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정권 시절 자행된 인권 탄압과 의문사를 추적함으로써 숱한 화제를 낳았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9월16일로 조사 기한이 만료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진실 추적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 기관의 활동은 과연 정교했는가. 한상범 위원장을 만나 의문사진상규명위 1년 9개월 동안의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한상범 위원장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인·지식인·종교인·학생·언론인들은 영장도 없이 끌려가 중앙정보부·보안사·경찰 대공분실 등에서 신체와 인격을 무너뜨리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언론은 철권통치의 폭압 아래서 때로는 저항했으나 때로는 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할 검찰과 사법부는 수사기관들이 고문을 통해 조작한 사건을 그대로 추인하는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다. 유신 체제 출범 직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장석구씨가 옥중에서 갑자기 숨진 일과 중정에 잡혀가 조사를 받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숨진 일 등은 바로 박정희 시대에 빚어진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이다.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학생과 지식인들을 무차별로 체포해 고문을 자행하고 징역을 살렸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처럼 죽음을 부른 고문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사건은 오히려 드문 편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수사기관에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다가 부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서울대생 김성수군의 사체에는 시멘트 덩이가 철사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단순 자살로 처리했다.
지난 세월 조직적으로 은폐된 고문치사의 진실을 가리는 것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맡겨진 과제였지만 고문에 의한 죽음이라는 강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증거를 찾지 못해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된 사건이 적지 않다.
자식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부모들은 10∼20년 동안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들은 이 땅에 민주 정권이 수립되자 의문사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의문사 가족들은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천막 농성을 벌여 마침내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탄생했다.
“의문사 진상 끝까지 파헤쳐야”
한상범(韓相範·66) 동국대 교수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후 의문사위는 여러 차례 여론의 주목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완전한 진실을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장준하씨와 최종길 교수 사건도 죽기 전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냈고, 자살로 처리됐던 허원근 일병 사건이 타살이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의문사위는 재야에서 오랫동안 의문사를 추적해온 민간인들과 검찰 경찰 군 수사기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합동으로 일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다. 의문사위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미국대사관 뒤 이마빌딩에 있다. 활동시한이 종료돼 보고서 작성 작업에 들어간 의문사위 한상범 위원장을 만났다.
―1년 9개월 동안 100명에 가까운 인력이 83건을 조사했는데 아직도 활동 시한을 연장해야 할 만큼 규명해야 할 사건이 많이 남아 있습니까.
“단순 살인사건도 경찰의 수사와 검찰의 기소, 사법부의 재판을 거쳐 대법원에서 확정되려면 넉넉잡아 2,3년이 걸립니다. 의문사위에서 다루는 사건은 대부분 10여 년 전에 수사기관에서 자살로 처리하고 종결한 사건입니다. 의문사위는 수사기관의 결론을 뒤집는 조사를 합니다. 기존 수사 정보기관들이 과거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서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습니다.
의문사위에 강제 조사권이 없어 관련기관에서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면 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습니다. 참고인이나 당사자들은 불러도 나오지 않거나 조사를 받으면서 거짓말을 해도 처벌할 장치가 없습니다. 위원장 명의의 동행명령에 불응해도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하면 그만입니다.
과태료는 행정벌이지 형사벌이 아닙니다. 동행명령장을 받은 사람이 돈으로 때우겠다고 하면 우리로서는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가장 형이 무거운 살인죄도 공소시효가 15년입니다. 그러니까 1987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강제권을 발동할 도리가 없습니다.”
2000년 의문사위는 당초 9개월짜리 한시기구로 출범했다. 그러나 접수된 83건을 도저히 9개월 동안에 처리할 수 없어 2001년 이후 6개월씩 두 차례 시한을 연장해서 9월16일 일단 조사시한이 종료됐다.
―동아일보도 의문사위의 활동시한을 연장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사설(社說)을 썼습니다. 그러나 국회는 대선싸움을 하느라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의문사위가 해체되고 나면 의문이 풀리지 않은 사건들은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버리는 건가요.
“내가 대통령에게 세 가지 방안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의문사위의 활동시한을 연장해주든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건을 다루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새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요.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법개정 절차를 밟아야 돼요.
내년 2월말 보고서를 작성한 뒤 미결 사건을 그대로 두고 의문사위가 해체되면 해방 직후의 반민특위처럼 돼버립니다. 의문사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권위주의 정권의 폭정을 청산하고 그 아픔을 치유하고 바로잡자면 의문사의 진상을 끝까지 파헤쳐야 합니다.”
―의문사위에서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한 30건을 검찰 등 기존 수사기관에서 다룰 수는 없습니까.
“의문사위에 접수된 사건은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전부 ‘이상 없다’고 덮은 사건입니다. 그런 기관을 못믿어서 위원회가 생겼습니다. 핑퐁처럼 거기로 다시 보낼 수는 없지요. 허원근 일병 사건을 계기로 국방부에서 의문사한 장병들에 대해서 자체 조사를 한다해도 유족들이 신뢰하지 않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검거됐던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이 전기고문 물고문을 받아 작성한 진술조서를 바탕으로 사형판결이 확정됐다고 의문사위가 발표했습니다. 사건이 조작됐다고 볼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다 아는 내용입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얼마 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주로 다룬 ‘사법살인’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거기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법률가협회는 인혁당 피고인을 처형한 1975년 4월9일을 사법제도가 생긴 이래 가장 참혹한 암흑의 날이라고 공포했습니다.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한 자백을 증거로 재판이 진행됐고 재판조서도 변조됐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가 간행한 자료집을 보면 끔찍합니다. 이번에 제5회 인권상을 받은 미국 연합감리교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는 1974년 10월 목요기도회에서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은 고문으로 조작됐다’고 발언했다가 그해 12월 추방됐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김지하 시인은 광고탄압을 받고 있던 동아일보에 1975년 2월 ‘고행…1974’라는 수기를 3회에 나누어 연재했다. 김지하 시인은 인혁당 피고인 하재완과 통방(通房)으로 나눈 대화를 통해 인혁당 관련자들이 받은 고문의 실상을 폭로했다.
―인혁당 그거 진짜입니까.
“물론 가짜입니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고문 때문이지러.”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김지하는 경북대학생 이강철씨가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다”고 법정에서 또렷하게 진술했다고 썼다. 김시인은 ‘고행…1974’를 쓰는 바람에 형집행정지가 취소돼 다시 교도소로 들어갔다.
유신헌법이 남긴 그늘
한상범 위원장이 이끄는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사건을 타살로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한위원장과 대담하는 황호택 논설위원(왼쪽).
“반공 매카시즘 정권이 국민에게 겁을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이용한 빨갱이몰이입니다. 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가 쓴 ‘국가보안법 연구’라는 세 권의 책은 심산상을 받은 훌륭한 저술입니다. 독재정권 시대에 국가보안법 사건의 상당수가 정권안보를 위한 조작이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이 조봉암씨를 공산주의자라고 몰아 죽이잖습니까. 조봉암씨 주장 자체는 빨갱이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독일 프랑스에 있는 이른바 민주사회주의 정당입니다. 과거 우리 풍토에서는 그런 정도도 빨강에 가까운 분홍의 좌파로 몰렸지요.
대학사회에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나 자칭 좌파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 참 순진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봤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도 제대로 해야지 벌써 좌파로 건너 뜁니까.
인혁당 사건 관련자 중에 유신을 노골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대개 성향이 천진난만하다고 할까, 순진하다고 할까 하는 지식인들이거든요. 혁명가도 아니었습니다. 매카시즘적 눈으로 보면 좌파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설익은 프로그레시브(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근본적으로 군사정권은 극우 이념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 정권입니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진짜 공산당이 아닌 좌익 용공 또는 간첩사건을 조작해 돌파합니다. 동베를린 간첩단사건도 그런 측면이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민청학련이 좌익 혁명세력이라는 자료를 배포했다가 나중에 다시 걷어갔어요. 민청학련을 박살내려는 시나리오에 따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엮었습니다.”
한위원장은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인혁당과 민족일보 사건을 들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지 5개월 만에 31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했다. 간첩 이영근으로부터 조총련계 자금을 받아 신문을 만들면서 북한괴뢰 집단이 주장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했다는 것이 혁명재판소의 사형판결 이유였다. 그러나 간첩이라던 이영근은 1990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사상이 ‘설익은 진보’였다고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목적으로 혁명투쟁 조직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으면 처벌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럼요. 헌법 이론으로 따져보면 공산주의에 기운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생각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해야 처벌 요건에 해당됩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의문사위가 인혁당 사건 전체를 다룬 것은 아닙니다. 인혁당에 관련돼 도피중이던 친구가 찾아와 도와달라고 해서 밥도 먹이고 재워주었다가 범인은닉죄로 구속된 장석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하게 죽었어요. 옥중에서 그냥 앓다가 죽은 게 아니라 위급한 병이 생겨 민간 병원으로 옮기는 중에 죽은 거예요. 그동안에 죽을 만큼 때렸는지 어땠는지 알 도리가 없죠.”
그는 유신헌법이 히틀러의 수권법보다 더 나쁜 법이었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수권법은 국회를 존속시키면서 국회의 권능을 대행했는데 유신헌법은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에서 헌법개정하고 모든 법령을 다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만들어진 법령이 다수 남아 있어요.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영장 없이 구금하고 단심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대학은 휴교시키고 신문은 검열하고 야당 국회의원을 영장 없이 붙잡아 보안부대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이것이 유신입니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유족들이 재심을 통해 사자(死者)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국가배상법의 시효가 10년이어서 국가배상법으로는 구제받을 수 없습니다. 재심을 통해 형사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한국과 일본의 재심 요건이 세계에서 제일 까다롭습니다. 구정권에서 조작된 사건 중에 정권이 바뀌고 나서 결백이 입증된 것은 아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뿐일 겁니다. 재심 요건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워요.”
사법부가 명실공히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한 나라에서는 인혁당 재건위 같은 사건이 생길 수 없다. 유신 이전까지는 사법부가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했지만 유신 이후에는 권력에 완전히 예속됐다.
5공 시절에도 민감한 시국 사건은 형사법원 수석 부장판사가 검찰 안기부와 협의해 형량을 결정했다.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 구속된 학생들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또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거의 예외없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신문에는 서울형사지법의 아무개 판사가 데모 학생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기자들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판사들의 이름을 기사에 명시했는데 사석에서 만나면 제발 이름을 빼달라고 부탁하는 법관이 많았다. 이것이 5공 사법부의 현실이었다.
한위원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와 5공 시절에 사법부의 독립과 인권에 관한 글을 ‘사상계’ ‘신동아’ ‘동아일보’ 등에 자주 발표했다. 그가 쓴 글의 제목만 봐도 그의 신념체계가 어떤지 윤곽이 그려진다.
‘영구집권의 망령들’(‘사상계’ 1969년 1월) ‘수형자의 인권’(‘사법행정’ 1974년 12월) ‘민중이 주인인 나라의 법’(‘뿌리깊은 나무’ 1978년 7월) ‘기본권 보장과 변호사의 책무’(‘대한변협지’ 1982년 9월) ‘인권과 고문’(‘동아일보’ 1982년 6월 21일) ‘헌법논의 활성화돼야 한다’(‘신동아’ 1986년 12월) 등등. 34권에 이르는 저서도 헌법과 인권에 관한 저서가 주류를 이룬다.
―유신 정권은 어떤 방식으로 사법부를 장악했습니까.
“법관도 사람이니까 약점이 있지요. 대개 약점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유신 선포와 함께 법관 재임명 제도를 만들어 말 안듣는 법관은 재임명에서 탈락시키는 거지요. 법관 재임명을 본떠 교수 재임용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유신헌법에 따라서 대통령이 모든 법관을 재임명하면서 정치적인 사건 판결에 협조하지 않은 법관들이 무더기로 잘렸습니다. 6·25 때부터 국방부에서 징발한 토지 등에 대해 국가배상을 해주려면 정부에 재원이 모자랐습니다. 법무부장관이 당시 민복기(閔復基) 대법원장에게 국가배상 사건의 판결을 지연시켜달라는 협조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국가배상 사건에 협조하지 않은 법관들도 유신 때 일제히 정리했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 밑에서 오래 법관생활을 한 이영섭(李英燮) 전 대법원장이 전두환씨가 들어서고 나서 얼마 있다가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아주 처절한 자괴감을 품고 살아왔다’는 퇴임사를 발표했습니다. 이 퇴임사가 독재정권 치하의 사법부 현실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봅니다.”
여전한 미스터리 장준하 사망사건
―장준하(張俊河)씨 사망사건 재조사를 통해 그가 떨어져 숨졌다는 약사봉까지 동행한 사람에 관해 의심스러운 진술이 나왔다지요.
“장씨가 죽기 직전에 둘이서 약사봉에서 함께 내려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장준하씨를 추종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중정에 관련된 사람이라는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인권위에서 몇 차례 조사를 받았습니다. 방문조사도 했고 약사봉에 함께 올라가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 사람을 여러 가지로 조사했지만 단정적인 증거가 없어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유해분자 관찰 계획보고에 장준하씨 사망 당일 행적이 빠져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엉뚱한 문건으로 대체돼 있습니다. 장준하씨처럼 반체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급할 때는 오전 오후 또는 시시각각 보고를 하거든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날에 일지가 없는 것은 매우 이상합니다.”
의문사위 유한범 대외협력팀장이 끼어들어 보충 설명을 했다.
“1975년도 3월31일 작성한 ‘유해분자 장준하 관찰계획’에는 망원(감시조)을 동원해 사생활을 관찰하고 전화감청을 하겠다는 계획 등이 나옵니다. 이것과 별도로 관찰동향 보고가 있습니다. 보고서에는 몇 시에 누구를 만나고 누구하고 통화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했다는 기록이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사망 당일에 등산을 갔으니 특이 동향일텐데 동향 보고가 없고, 중정 경기도지부 명의로 ‘장준하가 등산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보고만 한 줄 있습니다. 다른 동향 보고에는 전혀 엉뚱한 일본 잡지가 네 페이지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도 이상합니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씨를 아주 미워했다지요.
“장준하씨는 학병을 탈출해 임시정부 광복군에 들어가 독립투쟁을 한 사람입니다. 장준하씨는 박정희씨가 만군(滿軍) 장교로 독립군과 전쟁을 한 일제 앞잡이라고 심하게 공격했습니다. 장씨는 성격이 일도양단으로 대쪽같았습니다. 고려대 데모에서 ‘왜놈 장교가 대통령이 웬말이냐’하는 구호가 나왔는데 정보기관은 장씨 때문이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당시 박대통령이 만군 장교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장준하씨가 타살됐다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확실히 있습니까.
“의문사위는 장준하씨가 타살됐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의심스러운 대목이 너무 많아요. 그런 절벽 길로 하산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요. 내려오다가 떨어져 죽었다면 상처가 있어야 할텐데 긁히거나 부딪힌 상처가 없습니다.
이런 걸로 봐서 절벽에서 미끄러져 추락사했다는 당시 수사결론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밀어서 떨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워요. 머리에 함몰된 부위만 있을 뿐 긁힌 자국이 없어요. 의문사위 양승규 전 위원장이 현장을 답사하면서 밧줄로 몸을 묶고 내려와봤습니다. 밧줄로 묶지 않았으면 자신도 죽을 뻔했다고 하더군요.”
한위원장은 독재정권 시절 반골기질이 강한 교수였다. 1964년 한일협정 교수단 반대성명에도 서명했고 1969년 삼선개헌 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
“옛날에는 소주 마시고 정부 비판할 자유도 없었어요. 삼선 개헌 반대운동을 할 때 하도 울화통이 터져 을지로 5가 소주집에서 대통령 욕을 했습니다. 박 전대통령은 대망의 1970년대를 맞기 위해 삼선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망의 70년대…. 별 거지같은 ×× 다 보겠네’하고 욕을 했더니 모두 웃다가 슬슬 빠져나가요. 공무원이 많이 오는 술집이었거든요. 술집 아주머니가 쓸데없는 소리 해서 손님 쫓지 말고 구석에서 조용히 마시다 가라고 잔소리를 하더군요.”
“유신 때는 어떤 활동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유신 때 침묵했다고 공격하는 모양인데…”라며 유신 시절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는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시절에 헌법학자 김철수 교수와 함께 술자리에 불려가 협조를 요청받았지만 유신정권에 끝내 협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유신헌법을 홍보하는 책자를 만드는 일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도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는 이렇게 소극적인 비협조도 저항으로 해석될 수 있어 고심했다고 털어놓았다.
1980년 5·17 때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기관에 끌려갔다. 그가 갇힌 바로 옆방에는 김상근 목사가 있었다. 6월 항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인권 의식을 고취하는 원고 집필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의문사위 김형태 전 상임위원(변호사)은 ‘신동아’ 2002년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중앙정보부가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를 간첩으로 만들려고 고문하다 죽자 자살로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차철권(車鐵權) 전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신동아’ 3월호 인터뷰를 통해 김 전 상임위원의 주장을 반박했다. 최교수가 간첩행위를 자백한 데 따른 심리적 갈등과 불안 때문에 투신 자살했으며 뛰어내리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는 “천지신명에 맹세코 잠재우지 않은 것 외에 다른 고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최교수의 죽음에 대한 의문사위의 공식 견해는 어떻습니까.
“최교수가 자책감 때문에 자살한 걸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멍 등 고문 당한 흔적이 온몸에 있었거든요. 법의학자들의 견해로는 그렇게 심하게 고문당한 몸으로 그렇게 높은 데 올라갈 수 없답니다. 고문하다 죽은 후에 떨어트렸는지, 고문당해서 인사불성이 된 사람을 떨어트렸는지, 고문당해서 수족을 잘 못쓰는 사람을 떨어트렸는지, 하여튼 고문과 관련이 있는 죽음입니다.
차철권이라는 사람은 의문사위가 정당한 공무집행을 한 자신을 모욕한다고 청와대에 진정을 냈어요. 차씨는 최교수 고문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사람입니다.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막 대드는 거지요. 반인륜 범죄에 한해 공소시효에 예외를 두어야 한다는 말은 그런 사람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최종길 교수가 죽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씨는 조사했습니까.
“한번 소환했지만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조사에 응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해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벤치마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진실과 화해위원회’에는 과거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고백이 줄을 이었다고 하는데 의문사위에서 조사받은 사람들은 왜 한결같이 부인하고 참회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남아공은 백인 지배하의 흑백차별이 초점이었거든요. 남아공에서는 가해자들이 스스로 죄상을 자백하고 참회합니다. 그리고 사면을 받습니다.
의문사위는 피해자의 사망원인을 규명해 피해자와 가족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동안 조사를 하면서 솔직하게 과오를 인정하고 참회하는 가해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남아공하고 다른 거예요. 내가 남아공의 인권 전문가한테 물어봤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회 등진 전직 수사관들
국회의원이나 공무원이 독직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후에도 ‘나는 억울하다’ ‘절대로 돈 받은 일이 없다’ ‘정치적 탄압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례가 많다. 정치적 반대자가 보복 사정을 당하는 사례가 많은 한국적 현실에서는 이런 변명이 그런대로 통하는 편이다.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체면 때문에 죄를 인정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권력의 사병 노릇을 하며 고문과 조작을 자행하던 사람들이 죄상을 인정하고 나면 한국에서 살기가 어려워진다.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런 면에서 법적인 공소시효는 만료됐지만 사회적 공소시효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기자가 이런 의견을 말하자 한위원장은 “정신 분석이나 또는 인류학적 분석을 할 실력은 없다”면서 “동양 사람들은 외면적인 품위와 체면을 중시하고 서양 사람들은 내면적인 명예를 중시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의문사위 조사관들이 독재정권 하에서 고문 등 인권 유린에 관여했던 수사관들을 많이 만났을 텐데,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대개 연령이 높아 퇴임 또는 전직을 해 수사기관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도 있고 이민간 사람도 많습니다. 이민 가서도 한국 교민들과 어울리지 않고 숨어 살아요. 외국 여성과 결혼해 교민사회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요. 유족이 보복하는 일도 없고 고문자들이 테러를 당한 적도 없는데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느껴 외국에 나가 숨어사는 거지요. 고문 당사자가 아니지만 고문을 숱하게 지켜본 사람들은 이런 나라에 살기 싫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구요.”
―의문사 유족들이 의문사위의 활동 결과에 만족합니까.
“과거에는 위원회가 너무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유족들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원장이 물러나기까지 했지요. 물론 이 정도로 덮고가서는 안된다는 불만도 나옵니다. 의문사위가 법률을 뛰어넘을 수 없다보니 유족들로서는 답답함을 느끼겠죠.”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해 노중사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라면을 맛없게 끓였다고 총을 쏘아 허일병을 죽였다고 발표했는데 나중에 C일보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보도를 했습니다. C일보에는 노중사와 몇몇 부대원이 회식을 했다는 사실조차 부인한 것으로 나와 있던데요.
“C일보 보도에 대해 언론중재 신청을 해서 정정보도 결정을 받았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나 아직 현역에 남아 있는 사람이나 군의 치부를 알리지 말라는 압력을 받거든요. 한 부대원을 어렵게 설득해 현장검증에 참여시켰습니다. 의문사위에서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가 나중에 다른 데서는 부인하는 사람도 있어요. 군과 관련된 문제라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이 운동권 학생을 강제입영시켜 순화시키는 녹화사업 정책 결정에 관여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학생들의 죽음에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직 대통령을 꼭 소환해서 망신줄 필요가 있습니까. 방문조사나 서면조사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 대법원에서 군사반란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사람들입니다.”
한위원장은 전직 대통령 이름 뒤에 ‘씨’자도 붙이지 않았다. 군사반란의 수괴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 사람들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이 됐던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교통신호 조작을 해서 되겠습니까. 전두환이 가장 많이 돌아다니더군요. 그의 교통편의를 위해 수많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군사반란 및 내란죄 유죄 확정이 됐고 나중에 사면받았지만, 사면은 재심을 통해 죄를 클린하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리처드 닉슨,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중 파렴치 범죄에 대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닉슨은 결국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클린턴은 성추행이 아니라 고작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을 뿐인데도 국민 앞에 자백했습니다.
미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중죄를 지어 유죄가 확정되면 사퇴해야 합니다. 유진오(兪鎭午)씨가 일본 제국헌법을 잘못 베끼는 바람에 한국헌법은 대통령이 내란 외환의 죄를 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임중 소추받지 않게 해놓았습니다. 대통령은 재임중 살인 강도 강간을 해도 괜찮다는 얘기거든요.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에 한국말고 이런 헌법을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전두환은 이양우 변호사를 통해 의문사위의 동행명령 제도는 헌법이 보장하는 영장제도를 침해하기 때문에 응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군사반란을 일으켜 헌법을 파괴한 사람이 지금은 헌법을 들먹이며 의문사위의 활동을 부인하니 아이러니입니다.
독일의 법철학자 라트브루흐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인한 자에게 민주주의 권리를 주면 나치처럼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갈파했습니다. 전후 독일 헌법은 그 논리를 따라 방어적 민주주의, 즉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이나 단체는 해산할 수 있게 했습니다.”
녹화사업은 강제 세뇌 공작
―타협안으로 방문 또는 서면조사를 할 수는 없었습니까.
“법무부장관을 지낸 사람이나 현직 검찰 간부들이 체면을 고려해달라고 요청해 집이나 사무실 또는 호텔에서 아무도 모르게 방문조사를 했습니다. 과거에 장관을 지낸 사람이 직원들 퇴근 후에 의문사위에 와서 조사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나도 그런 분은 정중하게 대우하라고 했습니다.”
의문사위는 동행명령에 불응한 전두환 노태우씨에 대해 1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할 예정이다.
―녹화사업과 관련해 숨진 사람은 모두 몇명이나 됩니까.
“위원회에 접수된 숫자는 열 명이 못되지만 모두 합하면 40명 전후입니다.”
―녹화사업은 왜 잘못된 것입니까.
“녹화사업은 일종의 강제 세뇌 공작입니다.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에 대한 제압수단으로 병역 의무를 사용했습니다. 정신적인 설득행위보다는 물리적인 강압, 압력, 위기감 조성, 고립화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합니다. 말 안 들으면 감금하는 등 가혹행위를 했습니다. 휴가 나가서 과거 운동을 함께한 사람들을 만나 프락치 행위를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젊은이들에게는 가장 괴로웠던 대목입니다.
녹화사업은 정훈교육이나 군대의 정신교육이 아닙니다. 군인도 인간으로서 신조나 양심, 신체의 자유를 보장받습니다. 녹화사업은 그걸 원천적으로 무시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그런 무도한 행위를 하면 안됩니다. 녹화사업을 하면서 징집연령이 채 안된 학생을 끌어다 죽인 일이 있어요. 녹화사업에 끌려간 아들이 죽으니까 어머니가 따라 죽은 사례도 있구요.”
―의문사위는 미전향 장기수들에게 전향서를 강요하고 전향서를 쓰지 않은 사상범들을 계속 구금하는 근거가 된 사회안전법의 위헌성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북한과 대결하던 냉전 시대에 공산혁명 투쟁의 사상을 바꾸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했다는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최형우씨가 내무부장관을 할 때 ‘말’지와 인터뷰하면서 빨갱이는 고문해도 된다고 했더군요. 이 사람이 동국대 제자인데 내가 헌법을 얼마나 잘못 가르쳤으면 이런 소리를 하는가 가슴이 아프더군요. ‘너는 안보의식도 없느냐’ ‘빨갱이한테 동정하느냐’는 식으로 반격을 가하는 논리가 아직까지 위세를 떨치는 것은 참 유감입니다.
사람을 죽이려고 칼을 빼든 강도를 죽이면 정당방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사회안전법은 정당방위가 될 수 없습니다. 빨갱이가 학살하니까 우리도 학살한다고 하면 우리가 빨갱이와 싸울 명분을 잃습니다.
일제가 1925년에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1945년까지 시행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 죽게 하고 폐인을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에 한모씨가 사회안전법을 만들 때 일본 파시스트의 치안유지법을 거의 그대로 베껴왔습니다. 예방구금제 보호관찰제도 등을 일본 치안유지법에서 따왔지요.
사회안전법을 만든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6·25 때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던 빨치산들이 70년대 후반 감형돼 출소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사회안전법을 만든 겁니다. 전향제도는 대만 국민당 정부에서 하던 걸 배워왔습니다.”
―보안사에 근무하던 직원 중에 녹화사업에 관련된 기록을 불태우는 사진을 찍어서 우송한 사람이 있다면서요.
“보안부대에서 근무할 때 녹화사업 자료를 기록해 보관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협조는 하지만 자기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기록을 남겨둔 거지요. 그는 고문하는 팀 소속이었지만 직접 고문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의문사위에 협조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기무사로 노출되는 바람에 압력을 받았던지 얼마 있다가 ‘모든 자료를 다 태워버렸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녹화사업 기록을 태우는 사진이라고 하지만 뭐를 태우는 사진인지 우리가 사진만 보고 알 수 있나요? 압력을 받고 신변에 위협을 느꼈거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거겠지요.”
“직원 단합 잘 된다”
지난 4월 18일 한상범교수(가운데)가 의문사위 위원장에 취임한 직후 열린 다과회.
“출범초에는 서먹서먹했다고 해요. 사실 그런 걸 의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나는 취임 직후부터 이런 걸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특정 부처, 특정 당파, 특정 정치인 문제가 아니다. 의문사의 진상을 밝혀 민주주의에 보탬이 되게 한다는 자부심을 가져라.’
직원들 간에 벽을 허물기 위해 친목 등산 등 크고 작은 모임을 자주 가졌습니다. 파견 공무원들이 헌신적으로 잘하고 있습니다. 조사관이 국정원에 갈 때는 국정원에서 파견온 공무원이 안내를 하고 국방부에 갈 때는 국방부 파견 공무원이 안내를 합니다.
국정원에서도 파견 공무원을 통해 어떤 부탁을 해오기도 하지요. 실제로 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검사 검찰수사관 경찰관도 있고 기무사 국정원에서 나온 사람도 있어서, 우리의 수사기술이 다른 곳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아요. 다만 기무사에서 나온 사람은 기무사 관계 조사는 피하게 합니다. 경찰에서 나온 사람은 경찰 조사는 피하게 하고….
행자부 국방부 법무부 등 관계 부처의 고위 책임자를 만나면 의문사위 파견 공무원들이 불리한 여건을 감수하고 열심히 일했으니 복귀할 때 승진이나 보직에 불리함이 없도록 해달라는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작성됩니까.
“첫째 사망자가 민주화운동에 관련됐느냐, 둘째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느냐, 이 두 가지 관점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합니다. 위원들이 조서, 감정서, 의사의 의견, 과학수사연구소의 의견, 제3의 의견, 현장 검증 등 증거를 놓고 토의를 합니다. 기존 수사기관의 문건과 비슷하지만 우리는 더 유연하고 심도있게 작성합니다. 사건에 따라서는 분량이 많은 것도 있지만 조사결과가 명확하고 증거가 확실한 사건은 간단하죠.”
―의문사의 대부분이 전두환 박정희 두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에 일어난 것 아닙니까. 박대통령 시대에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인권유린이 심각했지만 보릿고개를 없앴고 경제성장을 이룬 업적이 있습니다. 박 전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경제성장도 박정희 전 대통령 혼자서 한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피땀과 경영인 기술자들의 창의와 노력이 어우러져서 나온 성과입니다. 박 전 대통령이 각종 리베이트를 직접 챙기는 등 부패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옵니다. 정경유착을 제도화했고….”
―한위원장께서는 어느 신문과 인터뷰하며 김대중 대통령이 의문사위원회 설립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던데요.
“김대통령이 의문사위 설립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의문사법이 의원입법으로 만들어졌거든요. 김대통령이 총대를 메면 야당 의석이 많으니까 국회에서 통과 안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문사법은 여야를 초월해 만들어져야 명분이 설 수 있어요. 그래서 김대통령은 뒤로 물러나 있고 초당파적 의원입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내가 김대통령에게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두환 노태우 등 내란죄를 지은 사람들을 왜 청와대에 불러들이냐 는 것입니다. 정치쇼로 필요한지 모르지만 그래서는 안됩니다. 김대통령은 전두환이고 누구고 다 용서했다고 하는데, 개인으로는 용서하든지 친해지든지 상관이 없지만 공인으로서는 다릅니다. 국민과 국가기관이 군사정권을 청산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어떻게 용서해줍니까. 이런 점에서 불만스럽다는 이야기지요.”
―의문사의 진실을 가로막는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말을 여러 곳에서 했더군요. 구체적인 방해 공작이 있었습니까.
“민주화가 진전돼서 불편해진 개인이나 조직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특정인이나 특정 부처를 적시해서 공격할 생각은 없고….”
―고문치사 학살, 인종청소를 위한 집단강간 등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말아야 된다는 국제적인 논의가 있습니다.
“독일이 몇 차례 법률을 개정해 2차대전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앴습니다. 1968년 유엔은 전쟁 범죄인과 반인륜 범죄자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인권조약을 채택했습니다.
인권단체들이 한국도 이 조약에 가입하자고 입법 청원하고 있습니다. 1987년 이전의 고문치사 학살 등에 대해서는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도 공소시효 15년이 지나 건드릴 수 없거든요. 명백하게 흉악한 반인륜 반민주 범죄의 주역 노릇을 한 사람을 내버려둔다면 법의 권위와 사회 정의가 실종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일제시대에 친일 매국한 사람들이 광복 후에 큰소리 치고 다니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지금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강압수사 행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합니까.
“미국 사회에서도 백인 경찰들이 흑인 범죄자를 집단 폭행하고 쏘아죽이는 사건이 가끔 일어납니다. 수사관의 개인적인 비행이나 범죄는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죠. 개인 차원의 범죄가 아니라 정권과 체제의 양해 하에 특정 정치세력을 제압하고 반대자를 말살 또는 침묵시키기 위해서 저지르는 인권유린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문사위와 인권위의 차이점
―보수적인 우익인사들은 한국의 인권부재를 비판하는 좌파들이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한다고 비난하는데요.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극단적인 보수 우익인사 가운데는 논쟁을 하다가 말이 막히면 왜 빨갱이한테는 욕하지 않느냐고 사상 논쟁을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이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주의적인 단선 체제로 문제가 많다는 건 다 알죠. 다만 학자로서 빨갱이는 사람 아닌 뿔이 달린 나쁜 놈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의 헌법교과서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북한에서는 헌법보다도 당 강령이나 당 방침이 우선합니다. 북한은 당이 지배하는 국가지 우리와 같은 법률관이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북한이 민주주의를 안 하니 우리도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고 할 수는 없지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권의식을 엿볼 수 있는 언행이 얼마전 보도된 적이 있다. 작년 8월 김위원장이 러시아를 한 달 동안 방문했을 때 극동지역 철도책임자인 빅토르 포포프가 북한인들의 마약 거래에 관해 언급하자, 김위원장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마약을 밀매하는 북한인을 보면 총으로 쏴도 좋다고 내가 허락한다. 우리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여러 명을 쏴도 문제될 것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근 신의주 경제특구를 만들면서 주민 20만명을 소개하는 계획도 북한의 인권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어떤 체제에서든 독재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남쪽의 경우에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시절에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시켜 서북청년단 단장 김정주를 쏘아죽인 일이 있습니다. 김정주가 처음에는 이대통령의 수족 노릇을 하다가 나중에 조봉암씨한테 붙어 찍힌 것이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텔레비전 보다가 눈에 드는 여성을 찍으면 부하들이 잠자리로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김성곤씨는 말 안 듣다가 끌려가 콧수염 뽑히고 너무 심하게 맞아 고문 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외국에도 이런 기구가 있습니까?
“라틴 아메리카처럼 군사독재정권을 겪으면서 인권문제가 심각했던 나라들이 인권위원회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는 인권위원회가 없어요. 기구가 없어도 법을 제대로 집행하면 됩니다.
과거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자면 기존 기구로는 안되니까, 인권위원회·의문사위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진상규명이 불가능한 사건을 인권위원회에 넘기면 된다고 하지만, 몇 번 가서 분위기를 보니까 인권위원회는 아주 얌전해요. 위원들도 유화적입니다.
의문사위에는 100명에 가까운 조사관이 있잖아요. 그래서 어디든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면서 조사합니다. 전현직 수사관도 많습니다. 인권위원회가 의문사위 수준의 조사를 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위원회에서는 한위원장이 또 쓸데 없는 소리 한다고 펄쩍 뛰겠지만….”
―임종국씨가 꾸려오던 민족문제연구소장을 물려받아 친일 인명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던데요.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은 어느 정도나 진척됐습니까.
“1990년대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처음 세울 때는 반민족연구소라고 했어요. 반민족행위 처벌법에 따른 역사적인 심판을 받지 않은 친일파가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 계열에서 실세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른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사업입니다. 김희선(金希宣) 의원 등이 활동하는 민족정기회복모임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하자는 법안을 국회에 내놓았습니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역사의 심판에 준하는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훈장까지 타고 비석을 세우는 것은 곤란합니다. 민족정기를 올바로 세워 가짜 애국자들이 설치지 못하게 교훈을 주려고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문학인을 연구하던 임종국씨가 만든 단체이다. 임씨가 작고한 뒤 친일문학인뿐만이 아니라 사회각계 전반에 걸쳐 친일 역사를 정리하자는 뜻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을 시작했다. 한씨는 작년 3월초 소장에 취임했다.
―약력에 개성 출신으로 돼 있더군요.
“개성은 38도선 이남입니다. 6·25 전쟁을 치르고 나서 북한땅으로 넘어갔지만…. 내 고향은 ‘경기도 개성’이에요. 지금은 황해도 개성이라고 잘못 쓰는 사람이 많아요.
개성중학(6년제) 4학년 때 6·25가 발발했죠. 저는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던 1951년 1·4후퇴 때 피난을 나왔지요. 피란지 연합학교에서 개성중학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피란온 학교 중에 미션스쿨인 개성 송도중학이 있었습니다. 거기를 1년 더 다녔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장이 두 개입니다.
1950년대 전쟁통에 공부한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50년대에는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피란민이 거의 모두 거지 비슷하게 생활했지요.”
“생명은 다 똑같다”
―유족들은 의문사위원회의 태도가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양승규(梁承圭) 초대 위원장과 마찰을 빚었지요. 유족들의 농성으로 양위원장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오신건데…. 지금은 유족들과 갈등이 없습니까.
“양위원장은 개인적으로 잘 알아요. 내가 1994∼98년 법학교수회 회장을 할 때 양승규씨가 부회장을 했어요. 이 분은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분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집안에서 신부와 수녀가 많이 나왔어요. 그런 사람은 대개 대쪽 같고 융통성이 없잖아요.
일을 하면서 너무 뻑뻑하게 나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유족들한테는 말 한마디라도 상당히 조심해야 하거든요. 사무적으로만 대하면 안됩니다. 말 잘못하면 트집잡혀요. 나는 험하게 살아서 이런 걸 꽤 많이 해봤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가 진상을 규명하지 못한 사건 중에서 가장 아쉬움을 느끼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대개 유명인의 사건을 꼽게 되는데, 생명은 다 똑같습니다. 유명인이고 잘났다는 사람만 특별취급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최종길 교수 사건을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조사하다가 최종길 교수만 하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상을 밝히지 못한 모든 사건은 다 아쉽습니다.”
한위원장은 학자가 아니라 수사기관장을 했어도 잘했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참고인은 5000명이 넘고 조사관들이 출장을 다닌 거리는 경부고속도로를 890여 차례 왕복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한위원장은 의문사위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