 오고, 사진도 찍는다면서 교수님과 함께 아침에 이것저것 치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실내는 철없는 아이들이 실컷 장난을 하고 나간 뒷자리처럼 뒤죽박죽이다.
컴퓨터 단말기 세 대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소파에는 신문, 잡지, 과자부스러기가 내팽개쳐져 있다. 고장난 듯한 TV 수상기가 책더미 속에 잠자고 있고, 읽다가 내버려둔 듯한 ‘로마인이야기’ ‘이피게니에 스텔라’ ‘윈도 95 컴퓨터 가이드’ ‘괴테 연구’ ‘독일문학사’ 등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널려 있다.
집무책상인 듯한 자리는 더 난장판이다. 두루말이 화장지와 일회용 화장지, 마른 쓰레기가 친구처럼 엉겨 있고, 의자 곁엔 양파링 인디안밥 GOD섹시 양갱 양파깡 봉지가 굴러다니듯 널려 있다. 먹다 남은 양파깡이나 맛동산 에이스 봉지는 고무밴드로 단단히 묶여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공기가 들어가면 과자가 축축해져 본 맛이 없어지므로 먹다 남은 과자는 이처럼 고무밴드로 단단히 묶어둔다고 한다.
주인 없는 사무실, 그것도 냉방이 되지 않아 땀이 비오듯 하는 곳에 계속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보았다. 바로 옆, 책상에서 수신신호가 요란하게 났다. 휴대폰을 두고 외출을 한 것이다. 집으로 연락을 해보았다. 그의 부인은 “낮 12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면서 기다리다 안 오니 볼 일 보러 나가신 것 같다”며 “그 양반이 나이가 드니 건망증이 생겨서 그렇게 착각을 한다”고 대신 위로해주었다. 운전기사를 보낼 테니 함께 찾아보라는 말대로 잠시 후 50대 초반의 순박한 중년남자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가 여러 차례 오고, 휴대폰도 수시로 울렸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전화를 대신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버려두어야 해요. 교수님은 남이 손대는 것을 싫어하세요. 그래서 비닐종이 한 장도 손대지 않아요. 이렇게 너저분해도 교수님은 휴지조각 하나도 위치를 다 아세요. 그리고 이런 분위기라야 일을 하실 수 있대요. 이런 혼란스런 분위기라야 글도 잘 쓸 수 있다는 것이죠.”
좀 우습지 않으냐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이다. 실내와 복도를 오가며 40분쯤 기다렸을까 꾀죄죄하나 기품 있는 노인이 터벅터벅 들어왔다. 바로 박찬기 교수다. 서울대에서 10년, 고려대에서 33년간 재직하다 1994년 정년퇴임한 뒤 컴퓨터와 괴테 연구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다.
“12시 반에 온다고 하지 않았소. 안 와서 시장을 보아왔지.”
그의 손에는 봉지가 하나 들려 있는데 과일과 과자를 좀 사왔다는 것이다. 일본 주간지 ‘주간신조’와 신문이 깔려 있는 소파에 털썩 앉자마자 그는 웃옷을 벗고 ‘메리야스’ 차림을 했다. 그리고 바지 벨트를 풀었는데 지퍼도 반쯤 내려와 바지 속의 하얀 팬티가 훤히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선입견 때문일까, 그런 그의 모습이 추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소파 옆에 ‘청룡회보’라는 제호가 붓글씨로 여섯 장 씌어 있다. 아마도 회보의 제호를 써놓고 그중 좋은 것을 고를 참인 것으로 보였다.
“청룡회보는 1960년대 월남에 파병했던 청룡부대 회보를 말합니까?”
묻기를 잘했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우리 집안 회보요. 반남 박씨 중 우리 직계 가족 102명의 정보를 담아주는 가족회보인 셈이지요. 형님(박찬웅 전 연세대 교수·법철학)이 연로하셔서 내가 대신 맡아 만들고 있는데 제호를 바꿀 요량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 증조부는 강원도 철원 분이시고 과거 급제를 하셨어요. 그리고 조부(박승빈 대한제국 검사·변호사·보성전문 교장)는 일본 중앙대 출신으로 대한제국 국비장학생으로 일본 중앙대에서 공부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분입니다.”
그는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으며, 손님에게 차 한잔 대접하는 시간도 아끼는 듯했다. 그래서 물 한 모금 서로 마시지 않고, 널려 있는 과자 부스러기 하나 입에 대지 못하고 얘기를 진행했다. 그러나 그의 얘기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것은 진실성이랄까 진지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건망증 때문에 문 잠그고 다니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여기서 가져갈 것이 무엇이있소. 책 나부랭이야 휴지로도 못 쓸 것이고, 컴퓨터를 가지고 간대야 무거워서 짐만 되지.”
-하루 일과 중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우면산으로 등산을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니지. 우리 집안 내력을 좀더 알아야지. 그것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요.”
그는 한사코 가문 얘기에서 빠져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 듯했다.
“회보의 자료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재미는 정사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안은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어요. 그래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부를 때 모두 경칭을 쓰지요. 어머니도 나를 부를 때 ‘찬기씨’ 했지. 이것은 조부가 계명구락부를 창설하면서 내린 지침이에요. 아이들을 학대하지 말라. 애들도 인격이 있나니, 그들을 누르니 노예가 된다는 취지였어요. 우리가 일본의 노예가 되고 말았는데 독립만 해서 뭘 하나, 내적으로 독립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뜻에서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몽양 여운형의 조카
그리고 외숙부가 몽양 여운형이라고 소개했다. 모친은 여윤숙.
“해방정국에서 영국과 소련은 한국의 대통령으로 여운형을 꼽았고 미국은 이승만을 꼽았지요. 김구는 없었어요. 김구는 여운형을 제거했고, 이승만은 김구를 쳤지요.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단합과 화해보다 분열과 대립의 추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이것이 우리 정치에 그대로 오염돼버렸어요. 몽양과 그 동생인 여운홍(제헌의원) 외숙부는 내 조부를 스승으로 꿈을 키웠어요. 그리고 몽양은 절대로 공산주의자나 소련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우리 현대사는 바로 ‘레드 콤플렉스’가 지배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몽양의 딸이 북한에서 대표적 여성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는 귀띔을 했다. 대답이 큰 목소리로 돌아왔다.
“반공논리 냉전주의가 지금은 상당 부분 완화됐지만 사실 순수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휴머니즘이에요. 나는 독일문학을 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잘 압니다. 그의 일관된 사상은 인도주의예요. 그것이 볼셰비키 혁명 때 왜곡됐을 뿐이죠. 돈 많은 사람을 죄악시하면서, 그중에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사람도 있는데 이들을 죄악시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신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로 넘어오면서 동지도 죽이는 비정한 권력수단으로 전락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가 오히려 휴머니즘을 말살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독재는 구분되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해방공간 이후 좌우 대결을 통해 서로 정치적·정략적으로 이용했지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선 감정을 배제해야 하는데, 정치적 폭풍에 휘말려 마르크스주의를 정적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악용해 왔던 것입니다. 학계는 이 점을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그는 형 박찬웅 교수가 전두환 정권 시절, 반독재투쟁을 한 일화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이 박찬웅 교수를 총리로 옹립하려고 했을 때 거절한 일화도 소개해주었다.
-교수님의 삶의 자세랄까, 궤적이 특이하다고 들었는데, 그 점에 관해 설명을 해주시죠.
“언제나 나는 새벽 2시에 일어납니다. 예술의 전당 뒤편에 있는 우면산으로 등산을 가서 반드시 정상까지 올라갔다 와요.”
“정상은 몇 미터나 되죠?”
“모르겠어요. 다만 성한 젊은이도 단번에 올라가기에 벅찬 산이에요. 논현동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가는데 할증료가 붙기 때문에 3000~4000원 나올 것이 5000원 정도 나와요. 그 시간에도 벌써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아예 산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아니지. 일찍 나온 사람들은 나 같은 노인들이야. 잠이 없는 사람들이지. 이 신새벽 모두들 잠자고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두렵게 하고 또 어떤 책임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는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운동시설을 이용해 여덟 가지 운동을 한다. 역기 철봉 덤블링 평행봉 등등. 그중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10분 정도 한다. 규칙과 절제와 질서를 중요시하는 ‘독일학도’답게 시계를 들여다보며 단 1초도 틀리지 않게 10분을 채우고 철봉에서 내려온다. 처음에는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은 이를 하지 않으면 하루 일과가 버그러질 정도다. 신체의 어딘가가 고장난 것 같고 허전하다.
산에서 두 시간 가량 보내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시간은 오전 4시30분. 칸트의 산책처럼 1994년 퇴직 이후 한번도 이를 거른 적은 없다. 그는 최근 휴대폰을 하나 구입했다. 그러나 하루에 단 한 번 전화를 거는 게 전부다. 단 한 차례 거는 전화는 사무실 경비원을 잠에서 깨우기 위해서다.
“어느 때는 10분 이상 문을 두들겨도 열어주지 않아요. 그 사람이 내가 미워서라기보다 미욱하게도 잠이 많아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휴대폰을 구입해 전화를 하지요. 처음엔 이런 아이디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더니 지금은 이해하고 곧바로 문을 열어줍니다.”
휴대폰의 용도치고는 너무도 단순하다. 더구나 컴퓨터로 또 다른 생의 승부를 거는 모습에서는 더욱 그렇게 비친다.
그는 등산을 마치고 사무실에 도착하자 곧바로 커피를 끓인다. 커피는 그가 가장 즐기는 기호품이다. 술도 안 하고 담배도 거의 하지 않는 대신 커피만 하루 다섯 잔 이상 마신다. 커피를 끓인 뒤 감자튀김 양파깡 초콜릿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한다. 일반 사람이 보기엔 주전부리지만 그에게는 신새벽을 여는 엄숙한 조찬인 것이다.
“초콜릿은 독일에서 연구생활 때 배운 것이지요. 많이 먹으면 해로우나 적당히 먹으면 피로가 회복되고 영양도 괜찮아요.”
이날 사온 것도 주전부리거리와 사과 참외 복숭아 등 과일이다. 그렇다고 사온 과일을 손님에게 내놓는 친절은 없다. 의자 옆에 과일봉지가 불룩 옆구리를 내밀고 있지만 손님에게 권하는 호의는 찾아볼 수 없다.
오전 5시부터는 컴퓨터 게임에 들어간다. 게임은 ‘프리셀(자유 세포)’. 프리셀은 빌 게이츠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기 때문에 그의 천재성을 모방한다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이 게임을 즐긴다.
“빌 게이츠의 전기에서 보았지만 그는 프리셀을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해요. 그 이유가 뭐겠소. 그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하고 자신을 추스르는 것이 아니겠소.”
-프리셀 게임이 재미있습니까.
“재미없으니까 하지. 재미있는 게임은 거기에 폭 빠져들어서 하루를 다 소비해버려요. 그런데 프리셀은 독일식 멘탈이 묻어 있지. 프리셀은 바둑과 같아요. 나는 독일 유학 시절과 교환교수 시절 독일에 우리의 바둑을 보급한 적이 있는데 프리셀이 바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컴퓨터 게임을 마치면 평생의 작업인 괴테 번역에 나선다. ‘파우스트’만도 네 차례나 완역했다. 대체로 비슷한 포맷, 비슷한 감으로 번역을 하지만 계절에 따라, 상황에 따라, 혹은 자신의 사유체계에 따라 어휘에 변화가 있다. 전엔 번역 작업을 직접 원고에 쓰는 것으로 했지만 지금은 철저하게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다. 훨씬 빠르고 정확해서 좋고, 구질구질하고 칙칙하지 않아서 좋단다.
퇴직금으로 만든 괴테전집간행회
그가 맡고 있는 공식직책은 괴테전집 간행회 대표. 각 대학 독문과 교수 30여 명이 참여한다. 그러나 교수들의 ‘산 입’ 때문에 트러블이 자주 생긴다. 그래서 그가 맡은 역할이 조정역. 조정역을 맡지 않고는 괴테전집이 살아 생전에 다 나올 것 같지 않아서다.
괴테전집간행회도 순전히 박교수의 사비로 설립했다. 정년퇴직금 1억5000만원을 고스란히 괴테전집 간행을 위해 내놓았다. 독일에서는 전집이 143권 나왔지만 박교수는 40권 안팎으로 완간할 계획이다. 1970년대 초 국내에 7권짜리 괴테전집이 나왔지만 그 이후 여기에 손대는 출판사가 없어서 그가 정년퇴직금을 전액 내놓고 민음사와 계약을 맺어 현재 10권 정도를 냈다.
그는 출판사에 대해서도 다소 불만을 갖고 있는 듯했다.
“퇴직금을 몽땅 괴테전집 간행에 쓴다고 하자 집사람의 불만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상당히 구박을 받았지요. 그런데 이게 돈 되는 사업이 아니라고 보아서인지 출판사에서는 별로 성의가 없는 듯해요. 번역 작업을 시작한 지 6년이 됐고, 전국 독문과 교수들이 번역을 거의 끝냈는데 책이 나온 것은 겨우 이 정도입니다.”
-괴테를 연구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독일문학도로서 괴테를 간과해선 안 되죠. 셰익스피어를 많이 얘기하지만 괴테야말로 천재성 문학성 사상성 기교성으로 볼 때 세계 최고의 문호라고 자신합니다. 그런 그를 우리는 너무 몰라요. 한 예로 괴테는 문학가이기에 앞서 세계적인 자연과학자입니다. 갈릴레오보다 더 뛰어난 과학자이지요. 그의 저서 ‘천문학’이 없었다면 인류가 오늘날의 과학을 이룩하지 못했을 거예요. 뉴턴보다 업적이 더 큰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학적 업적 때문에 이 부분이 가려졌고, 국내에선 문인으로서의 괴테만을 생각해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필생의 연구테마로 잡은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한 작가만 가지고 필생의 작업을 할 가치가 있느냐는 이의제기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괴테는 필생을 해도 일부밖에 못 해요. 한 사람이 다 못하기 때문에 나눠서 해야 할 정도예요.”
땀을 닦아낸 그의 이마에 화장지 조각이 엉겨 붙었다. 그러나 그는 입이 심심하던 차에, 모처럼 상대를 만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한없이 풀어나갔다. 그래서 그의 일상을 정리한다는 것이 옆길로 새나갔다. 다시 그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오전 시간에는 그렇다 치고 점심은 어떻게 하십니까.
“전에는 자장면을 먹었으나 지금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감자튀김이나 과자 초콜릿으로 점심을 합니다.”
그러면서 바람이 들어가면 습기가 차서 바삭바삭한 맛이 없어진다며 고무밴드로 총총 감아둔 먹다 남은 양파깡 봉지를 소중하게 옆자리로 옮겨놓는다.
오후에도 역시 간단히 컴퓨터 게임을 한다. 그러나 ‘프리셀’ 대신 ‘마인’의 지뢰찾기를 한다. 마인은 어떤 컴퓨터에도 윈도에 딸려 ‘강제적으로’ 내장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컴퓨터를 좋아해요. 컴퓨터는 실수가 없어요. 한자(漢字)를 쓰기도 좋고 배우기도 좋습니다. 컴퓨터가 없다면 삶에 재미가 없을 겁니다.”
-부인보다 더 좋습니까.
“집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나보다 이기적이에요. 외출할 때도 나는 아내에게 어디 간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그런 법이 없어요.”
-컴퓨터가 노인들에게는 아직 소원한 문명의 이기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60대’를 위한 컴퓨터 책을 쓰고 있어요. 그러나 그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한자 얘기 좀 합시다. 우리나라는 지금 한자를 쓰지 않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지만 이러다 우리 후손들을 남의 나라 노예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가까운 일본을 보십시오. 한자를 쓰니까 세계 일등국이 되었잖아요. 한글만 쓰면 저급한 동물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지식인들은 라틴어를 알아야 품위 있는 대화를 합니다. 그들 나라 언어의 원형이 라틴어이고, 또 라틴어보다 1000년 앞선 희랍어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익히고 있어요. 우리 한자는 그들 언어보다 훨씬 앞서 있는데 이것을 외면하고 있어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한자교육을 부활시켜야 해요. 한글 주창자들은 매국노나 다름없어요.”
단호하게 한자의 중요성을 역설한 뒤 그는 다시 괴테 얘기로 돌아갔다. 그는 오후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괴테 번역을 한다.
“괴테는 쉽고도 어렵습니다. 그의 문학적 궤적이 그러해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나이 20에 단 2~3주 만에 쓴 즉흥적 수기 형식의 소설이지만 얼마나 감미롭고 아프고 애절합디까. 또 문장이 빈틈이 없어요. 젊은 작가의 습작이나 다름없는 작품인데 문장 어디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어요.
독일인의 빈틈없는 구석을 여기서 그대로 만납니다. ‘파우스트’는 어떤가요. 나는 지금까지 이 작품을 다섯 번 번역했는데 그때마다 감이 다릅니다. ‘말의 정찬’을 여기서 만나요. 우수한 학자들이 해석을 하지만 그래도 미완인 것이 ‘파우스트’입니다. 어렵지만 웅혼하고 의미심장하며 인생의 깊이를 일깨워줍니다. ‘죄를 져도 구원이 된다’는 게 파우스트의 일관된 정신입니다. 극단적 상황, 절망적 환경이라도 극복이 가능하다는 파우스트의 이런 정신이 이 시대 우리네 삶의 지표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괴테는 인생의 선배로서 힘들고 어렵게 살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는 긍정적 인생관을 갖고 있는데 그게 바로 내 인생관이올시다.”
-그중 가장 생각나는 괴테의 어록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독일어로 ‘Ich mersch irrt sich, so lange er strebt’라고 쓰는데, 정말 우리의 인생에 나침반이 되는 어록이라고 봅니다. 사실 이런 구절은 괴테 어느 작품을 통해서도 접해볼 수 있어요.”
그는 또 규칙적인 생활, 절도 있는 태도 등은 모두 독일에서 학문을 익힌 결과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괴테 칸트 니체 등을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니체는 철학자로 널리 인식되어 있습니다만, 그 역시 대문호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유미주의적 삶의 태도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그중 특히 절망의 한계상황을 극명하게 제시해주는 아포리즘 ‘아아 고독이여, 나의 영원한 고향인 고독이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니체와 괴테는 같은 철학 문학의 길을 갔다는 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독일 문학의 전반과 비교해서 설명을 해주시죠.
“니체는 절망과 좌절의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생과 세계를 보았다고 봅니다. 그런 바탕에서 미학의 차이가 분명 있지요. 괴테는 인간의 밝은 면을 끝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 철학과 문학, 심리학, 천문학의 한계가 분명치 않습니다. 폭넓게 이를 용해 시켜 나가고 있지요.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는 깊은 사상이 내포되어 있고, 리얼리티는 물론 인생의 진리를 깊이 파고듭니다. 그들의 문학은 대체로 깊고 어둡습니다. 이런 것들이 괴테 문학을 통해 하나의 전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컴퓨터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한국인은 수치에 약하고, 특히 과학에 대한 탐구정신이 빈약하다고 하는데 교수님은 70대 중반에도 컴퓨터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저작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재미있습니까.
“이 지구상의 가장 좋은 선물은 복락과 여자가 아니라 컴퓨터라고 단언합니다. 컴퓨터를 통해 생활패턴이 완전히 달라졌잖습니까. 혁명 그 자체입니다. 이런 문명의 이기를 외면한다는 것은 야만이죠. 그래서 괴테 연구 못지않은 연구과제가 컴퓨터라고 보는 것입니다. 빌 게이츠는 나이차로 보아 자식 같은 사람이지만 그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틈틈이 책을 냈는데 벌써 세 권을 냈고, 계속 내려고 합니다.”
그가 펴낸 컴퓨터 관련 서적은 ‘한국 40대를 위한 컴퓨터’(사이언스 북스 간) ‘달마시안(강아지의 이름) 어린이 컴퓨터’ ‘3-D Visual 윈도 95 포켓 가이드’(민음사 간) 등이다. 이중 ‘한국 40대를 위한 컴퓨터’는 스테디셀러다. 이에 힘입어 금명간 ‘65세 이상을 위한 컴퓨터’(가제)를 낼 예정이다. 이를 위해 일본 출장을 세 차례나 다녀왔다. 일본은 이런 종류의 책이 30판을 거듭할 정도로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느냐, 65세 이상은 컴퓨터로부터 소외되어 있어요. 컴퓨터는 이미 국운과 직결되어 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이들을 냉대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본 노인들이 애국의 일환으로 자신들만 소외될 수 없다며 분기충천하여 이 책을 구입해보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은 65세 이상을 위해 썼다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사본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예외는 아니라고 봅니다.”
주부를 위한 책도 쓸 계획이다. 노래방 출입에 싫증이 나면 자연 컴퓨터에 빠지게 되리라는 게 그의 생각.
“주부들이 노래방에 나가 ‘국민열창시대’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컴퓨터 책이 있다면 그런 타락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쓸 계획입니다. 특히 돈 계산은 빠르나 자연과학의 수치나 통계, 응용력이 대단히 빈약한 우리 주부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저녁식사와 취침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녁식사는 집에서 합니다. 단백질 섭취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가끔 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밥을 잘 안 해줘요. 그래서 내가 만두나 먹을 것을 사가지고 들어가서 같이 먹거나 혼자 먹기도 합니다.”
박교수의 표현을 보면 아내와의 관계가 썩 매끄러운 것 같지는 않다.
“부부관계가 좋다고 볼 수는 없지요. 집사람 성격 때문이라고 봅니다. 집사람은 앞뒤 안 가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스타일이에요. 나는 아내의 기분과 하는 일에 많은 배려를 하는데 아내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재미있는 사람이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 하루 한 대꼴로 담배를 피운다면서 새 담배의 녹색 띠를 풀고 한 개비를 뽑아 필자에게 내밀고, 자신도 입에 문다. 세 시간여의 대화 동안 그가 베푼 첫 번째 호의. 필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달가운 선심은 아니지만 그 호의가 너무나 반가워 얼른 받아 켜주는 라이터 불에 담배를 갖다 붙였다. 그는 술도 거의 하지 않는다. 세속적으로 조금은 흐트러져야 하는데 너무도 완벽하다.
“중매로 결혼했는데 나이차가 아홉 살이나 돼요. 장모님이 무남독녀인 아내를 시집 보내야 하는데 나이차가 많아야 남편 사랑 듬뿍 받는다고 해서 아홉 살 많은 나에게 시집을 보냈어요. 지금껏 나는 가정을 등한히 하진 않았는데 아내는 뭔가 불만인 것 같아. 밤늦게 들어간 적도 없는데….”
그는 이 부분에서 뭔가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아끼거나 생략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를 도와줄 필요를 느껴 교육관을 물어보았다.
-자녀교육을 잘하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특별히 갖고 있는 자녀교육관을 말씀해주시지요.
“한마디로 자유죠. 한번도 아이들을 간섭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자식들을 많이 때려서 키웠어요. 큰딸은 경기여고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큰아들 역시 고려대 의대에 수석 합격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스탠퍼드대에서 석사, 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들을 한번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모두 선대의 교육이념 때문인데 이 점은 아주 잘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과 가문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포함해 장시간 자랑했다. 그래서 큰딸은 수원대학교 교수로 있고, 큰아들은 서울에서 이비인후과 개업의가 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막내아들을 만나러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마이애미 여행 중 장총강도를 만났지요. 남녀로 구성된 갱단이었는데 산모퉁이에서 갑자기 나타나 우리 차를 세우고 나더러 내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 아내를 끌어내렸습니다. 순간 나는 아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내를 못 끌어간다고 다른 쪽 아내 팔을 끌어당겼습니다. 갱단이 총구를 내 가슴팍에 들이대도 아내 팔을 놓아주지 않았어요. 그때 제보를 받았는지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산 쪽으로 올라왔어요. 그러자 갱들이 모두 산 속으로 도망쳤지요. 그때 아내는 갱들이 잡아당긴 팔보다 내가 잡아당긴 팔이 더 아프다고 화를 내더군요.”
그는 적어도 언어표현에 있어 천의무봉처럼 인식된다. 아내를 평가하는 것이라든지 인생관 교육관을 표현하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그중에 이런 말도 있었다.
“국무총리를 지낸 노신영씨가 후배예요. 부산 피란시절 그가 육군 통역장교로 있는 나에게 달려와서 당장 부산으로 가자는 거예요. 이미 전시 연합대학이 열려 나는 졸업반 때 입대를 했는데 빨리 내려가 시험을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내려갔는데 노신영씨의 계산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이미 독일어 과목을 이수했는데 그가 한번 더 시험을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시험을 보는데 대신 시험지 위의 이름을 적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해주었더니 노신영씨가 시험감독 눈을 피해 재빨리 자기 시험지와 내 시험지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노신영씨의 행동은 홍길동보다 민첩하더라구.”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
-결론 삼아 자신의 삶의 궤적을 정리해보시죠. 남들보다, 특히 한국적 노인상에서는 너무나 일탈한 삶을 살아가는 교수님의 모습은 파격을 넘어 노인의 공간이 없는 사회현실에 또 하나의 모델이 된다고 보는데요. 취침시간을 끝으로 이 지면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취침은 밤 11시쯤 하지요. 잠은 곤히 잡니다. 하루 취침시간은 세 시간입니다. 때로는 더 잘 때도 있지만 이 정도의 시간으로도 활동하기에 적합해요. 노인성 불면이라고도 보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자고도 활동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키 172cm, 몸무게 54kg의 내 몸이 사실은 정상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전엔 80kg 이상 나간 적도 있지만 이는 바로 탐욕의 자기현시밖에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잘 먹고 몸무게가 많이 나갔어도 늘상 피곤하고 지치던 것이 그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섭생이 허술하고 몸무게가 줄었어도 옛날보다 피로가 덜하고, 컴퓨터를 몇 시간 두들겨도 전혀 힘들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버리고 사는 자만이 가득 채울 수 있고, 즐거울 수 있고, 기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나는 아직 괴팍하거나 삶의 일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가장 최상의 삶의 방식이 이러하니까 이대로 따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약 한 첩 먹지 않고도 지금껏 건강하고 감기 한번 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내 삶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어요. 다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라는 괴테의 아포리즘에 천착해 내 삶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는 끝으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 삽입된 ‘친화력’의 몇 대목을 인용했다.
“어리석은 자가 훌륭한 남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은 끔찍한 일이다.”
“평범함에 대한 가장 큰 위안은 천재도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망한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소망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