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기(足技)의 달인과 내공 고수의 결합
- 태권도, 합기도, 유도, 복싱의 장점에 호흡법 가미
- “마음 가는 곳에 발이 가 있다”
- 장풍처럼 펼쳐지는 평수(平手)의 가공할 위력
-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내공무술
- ‘괴력의 미니스커트’와 해병대원의 맞짱
먼저 부부간 시범. 남자가 여자를 향해 정권을 내지르자 여자가 주먹을 쳐내며 남자의 팔목을 꺾어버린다. 다음은 여자와 제자. 마주선 상태에서 여자가 기합소리와 함께 제자의 양 허벅지를 부여잡고 어깨로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린다. 마치 럭비의 태클 동작과 같다. ‘손쓸 겨를도 없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부인은 기자를 상대로도 같은 시범을 보였는데, 허벅지를 압박하는 팔심이 무시무시했다. 천근 쇳덩어리가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이어 스승과 제자의 시범. 약간 거리를 둔 상태에서 스승이 제자를 향해 몸을 날린다. 허공으로 솟구친 후 두 발을 가위처럼 사용해 제자의 목을 휘감아 돌리자 제자는 옆으로 나동그라진다. 보는 이가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동작이다. 다음은 하단 돌려차기. 낮게 구부린 자세에서 스승의 발이 컴퍼스처럼 원을 그리자 다리에 타격을 입은 제자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진다. 돌아가는 발은 보이지 않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시범을 보인 부부는 장수옥(57) 대한특공무술협회 총재와 ‘철선녀(鐵扇女)’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김단화(58)씨. 결혼 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무술을 연마했다. 장 총재의 무술이 외공이라면 철선녀의 무술은 내공이다. 장 총재는 25년간 청와대 경호실 무술사범을 지냈고, 철선녀는 처녀 시절 내공무술의 최고 실력자로 통했다. 특공무술은 바로 장 총재의 독자적인 외공과 철선녀가 수련한 내공이 합쳐져 완성된 것이다.
군 특수부대와 청와대 경호실을 중심으로 전파된 특공무술은 어떠한 무술보다 실전적인 무술로 평가받고 있다. 타격기를 중심으로 하되 잡기와 꺾기, 태클 등 실전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온갖 기술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전국에 200여 개의 도장이 있으며 정식과목으로 가르치는 대학도 늘고 있다. 군인을 포함해 그동안 특공무술을 배운 사람은 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특공무술협회의 올해 주요 사업목표는 중국 진출. 지난 5월 중국 옌지에 도장을 세운 것이 그 신호탄이다. 앞으로 2년 안에 중국에 200개의 도장을 세운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오는 9월 장 총재가 직접 시범단을 이끌고 중국에 건너갈 예정이다.
특공무술의 중국 진출에 맞춰 장 총재 부부의 무술인생을 조명했다. 따로따로 날을 잡아 장 총재 인터뷰는 서울 신영동에 있는 특공무술협회 사무실에서, 철선녀 인터뷰는 구기동 자택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철선녀를 인터뷰한 날 부부의 무술시범 장면을 촬영했다.
1부 ‘족기(足技)의 달인’ 장수옥
무술인들이 대체로 그렇듯 장수옥 총재도 눈매가 날카롭고 눈썹이 짙은 강인한 풍모다. 신장 169㎝의 크지 않은 체구지만 가슴은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고 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검은 무술복을 입은 그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들이 사무실 벽을 장식하고 있다. 젊을 때 사진을 보니 지금보다 더 날카롭고 날렵하다.
그는 자신의 무술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외공과 내공의 차이점부터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외공은 외적인 힘, 곧 근육의 힘에서 나오는 것으로 일반 격투기 무술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내공은 내적인 힘, 곧 기(氣)를 모아 발산하는 것이다. 내공은 겉으로는 상처를 입히지 않지만 속으로는 외공보다 더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다.
“내공 공격을 받으면 겉보기엔 아무 이상이 없어요. 그런데 속이 메슥거리거나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게 경험자들의 공통된 얘기예요. 청와대 경호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차지철 실장 앞에서 내공을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무술 유단자인 경호실 직원 한 명에게 방호복을 입힌 상태에서 평수(平手)를 펼쳤는데, 갈비뼈가 부러져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나중에 느낌을 물어보니 몸이 공중에 뜬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속이 불편하고 몹시 불쾌했다고 하더군요.”
“모든 무술의 기본은 육상”
‘족기의 달인’ 장수옥 총재의 젊은 시절 고축차기(왼쪽)와 날아차기.
처음에 경호실 직원들은 특공무술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때껏 자신들이 연마해온 태권도나 합기도, 유도, 검도와 비교해 ‘뿌리가 없는 무술’이라며 얕잡아본 것.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특공무술이 가진 실전성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나중에는 특공무술의 전파자로 나서게 됐다.
2002년 3월 청와대 경호실에서 퇴직한 장 총재는 자서전을 펴냈다. ‘대통령 경호원들의 영원한 사부’라는 책 제목은 바로 그에게서 특공무술을 배운 경호실 제자들이 붙인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북 김제. 4남1녀 중 둘째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모든 무술의 기본은 육상입니다. 어떠한 운동도 달리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만큼 기초체력이 튼튼해야 한다는 거죠. 내 경우 체력만큼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달리기를 하면 늘 1등을 했고, 제기를 차면 200m 트랙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한번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축구도 잘했고요. 또 싸움이 붙으면 먼저 때리고 재빨리 도망치는 재주가 뛰어났어요. 그래서 웬만해선 맞지 않았죠.”
그의 특기 중 하나인 고축차기(뛰어차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마한 기술이다. 겨울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교사(校舍)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 따기 놀이를 즐겼다. 다른 아이들은 펄쩍 뛰어서 손으로 따냈지만 그는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그 정도로 몸놀림이 가볍고 날렵했다.
졸업 후 집에서 4㎞ 떨어진 이리중학교에 들어갔다. ‘촌놈’이라고 무시당하기 싫었던 그는 아이들과 이틀이 멀다하고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토록 자주 싸움을 했지만 그의 기억에 맞은 적은 거의 없다. 워낙 눈이 빠르고 몸이 민첩해 상대가 그를 맞히기가 힘들었다는 것.
그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재수생 시절 서울에서 야바위꾼한테 얻어맞은 사건이다. 중3 시절 그는 서울에 있는 모 고등학교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으나 낙방했다. 그대로 주저앉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입시학원에 다녔다. 어느 날 우연히 서울역 부근에 갔다가 야바위꾼들에게 걸려들어 갖고 있던 돈을 몽땅 잃었다.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주변에 있던 바람잡이들이 골목 안쪽으로 끌고 가선 흠씬 두들겨 팼다. 복수심에 불탄 소년 장수옥은 그때부터 무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 시작한 것은 태권도였다. 태권도를 어느 정도 배운 다음에는 합기도 도장에 다녔다. 합기도에 한창 재미를 붙일 무렵 부친이 집으로 불러내렸다. 이듬해 이리상고(현 익산 제일고)에 들어간 그는 합기도장에 등록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도장으로 달려갔고, 도장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도복으로 갈아입고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발차기 연습을 했다. 한마디로 운동에 미쳤던 것이다.
그의 운동방식은 기초체력 훈련과 기술훈련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먼저 운동장을 수십 바퀴 도는 것으로 하체를 단련한 다음 나무를 상대로 발차기 연습을 했다. 돌려차기와 회축차기를 집중 연마하고, 나무를 차고 가지 위까지 뛰어오르는 훈련을 반복했다.
집에 들어갈 때는 대문을 이용하지 않고 늘 담을 뛰어넘었다. 그의 발차기 기술 중 가장 돋보이는 고축차기는 이런 일상적인 훈련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그의 고축차기 최고 기록은 3m70cm.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공중으로 솟구쳐 이중 점프를 해 목표물을 발로 차는 고난도 기술이다.
그는 도장을 다닌 지 1년 만에 3단을 땄다. 고교 2학년이 되면서는 수련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급성장했다. 방학 때면 대학생들이 도장에 와서 그에게 배우기도 했다. 3학년 때는 4단을 따고 정식으로 사범 임명장을 받았다.
몰매 맞으며 호신술 익혀
장수옥 총재는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하나 둘 익힌 기술을 자신의 전공인 합기도에 접목했다.
몰매를 맞으면서 그가 터득한 이치 중 하나는 맞을 때는 숨을 안 쉬어야 한다는 것. 숨만 잘 조절하면 아무리 맞아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정신만 바짝 차리면 어떤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그의 이러한 실전 체험은 뒷날 특공무술을 창안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 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 한 토막.
“익산역 부근 삼남극장 골목에서 몰매를 맞을 때는 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어요. 거리를 걷고 있는데 웬 녀석이 임신한 여자를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이런 일을 막지 못한다면 운동을 해서 뭣하냐는 생각에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어디에 있었는지 7~8명의 패거리가 몰려나와 나를 에워쌌습니다. 하나같이 덩치들이라 밀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발견을 못해서 그렇지 누구나 잠재적으로 호신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담벼락에 몰려 몰매를 맞으면서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앞에 있는 녀석의 가슴을 발로 차서 쓰러뜨린 다음 그 놈 등을 딛고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성장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간덩이가 커진 거지요.”
졸업 후 그는 직접 도장을 차렸다.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철공소 한쪽을 빌려 만든 허름한 도장이었다. 어느 날 한 폭력조직에서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다. 하도 간곡하게 요청하기에 가봤더니 구두도 벗겨주고 극장에도 공짜로 들어가게 해주는 등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직에선 그에게 중간보스 자리를 제의했다.
그는 잠시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해보고 나서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들과 접촉을 끊었다. 거기엔 아이들을 가르치는 무술 지도자라는 책임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또 뱀대가리가 될지언정 용꼬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오기도 발동했다. 그 세계에서 선배들을 제치고 보스가 되려면 수십년은 걸릴 터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머리 숙이고 싶지 않았다.
무술 고수들을 찾아나서다
그가 천생배필인 철선녀를 알게 된 것은 익산시 송학동에 새로 체육관 문을 연 1970년 가을이다. 모 주간잡지에 인왕산에서 무술을 연마한 처녀가 이로 철사를 끊고 주먹으로 바윗돌을 부수는 괴력을 발휘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그 여자는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를 갖췄다고 했다. ‘최고의 무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여자와 겨루고 싶어 당장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장수옥이라는 이름은 무술계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특히 ‘족기(발차기 기술)에 관한 한 대한민국 최고’라는 평이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고 새로운 무술을 배우고 싶어 무술 고수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거의 다 찾아다니며 도전을 청했다.
하지만 대결이 벌어진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고수가 자신의 특기를 설명하기만 하고 실전은 꺼린 탓이다. 예컨대 인천에 중국 무술인 십팔기(十八技) 고수가 있다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다. 입회인이 필요할 듯싶어 다른 도장의 관장과 함께 사진기를 들고 찾아가 한수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말만 앞세우고 겨루기에는 도무지 응하지 않아 실력대결은 무산됐다.
그렇지만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수들을 쫓아다니며 하나 둘씩 보고 익힌 기술을 자신의 전공인 합기도에 접목함으로써 전천후 종합무술인 특공무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장 총재가 안 해본 무술은 거의 없다. 유도와 레슬링, 태극권, 당랑권, 심지어 권투까지 익혔다. 권투에서는 빠른 발놀림을 배웠다.
당시 철선녀는 종로 단성사 근처 백궁빌딩에 있는 도장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익산에서 올라간 장 총재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철선녀 옆에는 내공무술의 대가인 청산거사가 있었다. 뒷날 국선도를 창시한 청산거사는 일본 TV에 출연하는 등 한창 유명세를 타는 철선녀를 철저하게 보호했다. 안 만나주는 데야 별수없었다. 장 총재는 철선녀의 이름을 가슴에 새긴 채 하릴없이 익산으로 내려왔다.
그의 ‘꿈’이 실현되는 데는 2년이 채 안 걸렸다. 어느 날 신문에 아르헨티나 무술 시범단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는 기사를 보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참가신청을 했다. 심사에 통과한 후 시범단 참가자 모임에 나가보니 거기에 철선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철선녀 김단화씨는 인왕산에서 청산거사에게 내공무술을 익혔다.
철선녀 김단화씨는 2002년 남편 장수옥씨가 청와대 경호실 사범직을 그만둘 때까지 10년간 특공무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공직자이던 남편 대신 협회를 이끈 것이다. 남편이 돌아온 후로는 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그가 왜 뭇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예쁘장한 얼굴에 군살이라곤 없는 날씬한 몸매. 게다가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가수 윤복희보다 먼저 미니스커트를 입었을 정도로 멋을 낼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런 멋쟁이 처녀가 이마로 송판을 격파하고 가슴에 정을 갖다 대고 해머로 쳐도 끄떡없는 괴력을 발휘했으니, 남자들, 특히 무술깨나 하는 남자들의 가슴이 설렐 만도 했으리라.
특공무술협회 총재실엔 1979년 6월 청와대 시범을 끝낸 김씨를 박정희 대통령이 격려하는 사진이 걸려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그의 손을 잡으며 “웬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비록 결혼해 아이를 낳은 몸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펄펄 날았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그는 환갑을 바라본다. 서글서글한 눈매는 여전하지만 몸집은 처녀 때보다 두 배가량 불어났다. 오랜 내공 수련의 영향인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앞에서 남편과 함께 펼친 시범을 비롯해 모두 일곱 차례 청와대에서 무술 시범을 보였다.
“결혼하고 운동을 그만둔 내가 다시 도복을 입은 것은 순전히 남편을 위해서였어요. 남편의 무술시범에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죠. 청와대 시범을 보인 후 나한테도 경호실에 들어오라는 제의가 있었어요. 하지만 거절했어요. 나는 오로지 남편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남편을 위해 나는 빠져야 한다고. TV 출연도 경호실에 있는 남편 때문에 제약을 받았어요. 하지만 남편이 실력을 인정받아 경호실 무술사범이 된 것으로 제 삶은 성공한 셈이에요.”
김씨의 고향은 대구. 대가족이었다. 6남4녀 중 셋째딸로, 전체 순서로는 여섯째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불교도 가까이 했다. 어릴 때부터 ‘부처님 오신 날’엔 꼭 절에 갔다. 생일이 초파일인 음력 4월8일이라는 기연 때문이었다.
“너는 공부 많이 하면 단명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소질을 나타낸 쪽은 음악과 무용이었다. 비록 가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음반 취입도 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은 남자들이 우선 가야 한다’는 부모의 방침에 따라 진학을 포기했다. 주역에 훤했던 부친은 “사주를 보면, 너는 공부를 많이 하면 단명한다”고 했다.
대학 꿈을 접은 그는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절을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청산거사를 알게 됐다. 북한산 도선사에 있는 청담스님을 통해서였다. 청산거사는, 절에 있긴 했지만 김씨의 표현대로라면 운수(雲水)하는 스님이었다. 말 그대로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인연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 같아요. 내 생일이 초파일이잖아요. 게다가 이름이 불교와 관련된 것 같아요. 붉을 단(丹)자에 고루 화(和)자, ‘단전의 힘을 고르게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건강한 몸을 가지라고 지어준 이름이지요. 청담스님이 내 이름을 듣더니 대뜸 ‘단전의 힘을 모아 고르게 퍼뜨린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포교하는 것을 뜻한다’며 ‘너는 이름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다’고 하더군요.”
김씨는 처음 ‘선생님(청산거사)’을 만날 때만 해도 운동이라는 건 해본 적이 없었고 단전이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청산거사가 ‘하겠냐’ 물었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출발이었다.
“내 몸에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10남매가 모두 ‘통뼈’로 몸이 단단했어요. 군 출신인 아버지는 검도 유단자였고, 첫째오빠는 태권도, 둘째오빠는 역도 선수였지요. 청산거사에게 운동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 엄청난 힘이 생겨나더군요. 배우는 속도도 빨랐고요.”
원래 청산거사에게는 두 명의 남자 제자가 있었다. 청산거사는 이들을 데리고 공연하곤 했다. 그런데 평소 공연 흥행을 위해서는 여자 수련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김씨가 제 발로 찾아왔던 것이다.
김씨는 인왕산에 있는 삼왕사라는 절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청산거사가 가르치는 내공무술의 기본은 호흡법이었다. 호흡법의 기초는 흡(吸), 지(止,) 호(呼) 3단계. 즉 5초간 들이마시고 5초간 중지하고 5초간 내쉬는 것이다. 그렇게 6개월간 단전호흡과 좌선만 했다. 6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호흡의 원리를 깨우치게 됐다.
김씨가 청산거사로부터 배운 내공은 차력(借力)과 비슷하다. 차력에는 약(藥)차력, 동(銅차력, 수(水)차력, 정신(精神)차력이 있다. 약차력은 호랑이뼈, 동차력은 쇳가루, 수차력은 약수를 먹고 힘을 내는 것이고, 정신차력은 기를 모으는 것이다. 김씨의 내공은 정신차력에 가깝다.
“내가 도에 통달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수련을 통해 기를 모아 힘을 발산하는 방법은 알아요. 기본은 호흡이에요. 의식이 있는 곳에 기가 있습니다. 의식을 갖고 하는 내공운동이므로 정신집중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돼요. 소(小)우주체인 내 몸의 모든 기능이 원활해질 때 호흡도 되고 힘도 나옵니다. 알고 보면 간단한 이치인데 그 이치를 깨닫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수련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고 힘을 자유자재로 쓰게 됩니다.”
김씨는 기자에게 자신의 팔뚝을 만져보라고 하더니 ‘으랏’ 하고 기합을 넣었다. 사람의 팔이 아니라 쇠뭉치 같다. 허벅지도 마찬가지다.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딴딴한 근육. 딱 한 번 근육강화 운동을 한 적이 있는데, 운동을 하는 순간 내공의 기가 모아지는 바람에 여간해 빠지지 않는 강철 근육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나는 싸울 때 무조건 잡고 싸워요. 상대에게 거리를 주지 않고 딱 잡고 못 움직이게 하고는 박치기를 한다든지 해서 한방에 보내는 거죠. 급소를 다 아는 데다 워낙 파워가 있으니….”
철선녀는 청산거사가 지어준 일종의 호다. 글자 그대로 ‘쇠부채를 펼치는 여자’라는 뜻이다. 남자 제자 둘은 각각 신력사(神力士), 태력사(太力士)로 불렸다. 철선녀가 어느 수준에 오르자 청산거사는 그를 무대에 세웠다. 예쁘장한 얼굴, 가냘픈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 철선녀가 등장하기만 하면 공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1970년 일본 TV방송사 관계자가 소문을 듣고 한국을 찾아와 철선녀를 만났다. 그는 철선녀의 묘기 몇 가지를 보고 푹 빠져버렸다. 그의 주선으로 철선녀는 일본 TV 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기자는 철선녀를 인터뷰하기 전 특공무술협회 사무실에서 당시 방송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봤다. 7㎝ 두께 송판을 이마로 격파하기, 가슴에 징 박고 해머로 치기, 가슴에 세 겹으로 바윗덩어리 올리고 해머로 내리쳐 부수기, 양팔에 감은 광목을 서로 반대쪽으로 달리는 오토바이 2대에 연결해 끌어당기기 등 무시무시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철선녀가 일본에서 돌아온 후 몇몇 주간잡지가 ‘철선(鐵線) 끊고 바윗돌 부수는 괴력의 아가씨’ ‘인왕산에서 내려온 괴력의 미니스커트’ 따위의 제목으로 그에 관한 기사를 다뤘다.
1971년 12월 철선녀는 파월장병 연예인위문공연에 참가했다. 한 달 동안 베트남에 머물며 전 부대를 돌았는데 박치기 시범만 스물아홉 차례나 했다고 한다. 위문공연단 중 철선녀를 비롯한 여자들은 공연할 때를 빼곤 방에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부대측에서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근 것. 그 전의 위문공연에서 유명가수 김모씨 등 일부 여자 연예인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스캔들로 물의를 빚어 유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당시 일화 한 가지. 어느 날 밤 공연을 마친 철선녀를 부대장이 찾았다. 낮에 본 공연이 인상 깊었다며 차 한잔 하자며 자신의 관용차를 보냈다. 그런데 한 30분을 달렸는데도 부대장 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지리도 모르는 데다 깜깜한 밤이라 철선녀는 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운전병을 다그쳤다.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말했다.
“야, 너 낮에 내 공연 봤어?”
“못 봤습니다.”
“그것도 안 보고 뭐 했어, 임마.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나 도로 데려다줘, 임마.”
그 순간, 꽝 소리와 함께 그는 차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차가 나무를 들이받은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충돌 순간 차 앞유리에 부딪친 것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기운이 넘치는 철선녀 김단화씨가 태클 시범을 보이고 있다.
얘기를 들려주는 철선녀도 기자도 박장대소했다. 베트남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철선녀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마를 꿰맨 상태에서 계속 무대에 섰다. 그 바람에 이마의 상처가 오랫동안 아물지 않았다.
철선녀가 무술을 연마한 기간은 약 5년. 배우면서 무대에 서고 무대에 서면서 배웠다. 공연중 더러 실수도 했다. 머리로 받든 주먹으로 치든 격파가 이뤄지지 않으면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자칫 머리가 깨지거나 손뼈가 부러지기 쉽다. 대전 공연에서는 두정(頭頂)격파, 즉 머리로 송판을 들이받았는데 깨지지 않아 한 10분간 공황상태에 빠진 적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재시도, 기어코 성공했다. 광주 공연에서는 가슴에 정을 대고 해머로 치는 시범을 보이다 정이 튕겨져 하마터면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대구 공연에서는 팔에 감은 광목이 오토바이 체인에 휘감기는 바람에 몸이 끌려가는 위험한 순간이 연출되기도 했다.
버스 안의 무차별 구타
그 시절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은 철선녀는 남자들과 많이 싸웠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그때는 싸움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시비를 거는 남자가 있으면 도망가는 게 아니라 “야, 이리 따라와 봐” 하고 소리를 질러 기선을 제압하거나 박치기로 혼내줬다.
그 시절의 몇 가지 일화. 한번은 동네에서 휴가 나온 해병대 병사와 대판 붙었다. 술에 취한 해병이 집적거리기에 거친 말로 응수했다가 선제공격을 당했다. 뺨을 얻어맞았는데, 턱이 틀어질 정도의 강타였다. 곧바로 반격에 나선 철선녀는 박치기로 해병의 얼굴을 뭉개고는 옆에 쌓여 있던 연탄재로 무차별 공격했다. 그런 다음 전속력으로 내뺐다. 해병이 뒤에서 욕을 하면서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게거품을 문 그는 철선녀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맸다. 철선녀는 해병이 휴가를 끝내고 부대로 복귀할 때까지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아는 미장원에 서 숨어 지냈다.
버스 안에서 싸운 적도 있다. 좌석에 앉아 가는데 옆에 앉은 청년이 자꾸 몸을 기대왔다. 느낌이 이상해 고개를 돌려보니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철선녀는 창쪽에 앉은 상태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청년을 창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주먹과 발로 닥치는 대로 가격했다. 키가 장대 같은 청년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아가씨, 그만해” 하며 말리지 않았더라면 무슨 사고가 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변태 청년’은 결국 다음 정거장에서 쫓기듯 내려야 했다.
미모에 무술을 겸비한 철선녀 주변엔 남자가 들끓었다. 하지만 콧대 높은 철선녀는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헨티나 무술 시범단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최종 선발된 사람은 그를 포함해 모두 여덟 명. 그중 한 남자가 눈길을 끌었다. 다른 남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는데 그는 관심없다는 듯 묵묵히 연습에만 몰두했다. 시범단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났는데, 특히 발차기가 일품이었다.
3부 세계 최강 특공무술의 탄생
“만약 우리가 싸운다면 둘 중 하나가 죽거나 그 길로 부부생활이 끝날 거예요. 결혼할 때 이 사람에게 말했죠. ‘평생 내 얼굴에 손대지 말라’고. 그 약속을 이제껏 지켰어요.”(철선녀)
“지금도 집사람은 ‘당신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나한테 안 된다’고 해요. 내공의 위력이죠. 하지만 사정거리 밖에선 나한테 안 되죠. 싸움에 관한 한 여간해선 내공이 외공을 당할 수 없죠.”(장수옥 총재)
1972년 아르헨티나 시범단 일원으로 만난 두 사람은 정작 아르헨티나에는 가지 않았다. 장 총재가 스물넷, 철선녀가 스물다섯. 목석인 줄만 알았던 두 무술인의 가슴에 연정이 싹텄다. 어느새 외국행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몇몇 잡지사에서 이 사람을 촬영하러왔는데, 이 사람이 굳이 나한테 자세를 잡아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어느 날 내가 이 사람을 다방으로 불러냈어요. ‘시범단에서 우리 둘의 비중이 80%를 차지하는 것 같은데 굳이 아르헨티나까지 갈 필요 있겠냐’고 했더니 이 사람도 동의하더라고요. 그때 이미 내 아내로 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 사람이 하는 내공을 꼭 배워 내 무술의 경지를 넓히겠다는 욕심도 있었고요.”(장 총재)
장 총재의 하단 돌려차기에 상대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 오른다.
어느 비 오는 날 장 총재는 철선녀와 같이 우산을 쓰고 걷다가 순간적으로 끌어안았다. 여자는 아무런 저항 없이 가슴에 쏙 들어와 안겼다. 불길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즐겼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양가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대구 토박이인 철선녀의 가족들은 “전라도놈이, 돈이 있냐, 얼굴이 잘생겼냐” 하며 못마땅해했다. 장 총재 집안에서는 “하필이면 운동한 여자냐” “도시에서 자라난 여자가 시골 와서 어떻게 살겠냐”며 반대했다.
“야가, 교(敎)가 틀리네”
장 총재는 철선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철선녀는 장 총재 어머니에게 인사하다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절을 올린다는 게 무심코 양 손바닥을 위로 하는 불교식으로 했던 것.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야가, 교(敎)가 틀리네.”
찬바람 나게 돌아앉은 어머니는 “니들 결혼은 절대로 안 된다”고 선언하고는 다락방에 올라가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하지만 철선녀도 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다락방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효자인 장 총재도 이때만큼은 불효자를 자청했다.
“평생 제 얼굴 보지 않으려면 알아서 하세요.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것만은 양보 못해요.”
결국 어머니는 일주일 만에 다락에서 내려왔고, 철선녀를 받아들였다.
철선녀의 시집살이는 혹독한 것이었다. 뒷바라지해야 할 식구가 열두 명이나 됐다. 시할머니, 시부모, 시아주버니 내외, 조카 둘, 시동생 둘…. 게다가 그토록 좋아하던 운동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철선녀는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종교도 시어머니를 따라 기독교로 바꾸고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솔직히 석 달 살고는 도망쳐 나오고 싶었어요. 하지만 참았죠. 절에서 좌선하면서 인내하는 법을 배웠잖아요. 아무리 힘든 시집살이도 신랑이 좋으면 다 하게 돼 있어요.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에요. 남편을 하늘과 같이 섬겨야 한다고 배웠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내 성질도 보통이 아닌데 이 사람은 휘발유더라고요. 완전히 잡혀 살았죠. 이제 나이 먹어 보상을 받고 있어요. 이 사람이 지금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데요.”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얘기처럼 철선녀를 아내로 받아들인 후 장 총재의 무술은 일취월장했다. 어떤 책에서 하루 중 새벽 1~3시가 가장 공기가 맑으며 그때 운동하면 효과가 높다는 글을 읽고 나서는 2년간 매일 그 시각에 철선녀가 가르쳐준 호흡법을 연마했다.
내공으로 기를 모은 후 발차기를 하자 기술이 더욱 향상됐다. 특히 고축차기와 더불어 그의 2대 발차기인 회축차기가 놀랄 정도로 발전했다. 마주선 상태에선 어느 누구도 그의 회축차기를 손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손이 올라가는 것보다 발이 돌아가는 것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실로 “마음 가는 곳에 발이 가 있는” 경지였다. 철선녀가 “그게 바로 내공”이라고 기뻐했다. 남편에게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던 그는 남편의 체력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 심지어 부부관계를 한 후에도 체력을 테스트한다며 남편에게 발차기와 팔 굽혀펴기를 시켰다.
무술실력은 늘었지만, 생활은 초라했다. 시골에서 체육관을 운영해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자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힘쓰는 운동을 많이 한 철선녀는 고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돼지고기 한번 제대로 먹을 형편이 못했다. 아이를 낳자 생활고는 더욱 심해졌다.
뭔가 돌파구를 찾을 무렵 평소 알고 지내던 직업군인이 독일에 가서 광부를 하라고 권했다. 알선료를 주면 자신이 힘을 써서 독일행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장 총재 부부는 체육관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서울로 올라가 대기하다가 비자가 나오는 대로 독일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예쁜 딸을 어떻게 죽여…”
공중으로 뛰어오른 장 총재가 두 발로 상대의 목을 휘감아 돌리고 있다.
그해 겨울, 한파가 몰아닥치자 수도관이 터졌다. 물이 없어 밥도 제대로 해먹지 못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딸아이가 뜨개질바늘에 목이 찔렸는데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술실력으로는 두 사람 다 어디 가도 대접받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친구들이 여자 있는 술집에 데려가서 술을 사주더라고요. 술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면서. 그런데 체육관 매트 바꾸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하자 안 빌려주는 거예요. 돌아오는 길에 엄청 울었습니다. 사회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더 살아 뭐 하겠나 싶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어요.”
장 총재는 갖고 있던 일본도를 기름으로 닦았다. 옥상에 올라가 아내와 딸을 죽이고 할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내도 동의했다. 결행하기 전 마지막 식사를 했다. 반찬도 없이 찬물에 밥을 말아먹는데, 아내가 “지경이 좀 봐요” 했다. 딸 지경이가 엄마 젖을 빨고 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예쁜 우리 딸을 어떻게 죽여….”
1977년 장 총재 부부는 체육관을 팔고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싼 동네 중 하나이던 화곡동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봄 철선녀는 “어머님 기도가 맘에 걸린다”며 장 총재에게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이 사람을 목사 만드는 게 어머님 꿈이었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성경 말씀을 꺼내며 남편을 설득했어요. 남편은 마지못해 신학교에 들어가긴 했는데 몹시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런데 야간 신학교를 다닌 지 한 달 만에 우리 가족에게 빛이 찾아들었어요. 606부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606부대는 청와대 경호실 소속 특수부대였다. 그때 606부대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장 총재는 어쩌면 홍콩에 건너가 영화배우가 됐을지도 모른다. 606부대에 앞서 이소룡의 후계자를 찾는 홍콩 영화제작사에서 그를 찾아와 카메라테스트까지 했기 때문이다.
“워커힐호텔 잔디밭에서 팬티만 입고 시범을 보였어요. 영화사 관계자들은 흡족해하면서 내가 출연하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오겠다며 돌아갔어요. 출연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그 직후 아내의 불안감(?)을 달랠 목적으로 정관수술을 했습니다. 606부대에서 찾아왔을 때는 실밥을 막 뽑은 상태였어요.”
“우리 애들, 최강으로 만들어달라”
베레모를 쓰고 찾아온 군인들은 그를 지프에 태워 김포공항 내 군부대로 데려갔다. 연병장에 도착하자 도복을 입은 군인 30명가량이 그를 에워쌌다. 606부대는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대테러 특수부대였다. 특전사에서 선발된 이들은 하나같이 체격이 건장하고 무술실력이 뛰어났다.
부대장이 나타나 장 총재에게 가장 뛰어난 무술실력을 갖춘 부대원과의 대련을 요청했다. 정관수술 여파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장 총재는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고 대련을 받아들였다. 부대원이 돌려차기를 하는 순간 그의 명치를 향해 가볍게 평수를 날렸다. 부대원은 신음을 내며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박수가 터졌다. 부대장이 숨 가쁘게 말했다.
“내일부터 당장 우리 애들 훈련시켜 주시오. 훈련받다 몇 놈 죽어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최강으로 만들어주시오.”
606부대 무술사범이 된 그는 이듬해인 1979년 6월 청와대 연무관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부대원들과 더불어 그동안 갈고 닦은 특공무술을 선보였다. 이때 철선녀도 참가해 특기인 송판 두정격파 시범을 보였다. 시범이 끝난 뒤 박 대통령은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다. 경상도 출신인 듯한 한 출입기자가 눈이 휘둥그레져 철선녀에게 물었다.
“올게 몇 살입니꺼?”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도복을 입겠다”는 철선녀 부부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특공무술은 태권도의 발차기, 유도의 낙법, 합기도의 꺾기, 호신술 등 여러 무술의 장점에 철선녀의 내공법을 가미한 것으로 기술과 대상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가 군 무술. 전장에서 써먹어야 하므로 실전적인 공격술, 즉 단기간에 상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기술이 중심이다. 둘째는 경호 무술. 경호의 기본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다. 따라서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방어 기술이 주축이다. 잡기, 꺾기, 급소 가격 등 근접 제압기술이 발달해 있다. 셋째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체육관 무술.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용 가능한 다양한 기술로 구성돼 있다. 군 무술과 경호 무술은 체육관 무술의 갖가지 기술 중 가장 실전적인 기술만 추린 셈이다.
그런데 특공무술의 장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철선녀가 전수한 내공 기술이다. 예컨대 주먹 지르기를 할 때 외공의 관점에서는 어깨와 팔의 근육을 단련시켜 그 힘으로 가격을 한다. 하지만 특공무술에서는 근육의 힘으로 주먹을 지르지 않는다. 다른 격투기와 달리 손끝이 아니라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다. 단전의 힘을 키우면 근육을 사용한 파괴력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손끝에서 펼쳐진다. 장 총재가 즐기는 평수가 바로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손바닥으로 치지만 내공이 실린 힘이므로 주먹으로 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내 나이 40만 돼도 천하를 죽이겠어”
장 총재는 기자의 끈질긴 요청에 협회 사무실에서 간단한 평수 시범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며 평수를 날렸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해달라”는 기자의 부탁을 감안해서인지 슬쩍 갖다대기만 했다. 그런데도 속이 꽝 울리는 듯한 묵직한 중압감이 밀려왔다.
이소룡의 절권도나 최영의의 극진가라테도 실전성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무술이다. 요즘 한창 인기인 이종격투기도 마찬가지다. 장 총재에게 “특공무술과 붙으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싸움은 상대적인 것이고 긴장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론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몇몇 특공무술 유단자가 국내 이종격투기대회에 참가했는데, 이긴 적도 있고 진 적도 있다고 한다. 진 선수의 경우 링에 올라간 순간 몸이 굳어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
현재 특공무술 유단자의 20%가 여성이다. 철선녀는 “요즘은 여자가 운동하면 갈 데가 많다”며 “앞으로 중국시장이 개척되면 여자 사범이 많이 진출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특공무술을 배우면 혈액순환이 잘 되고 여간해선 병에 걸리지 않는다.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돼 늘 즐겁다”고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1남1녀를 뒀는데, 재즈를 전공한 딸 지경씨는 특공무술 2단, 협회 총괄실장을 맡고 있는 아들 은석씨는 5단이다.
장 총재 부부는 중국에서 특공무술이 활성화되면 그곳에 무림원(武林院)을 짓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들이 구상하는 무림원은 각 유파의 원로 고수들이 거주하며 무예를 논하고 무술의 발전방안을 꾀하는 일종의 무술 아카데미다. 하지만 이 계획은 유동적이다. 여건이 되면 국내에 무림원을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도복을 입겠다”고 입을 맞춘 듯 말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철선녀가 주먹을 쥐고 말했다.
“아유, 지금 내 나이가 40만 돼도 천하를 죽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