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축구에 오랜만에 공을 둥글게 차는 선수가 나왔다. 그는 툭툭 콧노래를 부르듯 쉽게 찬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공을 둥글게 차는 건 기본이다. 박주영은 어린 나무다. 무럭무럭 자라도록 물을 주라. 자꾸 가위질하지 말라. 나무는 무르익을 때까지, 모르는 척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
강호에 또 고수가 나타났다. 불세출의 천재가 출현했다. 혹자는 100년에 한번 나타날까 말까한 ‘물건’이라고 수군댄다. 혹자는 답답한 강호무림을 구할 메시아가 왔다고 말한다. 바야흐로 세상은 온통 그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그는 머리가 갑골상(甲骨相)이다. 머리 골격이 거북의 몸통처럼 잘생겼다. 아이큐 150의 천재이지만 ‘짱구머리 천재’가 아니다. 입술도 매혹적이다. 나비 두 마리가 꽃잎에 사뿐히 내려앉은 봉접형(逢蝶形) 입술이다. 입이 헤벌어지지 않아 온몸의 기가 입술로 모인다. 약간 내리깐 두 눈의 총기도 결코 입술 언저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한마디로 그의 포인트는 입술이다. 코와 입술을 잇는 삼각지대에서 섬광 같은 에너지가 번쩍인다. 그 에너지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집중력이 강하다. 그래서 그는 킬러다. 단 한 방에 목숨을 건다. 맞거나 말거나 ‘눈감 땡감’ 무차별 내지르는 기관총 사수가 아니다.
‘축구 천재’ 박주영. 그가 뜨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천재인지 일과성 바람인지 검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호엔 늘 천재나 고수가 나타나지만 금세 잊혀진다. 꽃은 한번 피우기는 어렵지만 지는 것은 금방이다. 봄날 벚꽃처럼 바람 한번 불면 우수수 떨어진다.
박제가 된 천재들
박제가 된 천재들을 아는가. 고종수, 이동국, 이천수, 정조국, 최성국도 한때는 강호에서 대단한 천재였다. 호나우두나 지단은 몰라도 차범근은 쉽게 뛰어넘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렇고 그런 선수가 됐다. 게으른 황소가 되어 느릿느릿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운동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왜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병든 닭처럼 시들었을까. 왜 빨갛게 멍이 든 채 동백꽃처럼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을까.
고종수(27)가 누구인가. 지금 박주영 나이인 스무 살 때 ‘98 프랑스월드컵’에서 펄펄 날았다. 대선배들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판에 그는 ‘월드컵이 뭐 별거냐’는 듯 겁없이 뛰었다. 통통 튀는 개구쟁이 천재. 슛할 듯하다가 패스하고, 패스할 듯하다가 갑자기 슛을 날리는 능글맞은 늑대. 브라질 선수급의 유연한 왼쪽 발목 스냅으로 툭 떨어지는 ‘드롭 골’을 넣을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선수. 상대 골키퍼의 움직임을 끝까지 지켜보며 슛을 날릴 줄 아는 국내 몇 안 되는 스타였다.
그는 프랑스월드컵에서 멕시코와의 1차전 때 선발로 70분 동안 뛰었고 네덜란드와의 2차전, 벨기에와의 3차전에서도 교체멤버로 나갔다. 프랑스월드컵이 끝난 뒤 그는 갑자기 ‘젊은 태양’이 됐다. ‘앙팡 테리블’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축구실력보다 더 톡톡 튀는 행동으로 잊을 만하면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히딩크는 2001년 부임 초기 그를 한번 뽑아 써 보더니 그 후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동국(26)은 또 어떤가. 고종수보다 한 살 어린 19세 때 프랑스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마지막 벨기에전 후반에 교체멤버로 들어가 벨기에 골키퍼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강슛을 날렸다. 벼락같은 그의 슛은 팬들의 답답한 가슴을 확 뚫어줬다. 탄탄한 유럽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건장한 체격도 믿음직스러웠다. 거기에 골 결정력까지 높아 수십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대형 골잡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청소년 대표시절에도 박주영 못지않았다. 1998년 10월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이 우승할 때 5골을 넣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99년 나이지리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선 3경기에서 1골을 넣은 데 그쳤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2001년 독일 분데스리가 브레멘에 진출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았지만 실패했다. “골 결정력은 좋지만 볼 트래핑이 나쁘고 수비 가담과 위치 선정 등 팀플레이에 약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계 축구 전문가들의 눈은 냉정했다. 끝내 히딩크마저 그를 2002년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물론 최근 이동국은 되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천재 소리를 듣기엔 아직 멀었다.
이천수(24)는 1999년 18세의 나이로 강호에 홀연히 나타났다. 새 천년을 휘어잡을 ‘밀레니엄 특급’으로 불리며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또한 그에 못지않은 ‘좌충우돌 입심’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빠른 스피드에 유연한 드리블, 그리고 송곳 같은 슈팅은 사람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게다가 떨어지는 각도는 예리하지 못해도 고종수 못지않은 프리킥 능력도 있었다. 2002 월드컵에서도 펄펄 날았다. 이어 스페인 프로무대로 진출했다.
하지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고, 나는 자 위에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있었다. 경기에 나갈 때마다 골을 넣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스페인 진출 1년 반이 지나도록 아직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20골은 넣었어야 했다. 이천수는 끝내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누만시아로 임대되고 말았다. 이천수는 지난 2월9일 독일월드컵 최종예선 첫 경기인 쿠웨이트전에서도 그리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후반에 교체됐다.
최성국(22)은 2002 한일월드컵 견습생 자격으로 대표팀에 합류한 히딩크의 ‘꼬마 제자’. 팬들은 그를 ‘리틀 마라도나’라고 불렀다. 개인기가 좋아 상대 수비 두세 명쯤은 쉽게 따돌렸다. 한국의 2002년 10월 카타르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과 2004 아테네올림픽 8강을 이끌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팬들은 최성국이 볼을 잡으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곧바로 패스를 해야 할 타임에 볼을 끌다가 볼을 빼앗기거나 정작 개인 돌파해야 할 때는 패스를 서두르다가 볼을 내주고 말았다. “도대체 골을 넣는 게 목적인지 아니면 볼 다루는 게 목적인지를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기의 큰 흐름을 읽는 데 결정적인 취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본프레레 감독도 2월9일 월드컵 최종예선 쿠웨이트와의 첫 대전 엔트리에서 그를 제외했다.
정조국(21)은 대신고 2학년 때 7개 대회에 출전해 5개 대회 득점왕을 휩쓸었을 정도로 대단한 천재였다. 박주영이 청구고 3학년 때 7개 대회에 나가 4개 대회 득점왕에 오른 것보다 더 좋은 기록이다. 그래서 정조국도 최성국과 함께 2002년 히딩크의 ‘꼬마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골 에어리어에서의 움직임, 골 결정력, 호쾌한 논스톱 발리슛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다.
그는 2002년 10월 카타르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골을 터뜨려 1-0 승리를 이끌었다. 2003년엔 K리그에서 신인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엔 그의 플레이가 시름시름 맥이 빠지더니 2004년엔 아테네올림픽 대표팀에서도 탈락했다. 팀 내에서도 점점 벤치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박주영이 고종수보다 ‘상대 문전 앞 프리킥’을 잘할 수 있을까. 박주영도 좌우로 휘어 차는 킥은 훌륭하다. 그러나 뚝 떨어지는 각도는 고종수의 킥보다 훨씬 밋밋하다. 그래서 박주영의 프리킥은 골대에 잘 맞는다. 소위 감아 차는 오른쪽 발목의 스냅이 고종수의 왼쪽 발목 스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창호의 바둑처럼
박주영의 몸싸움 능력은 어떨까. 상대 골에어리어에서 이동국만큼 해낼 수 있을까. 유럽의 산 같고 바위 같은 수비수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정면으로 맞붙으면 이동국만큼은커녕 번번이 나가떨어질 것이다.
박주영은 이동국같이 대포알 슛을 날릴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19일 독일과의 평가전과 지난 2월9일 쿠웨이트와의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에서 이동국이 날린 고감각 터닝슛을 날릴 수 있을까.
이천수의 그라운드를 휘젓는 능력과 최성국의 드리블 능력, 정조국의 돌고래 같은 호쾌한 슈팅력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한마디로 박주영이 모든 면에서 못 미친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박주영이 이들을 훨씬 능가하는 천재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박주영은 왜 천재인가.
박주영은 결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무형검(無形劍)이다. 마치 바둑의 이창호처럼 강하되 화려하지 않다. 언뜻 보면 평범하다. 체격도 본프레레 감독이 말한 것처럼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 그런데도 골만 잘 넣는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바둑을 뒀다 하면 이기는 이창호 같다.
박주영은 공을 쉽게 찬다. 물 흐르듯이 툭툭 편하게 찬다. 최성국처럼 볼을 질질 끌지 않는다. 소풍이나 나온 것처럼 자신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에게 투~욱 볼을 패스해준다. 경기 흐름을 명확하게 꿰뚫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결코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래서 박주영은 보통 땐 텔레비전 중계화면에 잘 잡히지 않는다. 잠깐잠깐 볼을 터치할 때 스치듯이 지나갈 뿐이다. 그는 볼을 죽이지 않는다. 볼은 ‘생물’이다. 그는 볼이 그대로 살아나가도록 놔둔 채 방향만 살짝살짝 바꿔준다. 골 에어리어 안에서도 무리하게 슛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위치가 나쁘면 가장 좋은 곳에 있는 동료에게 슛 찬스를 내준다.
스스로 골 만들어내는 골잡이
골잡이는 두 종류가 있다. 펠레, 마라도나, 호나우두, 앙리처럼 스스로 슛 찬스를 만들어 골을 넣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현재 독일대표팀 감독인 클린스만이나 폴란드의 올리사데베, 최용수·이동국 등 한국의 대부분 골잡이들처럼 동료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는 유형이 있다.
갈수록 수비가 강해지는 현대축구에서 천재형 골잡이는 드물다. 대신 미국프로농구(NBA)의 샤킬 오닐처럼 체격이 좋은 골잡이를 상대 문 앞에 박아두고 그를 이용해 골을 넣는 방법이 보통이다. 농구의 센터처럼 동료의 패스를 받아 다시 후방 동료들에게 볼을 배급해주거나(피봇 플레이) 기회가 닿으면 직접 골밑슛을 하는 식이다. 지단, 피구, 베컴처럼 최전방 골잡이 바로 뒤에 있는 미드필더들이 저격수가 되는 것이다.
박주영은 한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골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골잡이다. 그는 골을 주워 먹지 않는다. 그래서 속이 다 시원하다. 동료의 패스를 받아 열개 중 하나나 넣을까 말까한 ‘짝퉁 골잡이’는 얼마나 답답한가.
박주영은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빈 공간을 찾는 능력이 탁월하다. 보통 공격수들은 상대 수비보다 한 발 앞서 논스톱 슛을 하거나 그렇지 못할 땐 패스할 곳을 찾아 어물거린다. 하지만 박주영은 흐르는 볼을 잡지 않고 그대로 슬쩍 빈 공간 쪽으로 방향을 튼 뒤 한순간에 찬스를 만든다. 상대 수비수를 완전하게 따돌린 뒤 노마크 찬스를 잡는다. 볼 스피드를 그대로 살리는 논스톱 볼 터치에 이은 순간적인 공간 돌파에 상대 수비수들은 넋이 나간다. 볼도 움직이고 박주영도 움직인다.
누굴 잡아야 하는가. 공을 잡다보면 어느새 공은 박주영을 따라가고 박주영을 잡다보면 공은 골문을 향한다. 그만큼 박주영은 흐르는 공에 강하다. 특히 스루패스나 크로스를 이어받아 공의 흐름을 살리는 플레이는 일품이다. 양쪽에서 올라오는 크로스 볼을 논스톱 슛으로 연결시키거나 중앙에서 밀어주는 스루패스를 드리블로 이어받아 골을 성공시킨다.
박주영은 결코 밀집지역에서 볼을 다투지 않는다. 동료에게 즉각 패스를 하거나 자신이 직접 빈 공간을 찾아간다. 골 에어리어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카타르 8개국 초청국제대회 대(對)알제리전에서 빈 공간인 상대 골대 오른쪽 사각지대까지 드리블했다가 터닝슛으로 결승골을 기록한 것이 좋은 예다. 수비수가 마크할 수 없는 빈 공간으로 공을 몰고 가다가 그대로 슛을 날린 것이다.
지난해 10월9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중국과의 결승전 전반 37분 골 에어리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중국 수비수 1명을 어깨 싸움으로 제쳐낸 뒤 일자로 늘어선 다른 중국 수비수 3명을 더 제치고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킨 것도 같은 경우다. 빈 공간을 찾아가는 천부적인 감각. 이것이 박주영의 뛰어난 점이다.
1982년 스페인월드컵 득점왕인 이탈리아의 파울로 로시는 말한다.
“골잡이는 상대 수비수 뒤쪽이 가장 좋은 위치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 수비수 뒤쪽 공간 중 어디가 가장 파고들기 쉽고 동료들이 패스하기가 좋은지 순간적이고 본능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을 정하면 즉시 그 반대 방향으로 두세 걸음 달리다가(페인트 모션) 한순간 거의 일직선으로 그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동료의 패스를 받아야 한다. 5번 시도하면 4번은 도중에 차단당하거나 오프사이드에 걸릴 수 있지만 반드시 한 번쯤은 결정적인 찬스가 오기 마련이다.”
박주영의 슛 자세는 간결하다. 상대 골키퍼의 움직임을 끝까지 보면서 반 박자 빠르거나 반 박자 느린 슛을 날린다. 중심이동 능력이 뛰어나며 드리블을 하는 와중에도 상대 수비의 몸동작을 읽어낸다. 무게중심을 발끝에 두고 앞으로 숙인 자세에서 슛을 날려 ‘똥볼’이 거의 없다. 지난 1월 카타르 8개국 초청 국제청소년대회에서 24개의 슛 중 83%인 20개가 골문 안으로 들어가는 유효슈팅(이중 37.5%인 9골을 넣음)이었을 정도로 정확하다. 반면 그동안 한국의 골잡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똥볼’을 날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뿐인가. 어쩌다 골문으로 향하는 볼도 피그르르 힘없이 골키퍼 앞으로 굴러가기 일쑤였다. 왜 ‘똥볼’을 차는가. 왜 홈런 볼을 날리는가. 그건 슛을 날리는 순간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몸이 뻣뻣해지면 무게중심이 높아진다. 무게중심이 높아지면 발이 공의 중심에 맞지 않아 볼이 공중에 뜨거나 힘없이 굴러간다.
‘스위트 스폿’을 아는 박주영
왜 마라도나는 힘 하나 안들이고 쉽게 볼을 차는 것 같아 보일까. 왜 지단이나 호나우두는 가만히 차는 것 같은데 대포알 슛이 나올까. 그것은 볼을 정확히 자신의 발목 부근 중심(sweet spot)에 맞추기 때문이다.
테니스나 배드민턴을 칠 때 라켓을 공이나 셔틀콕에 가볍게 대기만 했는데도 정확하고 강하게 날아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테니스 공이나 셔틀콕이 라켓의 ‘스위트 스폿’에 맞았기 때문이다. 어떤 구기운동이든지 공이 몸이나 라켓의 중심에 맞으면 힘이 하나도 안 든다. 그러면서 공은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간다.
축구선수의 ‘스위트 스폿’은 대부분 축구화 끈을 맨 곳에서 약간 위쪽인 발목 부근이다. 물론 어릴 때부터 공차는 습관이 달라 선수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또한 패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마라도나는 거의 대부분의 볼을 바로 왼발 스위트 스폿의 발목 스냅으로 툭툭 찬다.
브라질 선수들은 마치 볼이 발에 붙어있는 것 같다. 그만큼 발의 스위트 스폿에 볼을 정확하게 맞히며 쉽게 볼을 찬다. 마치 산보나 나온 것처럼 가볍게 볼을 다룬다.
한국 선수들은 어떤가. 텔레비전의 ‘슬로모션’을 자세히 살펴보라. 대부분의 한국 공격수는 발의 스위트 스폿에 볼을 맞히지 못한다. 그래서 ‘똥볼’ 슛이나 엉뚱한 패스가 자주 나온다. 수비수도 마찬가지다. 볼을 슬슬 돌릴 때조차 정확히 다루지 못해 황당한 패스를 해댄다. 어릴 때부터 기본기를 잘못 배운 탓이다.
한국 축구에 일가견이 있는 ‘코리아헤럴드’의 아일랜드인 기자 스위니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축구 경기장의 스피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프로리그 선수들은 공을 받을 때 가장 먼저 정확한 위치를 잡는다. 그리고 정확하게 공을 발에 딱 붙여 받는다. 그런 상황에선 상대가 태클을 할 수 없다. 만약 처음 공을 받을 때 그 공이 발에서 조금만 떨어진다면 당장 태클을 당할 것이다. 한국 선수들은 바로 이런 공을 다루는 면에서 그들보다 한 수 아래다. 투박할 뿐더러 공을 받을 때 공이 발에서 한참 떨어진다. 이런 기술은 어릴 때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유소년 축구선수들은 공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하고 달리기 연습은 줄여야 한다.”
박주영은 공을 발의 스위트 스폿에 맞힌다. 그래서 ‘똥볼’이 거의 없다. 슛할 때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부드럽다. 게다가 늘 발뒤꿈치가 지면에서 떨어져 있어 무게중심이 낮고 수비수보다 한 발 먼저 볼을 낚아챌 수 있다.
보폭도 잰걸음이다. 성큼성큼 걷지 않는다. 힘이 들어가면 자기도 모르게 스텝이 커진다.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발놀림이 크면 상대 수비에 걸리게 마련이다. 조금씩 잰걸음으로 경쾌하게 발놀림을 해야 빈틈을 노릴 수 있고 발목 스냅 슛도 할 수 있다.
볼을 달고 다닌다
박주영은 슈팅할 때 다리의 백스윙 동작도 작다. 다리를 한껏 뒤로 젖혔다가 슈팅하지 않는다. 안정환처럼 짧게 끊어서 때린다. 설기현처럼 슛 동작이 크지 않다. 슈팅할 때 백 스윙동작이 크면 슈팅 타임이 그만큼 늦어진다. 다리가 긴 유럽 선수들이나 순발력 좋은 남미 수비수들에겐 그야말로 ‘밥’이다. 박주영은 차두리같이 볼을 앞에 차놓고 달리지 않는다. 볼을 늘 달고 다니기 때문에 수비하기가 까다롭다.
박주영의 최대 장점은 침착하다는 것이다. 또한 생각하면서 공을 찬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경기 흐름에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 한국 골잡이들은 오직 공만을 보며 온힘을 다해 냅다 내지르는 경향이 있다. 슛 동작도 너무 커서 발을 뒤로 젖히는 백스윙 동작과 발이 공에 닿는 시간이 한 10년은 걸리는 것 같다.
한때 한국축구지도자 전문강사로 일했던 네덜란드의 로버트 레네 앨버츠는 “한국 선수들은 빠르고 투지도 넘치는데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경기 템포가 빨라지고 허둥거리게 돼 조직력이 깨지고 어이없는 슛을 남발한다”고 말한다.
박주영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별명이 ‘애늙은이’인 것처럼 능글맞게 축구를 한다. 빨라야 할 땐 빠르게, 느려야 할 땐 한없이 느리게 볼을 찰 줄 안다. 그만큼 머리가 좋다. 박주영의 100m 달리기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다. 그러나 드리블하면서 가는 순간의 동작은 누구 못지않게 빠르다. 그것은 그가 상대 수비수보다 한 발 먼저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의 속도’가 상대 수비보다 빠르면 그만큼 한 발 앞서 갈 수 있다. 현대 축구는 ‘속도 전쟁’이다. 빠르지 않으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써먹을 틈이 없다. 그렇다고 달리기만 빨라서는 안 된다. 생각의 속도가 빨라야 된다. 공이 어디로 갈지 예상할 수 있다면 상대보다 훨씬 빠르게 그 공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의 출발반응시간은 0.12~0.14초다. 출발반응시간이란 출발신호가 난 후 뛰쳐나갈 때까지 걸린 시간을 말한다. 단거리 육상선수가 아닌 다른 운동선수들의 출발반응시간은 0.15초 정도면 우수한 것으로 친다.
박주영의 100m 달리기 속도는 12초대. 만약 박주영이 상대 수비가 눈치 못 채는 사이 먼저 드리블을 해서 치고 나간다면 상대보다 0.15초 앞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0.15초는 상대보다 1.24m를 앞서 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의 1.24m는 곧바로 ‘노 마크’ 찬스로 연결된다. 게다가 무게중심을 발 앞쪽에 둔 공격수와 골대를 등지고 있다가(무게중심이 발뒤꿈치에 있는) 몸을 돌려 공격수를 막아야 하는 수비수의 순간스타트 스피드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지단, 호나우두, 루니에 비하면…
마라도나는 말한다.
“내가 마라도나인 것은 기술 때문이 아니라 주위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이 환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누구누구는 어디에 있다는 식으로 목적을 가지고 주위를 살펴보면 판단하기가 매우 쉽다. 주위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으면 갑자기 날아오는 공도 곧바로 빈 공간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할 수 있다. 나같이 집중 밀착마크를 당하는 공격수는 공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논스톱 패스를 보내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다. 나의 뒤꿈치 패스나 아웃사이드를 이용한 논스톱 패스에 감탄을 보내지만 늘 주위의 상황을 꿰뚫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렇다. 한국 선수들의 움직임은 언뜻 보면 굉장히 빠르다. 그러나 공은 한없이 느리다. 생각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패스가 느려터진 것이다. 미리 어디로 패스 할 것인가 또는 움직이면서 어디에서 공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선수라면 패스도 훨씬 빠를 것이다. 그것은 경기장 전체 상황을 한눈에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박주영은 이런 면에서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경기장을 한눈에 볼 줄 안다. 축구를 알고 한다. 슈팅, 패스, 경기운영, 생각의 속도 등 모든 면에서 기본기가 탄탄하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가 문제다.
브라질 호나우두, 잉글랜드의 웨인 루니, 이탈리아의 크리스티안 비에리,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등은 수비수를 달고 다니면서도 골을 터뜨린다. 박주영은 지네딘 지단을 좋아한다. 하지만 과연 그만큼 드리블이나 패스 슈팅을 잘할까. 성인 대표팀에선 청소년팀과 달리 상대 골잡이를 쉽게 놔주지 않는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고 심판의 눈을 피해 꼬집거나 심지어 침을 뱉기도 한다. 골잡이가 평정심을 잃으면 골은 터지지 않는다.
호나우두나 잉글랜드의 마이클 오언이 무한질주와 급제동을 거듭하는 순간정지 동작을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꼭 스포츠카 페라리 같다. 수비수들은 알면서도 속고 알면서도 자꾸 당한다. 발목, 무릎, 허리로 이어지는 관절이 마치 자동차 유니버설 조인트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지단의 드리블은 현란하다 못해 황홀하다. 열어 둔 듯하면서 감추고 감추는 듯하면서 열어 보인다.
호나우두의 폭발적 드리블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호나우두는 골을 넣을 수 있는 가장 짧은 길로 질주한다. 좌우 몸의 쏠림과 디딤 발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볼을 감추며 드리블한다. 그뿐인가. 호나우두는 총알처럼 빠르고 파워도 넘친다. 오죽하면 잉글랜드의 명감독 보비 롭슨이 “호나우두는 볼을 가지고 달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빠르다”고 했을까.
박주영은 이들과 비교하면 아직 ‘새 발의 피’다. 더구나 박주영은 프로팀에서는 한번도 경기를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아직까지 자기 또래의 청소년팀이나 아마추어팀인 대학무대에서 ‘군계일학’이요 ‘천재’일 뿐이다. 오언이나 루니가 어린 나이에 잉글랜드 대표팀에 뽑힌 것은 그들이 잉글랜드 프로무대에서 골 폭죽을 터뜨리며 자신의 가치를 당당히 입증했기 때문이다. 박주영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천재’라면 왜 유럽 프로팀에서 가만히 있을까. 그들의 눈엔 그저 그만한 선수일 뿐인 것이다. 박주영은 이직 성인무대에서 검증받지 못했다.
박주영은 2003년 10월 북한 청소년대표팀과의 경기에 첫 출전한 이후 청소년대표로 뛴 15경기에서 17골을 터뜨렸다. 1경기당 1.13골인 셈이다. 골잡이가 2경기당 1골 정도 넣으면 수준급 킬러로 불린다. 3경기당 2골은 터뜨려야 정상급 킬러로 인정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박주영의 1경기당 1.13골은 대단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청소년 경기에서 이룩한 것이다. 만약 성인국가대표 A매치 경기라면 그만큼 골을 넣을 수 있을까. 황선홍은 A매치 103경기에서 50골(경기당 0.49골)을, 차범근은 121경기에서 55골(경기당 0.42골)을 넣었다. 두 사람은 2경기당 1골 정도를 넣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수준급 킬러였다.
전 포항 감독 최순호씨는 말한다.
“박주영의 가장 큰 장점은 경기를 쉽게 풀어간다는 것이다. 뛰어난 개인기를 믿고 필요 이상으로 볼을 끄는 선수가 있는데 박주영은 필요할 때 드리블하고 패스를 내준다. 그러나 앞으로 욕심이 생기면 지금처럼 물 흐르듯 유연한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 지금의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지려고 무리하게 욕심을 내면 플레이에 군더더기가 붙게 된다. 그를 지도하는 감독이 해야 할 일이 많다. 개인 트레이너를 붙여서 체력관리를 해줬으면 좋겠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신에 대한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항상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 이제 박주영은 저 높은 히말라야 고개를 막 넘어야 할 어린 새다. 아직 날개가 다 돋지 않았다. 힘을 더 키워야 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다. 오는 6월 네덜란드 세계 청소년선수권이 끝나면 국가대표팀에 발탁해 그로 하여금 경험을 쌓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팬들의 지나친 기대는 박주영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동국, 이천수, 정조국, 최성국을 보라. 일단 네덜란드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자기 또래의 세계적인 스타들과 맞붙어봐야 한다. 큰물에서 놀아봐야 자기의 한계와 가능성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무대에 뛰어들면 술, 담배, 여자 등 유혹의 손길이 뱀의 혀처럼 널름거린다. 다행히 박주영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일단 안심이다. 부상도 조심해야 한다. 박주영은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후 오른 발목 피로누적 골절 증상으로 한 달여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다. 지난 1월 해외전지훈련 후에도 피로골절 현상을 호소했다.
“내실과 안식이 필요한 시기”
박주영을 혹사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재활 치료를 맡았던 분당 JDI스포츠클리닉 지송윤(34) 실장은 “박주영은 발목, 무릎 등 좌우근력이 불균형해 부상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김병수 포항 코치도 한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부상으로 그 꿈을 접었다.
스카우트 파동으로 사라진 천재도 있다.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 4강 신화의 주역 김종부도 현대와 대우의 스카우트 다툼 속에 선수생명을 망쳤다. 박주영도 자칫 국내외 프로팀들의 과당경쟁으로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과다한 언론 노출도 좋을 게 없다. 잦은 방송출연이나 정치인 모임에 불려 다니는 것은 그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마침 박주영을 지도하고 있는 류태호 고려대 교수(체육교육학)가 어린 제자가 염려스러워 ‘동아일보’에 글을 띄웠다(동아일보 2005년 2월11일자 29면).
“주영아. 카타르 8개국 초청 청소년대회와 해외 전지훈련을 마치고 오늘 한국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중략… 너의 지도교수로서 앞으로 네가 겪어야 할 일이 걱정스러워 몇 자 적어본다.
…중략… 네가 고등학교 때 10일간의 체력훈련이 지겨워 일기에 ‘누가 하늘 좀 찔러주세요, 비가 오게요’라고 쓴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것은 인간은 없고 기계만 있고, 학생은 없고 선수만 있고, 교육은 없고 훈련만 있는 생활에서 나온 솔직한 마음을 기록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다시 그런 구조에 너를 구속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중략… 지금은 대학교 1학년(freshman)이다. 1학년은 늘 신선하다. 국민이 너를 축구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1학년으로 보았으면 한다. 보름만 지나면 이제 2학년(sophomore)이 된다. 서포모어의 원래 의미는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이란 뜻이란다. 혹시나 그런 의미의 2학년이 될까 안타깝다. 지금은 내실과 안식이 필요한 시기이다.”
박주영은 아직 한국도 넘지 못했다. 청소년팀에선 아시아권에서 통한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성인무대에선 아무것도 검증된 게 없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도중에 소리 없이 사라진 고수가 강호엔 얼마나 많은가.
세상 사람들의 찬사에 취하지 말라. 그들의 세치 혀에 붕 뜨지 말라. 오버하지 말라. 그 순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적어도 성인대표팀 선수로 아시아권을 넘어서려 해도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가.
사람의 몸은 원래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스포츠 스타들도 하나같이 몸이 부드럽다. 자세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쿵 하고 뒤로 나자빠진다. 한국축구는 빠르고 강하다. 그러나 몸이 뻣뻣하다. 필사적이다. 몸을 던진다. 북한 축구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촌스럽다. 공을 직선적으로 어렵게 찬다.
공을 둥글게 차는 건 기본
한국 축구에 오랜만에 공을 둥글게 차는 선수가 나왔다. 툭툭 콧노래를 부르듯 쉽게 차는 스타가 나왔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공을 둥글게 차는 건 기본이다. 어릴 때부터 맨발로 공을 찬 건 박주영뿐만이 아니다. 브라질의 수많은 선수가 그렇게 해왔다. 골목길에서 벽치기를 하다가 남의 집 유리창을 수시로 깬 것도 웬만한 선수라면 모두가 경험한 것이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11명이 둥글게 마음을 모아 둥글게 공을 차야 아름답다. 박주영은 어린 나무다. 무럭무럭 자라도록 물을 주라. 자꾸 가위질하지 말라. 제발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라. 돌밭에서 몸부림치면서 자란 나무의 무늬가 가장 아름답다. 그로 하여금 몸부림치게 놓아두라. 나무는 무르익을 때까지 무조건 모른 체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붉고 둥근 동백꽃을 피운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