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후 30년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는 이소룡. 무술인으로만 알려진 그가 상당한 경지의 철학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전무술인 절권도는 그의 철학적 과제인 자기구현의 결정체였다. ‘이소룡’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
이소룡이 말 그대로 ‘급사(急死)’한 것이 1973년, 올해로 32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요즘도 인터넷 인물 검색순위 상위권에 올라 있고, 잊을 만하면 세계 각국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지금 당장 아무 포털 사이트에 가서 검색창에 ‘이소룡’이라고 써보길. 최근에 씌어진 글이 오늘 아니면 어제 날짜일 테니까. 심지어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종격투기 관련 게시판에서 표도르나 크로캅 같은 최강의 격투기 고수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칭 ‘격투기 전문가’들의 상세한 해설과 함께.
‘이소룡의 스피드라면 표도르도 5초 안에 끝낼 수 있다’ ‘이소룡의 펀치 강도는 타이슨의 1.5배쯤 된다’ ‘이소룡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왜소한 체구 때문에 지금의 파이터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소룡. 그러나 그는 살아서 한 세대, 또 죽어서도 한 세대에 존재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소룡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는 이유는 뭘까.
대중스타의 생명력을 결정짓는 요소는 다른 무엇보다 ‘이미지’다. 이소룡처럼 요절한 제임스 딘과 마릴린 먼로의 예를 들어보자. 제임스 딘은 ‘우울한 반항아’, 마릴린 먼로는 ‘섹시한 백치미’라는 이미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대체할 만한 이미지를 가진 스타는 이미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대중은 새로운 스타일의 반항아 리버 피니스, 키아누 리브스에 매료되면서 제임스 딘을 잊어가고, 킴 베이싱어와 파멜라 앤더슨을 소비하며 마릴린 먼로와 점차 멀어지는 것이다.
살아서 한 세대, 죽어서 한 세대
이런 점에서 이소룡은 여느 대중스타와는 구별된다. 그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할 만한, 그와 대중의 거리를 벌어지게 할 만한 액션스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성룡의 재기발랄한 액션이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이소룡의 괴조음(怪鳥音·기이한 새소리라는 의미로 이소룡 특유의 기합소리를 말함)을 들을 때 느끼는 전율과는 장르가 다르고, 장 클로드 반담의 발차기가 아무리 멋있다 해도 이소룡에 비하면 둔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죽했으면 얼마 전 새 무술액션 스타의 등장을 선언하면서 개봉한 영화 ‘옹박’이 32년 전에 죽은 이소룡을 염두에 두고 ‘이소룡은 죽었다’며 대중에게 재차 확인시키려 했겠는가. ‘이소룡은 죽었으니, 그것도 32년 전에 죽었으니 이제 새로운 무술스타를 맞이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정말 절박한 방식의 홍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토니 자의 액션이 이소룡보다 화려해 보인다 한들 그의 마스크는 마냥 순진한 아이 같기만 한 것을.
이소룡을 대체할 만한 이미지를 찾지 못한 대중의 끝없는 갈증은 영화제작사 ‘신씨네’가 기획한 ‘이소룡 부활 프로젝트’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예 그를 디지털로라도 살려내겠다는 것이다. ‘신씨네’ 대표 신철씨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이소룡 부활 프로젝트’의 기획 동기는 이소룡 이미지의 시장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이소룡의 파워는 톰 크루즈나 톰 행크스 같은 할리우드 특급 스타들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이소룡이 마치 산 사람처럼 다른 배우들과 연기하면서 더 멋진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시장성이 어떨 것 같은가. 경쟁력이 엄청나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전세계 박스오피스가 4억2500만달러 정도는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죽은 지 32년이 지나도록 자신을 평온하게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는 ‘우리’에게 이소룡은 과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환상이나 이미지를 좇지 않고 바로 지금의 삶, 실재하는 가치를 추구했던 그의 철학을 떠올려볼 때 아마도 그는 그리 유쾌한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갑자기 웬 철학?’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은 통 몰랐겠지만, 이소룡은 워싱턴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틈날 때마다 다양한 철학서를 열성적으로 읽었던 독서광이다. 특히 도교와 선불교, 명상철학에 조예가 깊어 이와 관련된 독창적인 사상을 피력한 저작물을 남긴 철학자이기도 하다. 동양철학에 정통한 도올 김용옥 선생도 이소룡을 두고 ‘퍽 깊이 있는 사상가’라고 평했을 정도니 그만 어리둥절함과 의구심을 거두시라.
어쨌든 이소룡은 죽기 불과 3년 전부터 찍어댄 5편의 영화에서 자신이 보여준 이미지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썩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의 철학을 곱씹어볼 때 군더더기가 붙어버린 그의 이미지는 모두 제거해야 옳다. 그러나 김현이 기형도 유고시집의 발문에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의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제대로 알리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여기 당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원래 꿈은 의사
이소룡, 아니 이진번(李振藩·이소룡의 본명)은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홍콩의 경극 배우이던 아버지 이해천이 식구들을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발이 묶이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원정출산’을 한 셈이다. 이소룡의 영어 이름인 ‘브루스(bruce)’는 미국 시민권을 발급받기 위해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병원 분만실 간호사가 급조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브루스 리’라는 이름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니 이름 모를 간호사의 작명 솜씨가 그리 나빴던 것 같지는 않다. 뜻하지 않게 길어진 이소룡 일가의 미국 생활은 1947년 이소룡이 일곱 살이 되던 해 가족이 모두 홍콩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난다.
유년시절의 이소룡은 잘나가는 말썽꾸러기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인맥 덕분에 여러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는데 ‘세로상’이라는 영화에서 ‘이소룡(李小龍)’이라는 예명을 얻은 이후 줄곧 이 이름으로 활동한다. 꽤 알려진 아역스타였던 데다가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태극권을 배우고 13세부터는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으로부터 쿵푸를 배운 그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과 싸움을 벌였다. 천성적으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그는 철저한 싸움꾼 기질로 골목대장 노릇을 제대로 했다. 거울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멋을 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아이, 홍콩 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우승할 정도로 끼가 많은 아이였다. 1959년 19세의 나이로 혈혈단신 미국행을 결심한 이소룡은 자신의 앞날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신을 전혀 모르는 제가 이런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을 무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먼저 제 소개를 드릴게요. 저는 내년에 고등학교를 마치면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의사가 되는 게 제 소망인데요, 그 길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의사가 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저는 그 분야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아는 게 없는데, 그래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의사가 될 수 있겠죠?’
알려지지 않은 조언자에게 보낸 이 편지를 보면, 이소룡은 말썽 많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미국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의 주류사회에 정착하고자 굳게 맘을 먹은 듯하다. 사실 이소룡이 홀로 미국에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폭력집단의 살해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만큼 그의 미국행은 급작스러웠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채 이뤄졌다. 그러니 어린 이소룡이 가진 불안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그는 자신이 태어난 땅, 광활한 기회의 땅 미국에 단돈 100달러를 들고 입성한다.
시애틀의 한 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홍콩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에 적응해야만 했다. 홍콩에서는 꽤 알려진 아역스타였지만, 미국에서 그는 백인 주류사회의 편견에 시달리는 왜소한 동양인, 식당 웨이터, 댄스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해야 하는 고단한 고학생일 뿐이었다. 이런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의식이 강한 이소룡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성숙했으며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쿵푸 수련에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나인 나로서 살기 위한’ 그의 끊임없는 고민은 이소룡을 점점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이끈다. 그가 의사의 꿈을 접고 워싱턴주립대 철학과를 택한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전공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지도교수는 ‘너같이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철학은 너에게 대답해줄 거야.”
“내가 철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호전적인 성격과 무척 관련이 깊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승리를 갈망하는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스러운 승리란 어떤 것인가’….”
‘승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동양 남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쿵푸 수련에 매달린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소룡의 유려한 발차기와 왜소하지만 강인한 육체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은 그에게 쿵푸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고 그 중 한 사람이 훗날 그의 아내가 된 린다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동양무술하면 곧바로 일본의 가라테를 떠올릴 정도로 쿵푸와 태권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소룡은 쿵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 각지에 쿵푸 도장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 미국에서 태권도 마스터로 인정받는 이준구 사범과의 우정은 이처럼 같은 꿈을 꾸던 젊은 무도인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한편 이소룡의 할리우드 데뷔는 그의 무술시연을 눈여겨본 한 영화 제작자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이미 많은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무도인이 되었지만 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던 그는 아내 린다, 그리고 두 살배기 아들 이국호(브랜든 리)를 데리고 또 다른 모험의 땅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다. 1965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다. 그 뒤로 이소룡은 여러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출연했다. 데뷔작은 ‘그린호넷’이라는 시리즈물로 이소룡은 주인공을 보좌하는 ‘가토’라는 일본인 역을 맡았다. 이소룡은 그 무렵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최악이다. 내가 할리우드에 처음 발을 디딘 1965년, 나는 ‘그린호넷’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출연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중에 정작 나, 이소룡이라는 사람은 없었고 단지 로봇 한 대가 있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나인 내가 아니었고 외부적인 안정을 이루는 데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위적인 시스템과 형식, 고정된 패턴과 정해진 조건에 대해 격정적인 반발심을 보이던 이소룡에게 할리우드의 거대한 제작 시스템은 스스로를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미국 액션영화 시장에서 무예영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권총잡이들의 무용담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서부영화에서는 오로지 총만 다루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육체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제작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미국 제작사가 아닌 홍콩의 영화제작사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자신이 원하던 영화를 찍게 된다. 이소룡 신화의 신호탄이 된 영화 ‘당산대형’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홍콩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크게 흥행한 이 영화는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관객의 눈으로 보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많다. 이소룡의 발차기에 날아간 상대가 창고 벽면에 그대로 형체를 남기며 쓰러지는 만화 같은 장면이 그것이다.
이소룡이 창시한 절권도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실전무술로 ‘자기 실현’이라는 이소룡 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한 것이다.
“20년이 넘는 배우 생활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배우는 죽도록 힘들게 일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이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육체와 영혼을 사로잡는 자기표현의 예술가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배우란 ‘그 사람이게 하는 모든 것의 합’이다. 인생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력, 특유의 취향, 행복과 고난의 경험, 집중력, 교육배경 등 그 사람이게 하는 모든 것이 합쳐져 나오는 것이 바로 연기다.”
용의 기운과 같은 자기실현 욕구
‘당산대형’(1971)으로부터 ‘정무문’(1972), 그가 직접 감독까지 맡은 ‘맹룡과강’(1972), ‘용쟁호투’(1973), 그리고 미완성작 ‘사망유희’(1973)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소룡은 수많은 극중의 적과 실제로 사투를 벌였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이르기 3년 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무섭게 타올랐던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이 아닐까. 승천하려는 용의 기운을 인간의 몸은 버티어내지 못했고 그는 1973년 ‘용쟁호투’ 녹음 작업 직후 여배우 정패의 집에서 쓰러져서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사망원인은 특정 약물에 대한 과민증으로 인한 뇌수종으로 밝혀졌지만 정패의 집에서 죽은 것을 두고 복상사했다느니, 아들 브랜든 리까지 이어진 죽음의 고리를 두고 집안에 씐 저주 때문이었다느니 소문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마지막 숨쉬는 순간까지 자기실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던 한 순수한 영혼에 대해 산 자들이 덧붙인 군더더기일 뿐이다.
이처럼 강렬한 불꽃처럼 살다간 이소룡의 생애에서 가장 경이로운 점은 32세의 청년이 남기고 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범위한 사유의 흔적이다. 이 점은 그의 액션스타 이미지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이소룡은 스스로 철학으로 계몽됐다고 말할 만큼 다양한 철학사상을 열성적으로 탐구했다.
그의 서재에는 동서양,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철학서가 빼곡했으며 바쁜 촬영일정 속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열성적으로 책을 읽거나 순간순간 떠오르는 철학적 영감을 메모로 남겨뒀다. 특히 탐독했던 책들을 살펴보면 그가 지향한 철학적 이상향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데, 노자(老子)의 도덕경,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제임스 앨런의 명상 서적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설파한 지혜와 실제 삶이 별반 다르지 않던 사람들로, 노자는 나중에 신선이 됐다고 할 만큼 은둔과 무위자연의 삶을 살았으며,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제임스 앨런 역시 세속의 형식이나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아를 깨닫기 위한 명상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줬다.
마찬가지로 이소룡의 육체와 생애는 그가 사유한 철학적 영역을 대변하고 있기에 우리는 여타의 아카데믹한 철학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보다 훨씬 더 강렬한 깨달음을 이소룡에게서 얻을 수 있다. 그가 남긴 노트들과 소장 도서 곳곳에 적어놓은 메모,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던 지인들과의 편지, 인터뷰,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집결되어 탄생한 절권도 등을 통해 살펴볼 때 이소룡이 깨달은 가장 중요한 철학적 가치는 ‘자기실현’이다. 관습적인 형식과 방법, 복잡한 체계와 거대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데 좀더 많은 힘을, 그리고 기존의 질서가 강요하는 이미지가 아닌 실제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도교의 일원론과 음양사상, 그리고 선불교, 명상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정리된 그의 철학은 그가 남긴 방대한 어록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스티브 매퀸의 회상은 이소룡이 무엇을 위해 짧은 삶을 불태웠는지 잘 말해준다.
“나는 이소룡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해 탁월한 견해를 보여준 철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보다 ‘나, 이소룡은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앎을 통해 새로운 지식으로 자신을 확장하려 했다. 이소룡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장시간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하곤 했다.
‘당신이 그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인생의 그 어떤 달콤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인생을 살아가며 이처럼 명확한 지침을 알지 못한다.”
실제로 이길 수 있는 싸움기술
그의 철학에서 육체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아주 효과적인 도구였고 그가 창시한 절권도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실전무술로 이소룡 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한 것이다. 사실 이소룡의 절권도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에 비유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정치라는 것이 덕성과 윤리, 도덕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와 폭력 그리고 권모술수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듯이 이소룡의 절권도는 무예의 기량이 형식적인 훈련방식이나 정신수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낭심 잡아뜯기’나 ‘눈 찌르기’처럼 치졸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길 수 있는 싸움기술에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소룡은 무술의 목적이 결국 상대를 최대한 빨리 제압하는 것이라는 것을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소룡 무술의 인기비결이기도 하다. 모든 정치인이 자신은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면서도 그의 ‘군주론’에서 많은 것을 수혈하듯이 무도인들도 일정한 틀이 없는 절권도를 외면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소룡의 실전 파괴력을 흠모하는 것이다.
한편 이소룡은 자신의 철학적 깨달음과 무예기술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철학 아포리즘은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진리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시하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방식으로 생각을 진전시키게 자극한다. 주로 아포리즘이란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남긴 것은 ‘거짓 스승은 화려한 말을 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소룡은 여타의 신비주의적인 무도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수련방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나누는 것을 즐겼다. 얼마 전 이소룡과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황인식 선생이 자신의 앉아돌려차기, 발 막기 기술 등을 이소룡이 금방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이소룡을 가리켜 ‘카피머신’이라고 했다는 인터뷰 기사가 있는데, 이것은 가르침을 받고 또 가르침을 주는 방식에 대한 이소룡의 유연한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나은 장점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누구라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울 자세가 돼 있었으며 자신이 아는 것을 남에게 나눠주는 데에도 한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이렇듯 자신의 삶을 자신의 팔이 닿지 않는 저 너머로 단 한순간도 떼어놓지 않던 그의 젊은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그것은 놀랍게도 삶에 대한 상실감과 허망함이 아닌 ‘자신감’과 ‘희망’이다. 이소룡은 다른 누군가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거나 다른 누군가의 도구로서 살기엔 인생은 너무도 짧으며, 내 스스로의 의지와 자신감으로 살 때 그 인생은 영원토록 영광스러운 것임을 그의 온 삶과 온 죽음으로 웅변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전진할 것이다. 비록 내가 품은 모든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언젠가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 모든 성의와 능력을 다 바쳐 내가 원하는 것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올해 홍콩에서는 11월27일 이소룡 탄생 65주년을 맞아 높이 2m 정도의 이소룡 동상이 세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이소룡 동상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도시가 있다. 뜻밖에도 민족·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는 보스니아의 모스타르시다. 모스타르시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이소룡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간디를 제치고 보스니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환영받는 동시에 민족간의 연대를 상징하기에 적절한 인물로 뽑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스타르 시민은 이소룡을 우정과 고귀함, 정의의 상징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소룡이라는 인물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폭넓게, 그리고 얼마나 촘촘하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서구인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너무도 강렬해 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대국 일본의 위상을 능가한다고 한다.
유행은 대략 20년마다 되풀이된다고 한다. 아마도 대중문화의 주소비층인 10대가 30대가 되면 여유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20년 전의 자기 모습을 반추하며 10대 때 양껏 누리지 못했던 유행을 다시 소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소룡 영화를 극장에서 본 세대라면 이소룡이라는 아이콘은, 아직 삶의 때가 타지 않았던 그들 자신의 젊은 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질 것이다.
이소룡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던 엑스트라로 출발해 홍콩 무술영화의 2세대가 된 성룡과 홍금보는 물론이려니와 자신의 모든 영화는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라고 스스럼없이 밝히는 주성치,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의 유하, 이소룡 흉내 내기를 즐기는 코미디언 이경규, 하다못해 술만 먹으면 이소룡의 괴조음 ‘아비오…’를 외치며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평범한 아저씨들까지, 그 어떤 모습이더라도 이소룡은 젊음과 도전의 상징으로 각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한 세대가 지나간 그의 빛바랜 영상을 보는 새로운 세대 역시 이전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이소룡을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소룡이라는 유행의 주기는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이쯤 되면 그것은 이제 유행이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전이다. 젊음과 도전, 그리고 강인함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소룡, 그는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