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김연아 등 메달리스트말고도 또 다른 ‘영웅’을 탄생시켰다. 지난 10년 넘게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 선수였지만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던 이규혁(32·서울시청) 선수다. 그가 또다시 메달을 따지 못하고 경기장 한쪽에 누워버렸을 때 이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빙상 담당 기자를 할 때인 4년 전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전후해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기억난다. 당시 네 번째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였다. 첫인상은 ‘과연 운동선수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체구가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뻣뻣하고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경기장에서 다시 그를 봤는데 장내 아나운서가 그의 출전 차례에 ‘이, 규, 혁!’하고 호명하자 경기장을 가득 채운 서양인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박수를 보내 ‘이 정도로 유명한 선수였나’ 하고 놀란 기억이 있다.
빙상 담당 기자를 그만두면서 그 후론 이규혁을 보지 못했다. 4년의 세월이 지나 TV브라운관에서 그를 다시 봤다. 2010 밴쿠버올림픽에서 메달은 또 따지 못했고 경기장 한쪽에 누워버린 이규혁, 눈물을 글썽이며 기자회견을 하는 이규혁이었다.
올림픽도 끝나 국내로 돌아온 그에게 빙상경기연맹을 통해 얻은 연락처로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인터뷰를 포기할 때쯤 전화가 왔다. 최근에 휴대전화를 바꿔 옛날 번호의 휴대전화는 거의 사용을 안 한다고 했다. 목소리는 밝았다. 꽉 짜인 스케줄을 겨우 조정해 약속을 잡았다. 3월9일 낮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마침내 그를 만났다. 가죽 재킷 차림에 여전히 까무잡잡한 얼굴.
▼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도 못 땄는데 관심은 꽤 많이 받았죠.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너무 슬퍼 보여 그런 게 아닐까요(웃음). 시합 끝나고는 정말 힘들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죠. 인터뷰도 싫었고 숨고만 싶었어요. 이번에는 정말 메달을 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국내에서도, 외국에서도 저의 우승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고요. 준비하는 과정도 딱딱 잘 진행됐죠. 그런데 한순간에 무너지니까 오만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들더라고요. 올림픽을 실패로 끝낸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런데 (기자회견을) 한 번은 해야 한다고 해서 끌려가다시피 그 자리에 갔어요. ‘그래 이왕 할 거면 당당하게, 쿨하고 깔끔하게 얘기하고 내려오자’ 마음을 다잡고 갔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남자가 눈물 흘리는 게 뭐 좋은 일이에요. 실패한 선수로서 바람은 그냥 모른 척해줬으면 하는 건데…. 어쨌든 그 자리에서 말씀드린 게 다 제 속마음이었어요. 당시 순간에 떠오른 많은 생각, 실패에 대한 생각 그런 부분을 다 진심으로 얘기했기 때문에 많은 분이 들어주신 것 같아요. 약간의 가식이나 연출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위로를 안 해주셨을 거예요.”
올림픽, 꿈이자 목표였다
▼ 다르게 보면 빙상 선수로 올림픽 빼곤 이룰 건 다 이뤘잖아요.
“올림픽이 저한테는 꿈이고 목표였으니까요. 다 이룬 거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도 이루지 못한 느낌이에요.”
▼ 올림픽은 선수들에게 어느 정도의 대회인가요.
“최종 목표죠.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땄다는 것은 운동선수로선 좀 부족한 이미지를 주죠. 이번엔 어린 선수들이 메달을 땄잖아요. 그 선수들은 그 메달 하나로 앞으로 세계선수권 같은 대회에서, 물론 좋은 성적을 내겠지만, 성적 못 내도 영원히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남잖아요. 저 같은 경우엔 억울하죠. 20년 동안 해서 얻은 명성보다 단 한 번의 올림픽 메달로 얻는 명성이 더 클 수 있으니까요.”
▼ 메달로 얻는 명성도 중요하겠지만 기록을 앞당기거나 선수로서 보람을 얻는 다른 부분도 있지 않나요.
“그렇죠. 저희는 기록경기니까. 기록을 단축해 대회에 우승하고 또 기록을 앞당기고…. 물론 그런 것으로 얻는 성취감도 있어요. 하지만 다들 그것이 올림픽을 위한 전초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 더 힘들 수도 있어요. 운이나 상황이 아니라 정말 기량이 뛰어나야 우승할 수 있는 대회죠. 하지만 세계선수권 몇 번 우승해도 올림픽 메달이 없다는 평가를 받잖아요. 물론 이번엔 많은 분이 응원해주셨고 제가 메달을 못 땄는데도 지금 같은 대접을 해주시니까 좀 생각이 바뀌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평생을 봤을 때 운동선수로서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딴 건 정말 큰 타격이죠.”
▼ 세계 정상급 선수인데 유독 올림픽에선 부진한 경우가 많던데요. 제러미 워더스푼도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못 땄잖아요.
“그 친구는 저보다 더 좋은 위치에서 도전을 많이 했죠. 세계 정상이라는 위치에서 받는 심리적 부담, 압박감은 분명 있는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저보다 (실력이) 훨씬 나을 때 전 ‘저 친구가 왜 저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번 올림픽을 치르면서 똑같은 상황에 처하니까 상황이 이해되더라고요. 그 친구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시즌 마지막 시합을 하고 은퇴할 계획이었는데 올림픽 때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더라고요. 마지막 시합을 못하게 된 거죠. 저한테는 오랜 친구라 그 얘기 들었을 때 안타깝고 슬펐어요.”
캐나다 출신의 워더스푼(34)은 세계에서 역대 가장 뛰어난 스프린터로 꼽힌다. 1m90㎝의 키에 85㎏의 거구인 그는 현재 500m 세계기록 보유자이고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4차례 우승에 월드컵 시리즈 종합 우승을 13번이나 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부터 이번 밴쿠버올림픽까지 4차례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게 최고 성적. 끝내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빙상 강국인 캐나다에 비하면 한국의 여건은 비교하지 못할 만큼 열악하다. 빙상의 불모지에서 이규혁이란 인물이 혜성처럼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이규혁은 신사중학교 재학 시절인 13세 때 국가대표가 돼 성인들과 경쟁했다. 그야말로 ‘빙상 신동’이었다. 이규혁을 얘기할 때 그의 가족 얘기가 빠질 수 없다.
이규혁의 아버지는 왕년의 스피드스케이팅 대표 선수인 이익환(62)씨고, 어머니는 피겨 국가대표 출신으로 현재 ‘한국 피겨의 대모’로 통하는 이인숙(52)씨다. 동생 이규현(30)씨도 피겨스케이팅 코치로 활동 중이다. 외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스케이트화를 만드는 사업을 해왔다. 이규혁의 어머니 이름을 따 외할아버지가 만든 ‘인숙 스케이트’ 브랜드는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 엘리트 선수들이 신던 국내 최고의 브랜드였다. 그러니 이규혁에게 빙상인의 DNA가 흐를 수밖에 없다.
몸에 흐르는 빙상 DNA
▼ 빙상 가족의 일원인데, 자연스럽게 선수가 됐나요, 아니면 부모님이 끌어주셨나요.
“그냥 자연스러웠어요. 스케이트를 신기 시작한 게 서너 살 때부터라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제가 어릴 때부터 스케이트 코치를 하셨으니까 동생 규현이랑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면 스케이트를 신고 놀았죠. 그러다가 빙상반이 있는 리라초등학교를 다녔죠. 클럽 활동반 중에서도 선수반이 있었어요. 거기서 선수처럼 스케이트화 신고 유니폼도 갖춰 입고 시합도 뛰었고요. 시합 나가서 메달도 곧잘 따니까 주위에서 선수 해라 그러고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선수를 시키자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다른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어릴 때는 동생이랑 같이 스피드스케이팅을 했는데 어느 날 시합에 나가서 이규혁이 1등을 하고 동생이 2등을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걸 보시고 한 명은 피겨를 해라, 형제끼리 경쟁하는 건 안 좋다고 얘기하니 둘 다 피겨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규혁은 “피겨는 상황 자체가 따뜻해 보였다. 엄마랑 항상 같이 다닐 수 있고 엄마 주위에 누나들이 있어 예쁨 받으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가면서 운동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 아버지가 굉장히 엄격하셨지요?
“저는 많이 맞았어요. 경기장에 저희 부모님은 잘 안 나오셨어요. 1인자 소리 듣고 올림픽 도전하기 시작할 때부터 나오셨거든요. 아버지는 가끔 나오셨는데 그때 성적이 안 좋으면 많이 맞았죠. 가끔 나오시는데 잘못하면 맞으니까 그때마다 많이 긴장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도 저에게 부담 안 주시려고 이번에 밴쿠버에도 안 오신 것 같고요. 어머니가 요즘엔 굉장히 챙기세요. 어릴 땐 안 그랬어요. 제가 엄마한테 우스갯소리로 ‘엄마는 이제 와서 날 마마보이로 만드느냐’ 그러죠. 그 정도로 어릴 땐 안 챙겨주셨어요.”
▼ 직업 선수로 스케이트를 타는구나 하는 생각은 언제 갖게 됐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소개받을 때 ‘스케이트 선수 이규혁’이 자연스러웠어요. 중학교 때 국가대표까지 됐으니 스케이트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죠.”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경기장에 누워버린 이규혁 선수.
“1등을 하는 것보다 즐거운 게 어디 있어요. 아주 쉽게 1등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수라도 속마음은 분명 즐거워할 거예요. 물론 저에게 어릴 때부터 강한 라이벌이 있었더라면 국제적으로 좀 더 경쟁력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요. 쉽게 1등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그 자리를 유지했으니까 한 번 더 (훈련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이쯤이면 되겠지 하는 마음도 들었죠.”
▼ 이규혁 장기 집권 때문에 쇼트트랙 종목으로 바꾼 선수도 많았죠? 쇼트트랙 스타 김동성도 이규혁 때문에 쇼트트랙으로 바꿨다고 하던데요.
“제 또래 선수들은 거의 다 (쇼트트랙으로) 넘어갔죠.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사실 그 친구(김동성)는 보이지도 않았어요. 같이 시합 뛰면 반 바퀴 차이 나고 했으니까요. 전 또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친구는 저보다 어렸고, 전 초등학교 때는 중·고등학교 형들하고 시합하고 중학교 때는 대표급 선수들과 시합했기 때문에 제 또래와는 시합할 일도 거의 없었고요. 다들 쇼트트랙으로 자연스럽게 가더라고요. 그래서 (올림픽) 메달 땄으니 됐지요 뭐.”
▼ 한국 빙상의 역사를 오랫동안 함께해왔는데 국내 빙상 여건을 선진국하고 비교하면 얼마나 열악한가요. 예전엔 강가의 논을 얼려 시합도 했다던데요. 어떨 때는 경기장 안으로 모래도 날아왔다면서요.
“여건으로 따지면 저희 수준은 100위권이죠. (외국 선수들이) 우리 같은 여건에서 같이 운동한다고 하면 한국 선수를 이길 수 있는 선수는 없을 거예요. 예전엔 야외 경기장이었죠. 지금의 태릉국제빙상장도 예전엔 야외 경기장이었으니까요. 저는 야외 경기장과 실내 경기장을 다 겪은 세대인데요, 그래도 야외 경기장에서 할 때가 그리울 때가 있어요. 실내 경기장에선 스케이트 탈 때의 상쾌한 맛이 없어요. 야외 경기장에선 바람도 불고 가끔 눈도 오고 해서 이변도 많았어요. 그때 빙상은 독특한 맛이 있었죠. 요즘은 그런 낭만이 없어 각박해진 것 같아요. 아날로그는 다 없어진 거죠.”
20년의 준비
▼ 외할머니(원순남씨)도 가끔 대회에 나오셨다면서요.
“외할머니는 늘 대회에 오셨어요. 올해에도 큰 대회엔 할머니가 오세요. 외할아버지가 빙상계 원로시니까 추모대회에도 참석하시고요. 할머니가 스케이팅을 굉장히 좋아하세요. 할머니가 1933년생이세요. 올해 일흔여덟. 그런데 정정하다 못해 패션 리더예요. 저에겐 다치지만 말라고 하시죠. 시즌 전에 체중 조절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와 같이 있으면 체중조절을 못해요. 계속 먹을 걸 갖고 오시니까. 하루에 다섯 끼를 먹죠.”
▼ 시즌 전에 체중이 불었다가 시즌 앞두고 다시 빼는 건가요?
“예전엔 시즌 때와 비시즌 때 체중이 5, 6㎏씩 차이가 나곤 했어요. 빼려고 해서 빠지는 게 아니고 스트레스 받아서 빠져요. 성적이 좀 좋아지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가벼운 체중을 유지했어요. 체중이 줄면 한번 쓰는 파워(순발력)는 줄 수 있는데 여러 번 쓰는 파워(지구력)는 좋아지더라고요. 그게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체중이 가벼우면 또 피로감이 덜하더라고요. 예전엔 한번 훈련하고 쉬었는데 체중을 줄인 이후엔 두세 번 하고 쉬어요.”
▼ 지금은 30대 초반인데 20대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을 텐데요.
“20대 때는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을 구분 못하고 이것저것 많이 했던 것 같아요. 30대 때는 불필요한 것을 많이 쳐낸 거죠. 어떤 것에 대해 불필요하다고 느끼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아요. 뛰는 것도 그래요. 체력 유지와 근육을 만드는 데 뛰는 것이 필요하거든요. 대표팀 프로그램 중에 20년 동안 안 바뀐 게 있는 데 인터벌 트레이닝이에요. 200m를 스무 번, 400m를 열 번 뛰는 식이죠. 1주일에 한 번은 꼭 해요. 전 뛰는 게 싫어서 안 했어요. 하더라도 억지로 했죠. 그런데 제가 필요하다 생각해서 하니까 달리기 훈련에 안 빠지게 되더라고요. 열심히 한 지 3, 4년밖에 안됐어요.”
▼ 여자친구도 훈련에 방해된다고 안 사귀었다고 하던데….
“여자친구가 없었다기보다 만나는 방식이 좀 달라진 거죠. 나이도 있으니까 진지하게 만나다가 그 친구랑 싸우면 한 주, 길게는 한 달 동안 스트레스 받는 거잖아요. 운동하는 시간 이외엔 여자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와 같이 시간을 보낼 텐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사실 (여자) 친구는 많아요. (여자친구와 관계에) 비중을 많이 둬 생활하지 않았다는 거죠.”
▼ 본인 성격은 어떤 것 같아요. 짜증이 좀 많다고 하던데….
“시기가 있어요. 시즌 땐 굉장히 예민해요. 누가 건드리면 바로 폭발하죠. 쌍욕 나가고 집어 던지고 그래요. 시즌 끝나면 180도 달라져요. 누가 건드려도 신경도 안 써요. 뭐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냐 그러는데, 저도 시즌 끝나고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데 그렇게 되더라고요. 시즌이 11월부터 3월까진데 2, 3월이 피크인 것 같아요. 11월만 해도 후배들한테 뭐라고 그러지도 않아요. 그런데 12월부턴 그렇게 돼요. 올림픽 준비할 때는 말할 것도 없죠.”
네 번째 올림픽에 도전한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했을 때 이규혁은 사실 은퇴를 생각했다. 당시 남자 1000m 성적은 아쉬웠다. 전체 21개 조 가운데 20번째 조로 경기에 나섰고 3위의 기록인 1분09초37에 결승선을 끊었다. 이규혁은 전광판에 뜬 자신의 기록을 보며 해냈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지만 마지막 조에서 뛴 네덜란드의 에르벤 베네마르스(1분09초32)에 0.05초차로 뒤져 4위로 밀렸다. 이규혁은 “다시 4년간 힘든 훈련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내년 창춘 동계아시아경기대회 이후 은퇴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 시즌부터 그의 기록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창춘 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선 1000m와 1500m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500m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 토리노 대회 끝나고 은퇴 얘기도 했는데 이후로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듯이 성적이 좋아졌잖아요. 그 과정에 대해 얘기 좀 해주세요.
“2006년 올림픽 때 전 한계를 알았다고 생각했어요. 올림픽 네 번 출전이 적은 횟수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한 번도 메달을 못 땄다는 사실이, 아, 나는 여기까지구나. 올림픽은 내가 메달을 딸 수 없는 대회구나, 그랬던 거죠. 그래도 그 이듬해 아시안게임 준비하면서 어차피 한 시즌은 더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시안게임 준비는 올림픽하고는 다른 분위기였어요. 마음이 편안했죠. 그전엔 기존의 훈련 방법에 좀 변화를 주고 싶어도 불안해서 못하던 걸 다 시도해본 거죠. 그러면서 성적이 좋아지니까, 아 이런 식으로 3년을 더 버티면 올림픽에 또 도전해볼 수 있겠구나 했던 거죠. 그 다음해, 다음해에도 성적이 계속 잘 나오니까 자신감을 얻었죠.”
이규혁은 2007년 단거리 세계 최강자를 가리는 세계스프린트선수권에서 생애 첫 우승을 한 뒤 2008년, 2010년에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를 3차례 이상 우승한 선수는 역대 통틀어 전세계에서 단 4명뿐이다.
올림픽 심리학
▼ 그 기간이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생활을 하면서 성적이 가장 좋았던 시기였죠. 그래서 이번 올림픽이 더 아쉽겠어요.
“올림픽은 실패하면 무조건 아쉬워요. 30등을 하던 선수도 나가서 메달을 못 따고 오면 우울하죠. 올림픽 이후에 분위기가 그렇잖아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와 못 딴 선수가 완전히 다르죠. 평생 올림픽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또 올림픽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잖아요. 그래서 올림픽이 끝나면 성적이 어떻든 허무하고 허탈한 순간이 오죠.”
▼ 리라초등학교, 신사중, 경기고, 고려대 이렇게 다니셨죠.
“제가 배운 건 없어도 학벌은 꽤 괜찮죠.”
▼ 학교 수업은 거의 못 들었죠?
“그렇죠. 선수들이 다 그래요. 나중에 석·박사 과정 밟을 때만 좀 공부하는 것 같아요.”
▼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인터뷰 내내 속사포처럼 말이 빨랐던 그가 이 질문에는 뜸을 들였다. 그는 “심리학을 공부해보고 싶다”고 했다.
▼ 올림픽마다 심리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인가요?
“그런 부분도 있어요. 전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게 심리라고 생각해요. 올림픽 출전해서 메달 노리는 선수들 실력은 별로 차이가 없어요. 선수들이 어떤 생각,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느냐가 결국 경기력의 차이로 나타나죠. 그래서 심리학이 궁금해요.”
▼ 모태범이나 이승훈 선수가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게 오히려 성적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인가요?
“쉽게 말하면 그 친구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죠. 자기가 잘했을 때, 좋은 성적을 냈을 때의 이미지만 있었던 거죠. 경기할 때는 아무 생각 안 하는 게 유리한 것 같아요. 생각이 많으면 실수가 많아져요. 저도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시합 바로 전 쉬는 시간에 컨트롤이 잘 안됐던 것 같아요. 시합이 아니라면 커피 마시면서 그냥 쉬잖아요. 그런데 시합을 앞두고는 커피를 마실 때도 ‘내가 레이스를 어떻게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에 빠져 있어요. 30초 만에 끝나는 경기를 24시간, 잠자는 시간 빼놓고, 아니 잠잘 때도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 선수가 그럴 거예요. 그 마인드컨트롤을 어떻게 하느냐가 기술이죠.
전 올림픽을 제외한 다른 경기에선 그게 잘돼요. 세계선수권도 정말 긴장이 많이 되거든요. 네 번의 시합을 다 잘해야 하는 데 레이스를 하면 할수록 선두를 다투는 선수끼리 붙게 되잖아요. 500m에서 못 탔으면 1000m에서 만회해야 하고 그런 과정이 계속 압박감으로 다가오죠. 그런데 세계선수권은 우승을 해봤으니까 레이스 운영을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실력이 좀 안 되더라도 심리적으로 어떻게 하면 1등을 끌어내릴 수 있겠다 하는 전략이 생기죠.”
▼ 올림픽에선 메달을 따지 못한 경험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아닌가요.
“맞아요. 만약 제가 1998년 올림픽 때 메달을 땄으면 이후에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을 거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안 되니까 올림픽이 저에게 다른 거예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거죠. (이)상화나 (모)태범이나 이번 대회에 메달 딴 건 정말 큰 행운이죠. 이 친구들은 4년 뒤에도 자기에겐 메달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안정적으로 시합에 임할 수 있을 거예요. 사실 메달보다 그게 더 큰 것 같아요. 그게 올림픽인 것 같아요.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정해준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실력만 가지고는 딸 수가 없으니까요.”
▼ 평소에 아끼는 물건이 혹시 있나요. 스케이트말고….
“스케이트는 이제 별로 안 아껴요. 전 새로 산 물건들을 더 아끼는 것 같아요. 휴대전화를 새로 사면 그걸 굉장히 아껴요. 바꿀 때가 되면 별로 안 아끼죠.”
▼ 물건에 대한 집착이 없나보네요.
“별로 집착이 없어요. 월드컵 대회에서 처음 메달 땄을 때 그 메달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겼어요. 그걸로 목걸이 하고 다니고 그랬죠. 시간 지나니까 뭐 또 그냥….”
▼ 지금까지 딴 메달이 한 300개쯤 된다면서요.
“안 세어봐서 잘 모르겠어요. 저희 집 들어가는 입구 쪽 사무실에 전시해놓았어요.”
▼ 그걸 쭉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예쁘구나 하는 정도.”
▼ 어릴 때는 5000m, 1만m 장거리 종목도 했더군요.
“어릴 땐 모든 종목을 다 뛰었어요. 500m부터 1만m까지 대회 나가면 다 1등이었어요. 그런데 단거리는 국가대표 형들한테는 안 되니까 중학교 때 장거리로 대표팀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쯤에는 단거리로 나머지 선수들 다 잡고 (제갈)성렬 형과 (김)윤만이 형만 남겨둔 거예요. 그때부턴 단거리로도 대표를 뛰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주니어 세계선수권에는 단거리부터 5000m까지 다 뛰어야 했기 때문에 계속 단거리와 장거리를 병행했어요. 1997년쯤부턴 윤만이 형과 성렬 형을 이기기 시작하면서 종목 비중을 단거리로 옮기게 됐지요.”
올림픽 이후
▼ 8개월간 준비하고 4개월 시즌 동안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그런 삶을 20년 이상 살아온 거죠.
“그렇죠. 똑같은 시스템으로. 요즘 은퇴 하느냐 마느냐 말이 많잖아요. 저도 생각이 많아요. 내년엔 동계 아시안게임이 있는데 한 번 더 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고민이에요. 그런데 제가 가장 걱정하는 게 그거예요. 운동을 그만두면 제가 지금껏 해온 20년 동안의 생활 사이클을 바꿔야 하는데 무슨 취미 생활을 가져야 하는지, 스케이트를 안 타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까지 답이 없더라고요.”
▼ 하루에 스케이트 신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되나요.
“신는 시간은 서너 시간이지만 그걸 타기 위해 준비하잖아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간단하게는 서너 시간이지만 저에겐 365일이죠. 3월 딱 한 달 쉬는데 쉬는 이유가 나머지 열한 달 스케이트를 타기 위해서 쉬는 거니까요. 지금 쉬고 있는데 이게 쉬는 게 아니에요. 한 달 푹 쉬고 다음달부터 운동하면 모르지만 운동을 안 한다고 하면 지금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죠. 그래서 저는 힘닿는 한에서 스케이트를 오래 타고 싶었어요. 주위 분들은 빨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고 은퇴하라 하는데, 만약에 메달 땄더라도 내년까지는 탔을 거예요. 원래 계획이 올림픽 메달 기준이 아니고 내가 스케이트를 타고 싶을 때까지 타는 게 기준이었거든요. 그런데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니까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하는 게 맞는 건지 말이죠. 사람들 만나서 얘기도 좀 해보고 해야 될 것 같아요.”
▼ 올림픽 메달이 없어서 자신을 선수로는 실패했다고 보나요.
“어느 정도 실패한 거죠. 많은 분이 위로해주고 응원해주시고 좋은 말도 많이 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론 실패죠. 올림픽 메달이 꿈이었기 때문에 이번 대회가 끝나고 나서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준비한 올림픽인데. 길게는 20년, 짧게는 4년을 준비해온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니까. 그런데 그때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났잖아요. 그렇게 힘들다가도 그게 지나가니까 4년 더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결론은 아니에요. 이렇게 준비해서 안됐는데 4년 더 준비한다고 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으니까요. 그래서 안타깝죠.”
제갈성렬 감독과의 인연
▼ 조언을 구하는 선배나 동료는 누구예요.
“성렬 형이죠. 제 입장을 너무 잘 아니까요. 형은 일단 내년 아시안게임까지는 타라고 해요. 저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어요. 만나서 얘기해봐야 할 사람들이 더 있어요. 내년에 대표팀 코칭스태프 변화도 있을 수 있으니까 잘 파악해야 되겠죠.”
▼ 제갈성렬 감독하고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나요. 성격이 잘 맞나보네요?
“형이랑 저랑 여덟 살 차이예요. 제가 대표팀 막내일 때 그 형이 주장이었고 저랑 또 룸메이트였어요. 그땐 저를 얼마나 힘들게 했겠어요.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 이번 대회 때 제갈성렬 감독의 해설이 논란이 좀 됐었는데….
“안 좋게 하차했잖아요. 형이 해설하는 거 다 보지는 못했는데 (이)상화 경기 하는 건 봤어요. 형이 해설하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오만방정을 다 떨었는데요. 제가 만약 상화 해설을 맡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 같아요. 선수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분할 수 있는 거고 그 흥분 때문에 보는 사람들도 같이 흥분할 수 있는 점도 있잖아요. 실수를 하긴 했지만 운동선수로, 올림픽에 실패했던 사람만이 갖는 감정이 또 있으니까 그걸 사람들이 좀 이해해주면 좋겠어요. 이승훈 경기 해설할 때 코스 이탈한 거 제대로 짚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선수가 1만m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렇게 도전해도 안되던 종목인데 그 흥분은 엄청나죠. 형한테 그랬어요. 밴쿠버에서 형이라도 좀 살아남지.”
▼ 추상적인 질문이지만 돌이켜보면 행복한 삶이었나요?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서른몇밖에 안됐지만 재밌게 운동했고 그리고 이번에 실패했지만 그 과정은 정말 재밌게 했어요. 운동, 사실 힘들잖아요. 하지만 내년부턴 못할지도 모르니까 준비하는 한순간 한순간이 정말 소중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밖으로 나가 나란히 걸었다. 인터넷의 한 포털 사이트에 올라 있는 그의 프로필에 키가 177㎝로 나와 있다. 아무래도 그 키는 아닌 것 같아 물었다.
“그거 다 틀려요. 174㎝에 몸무게는 73㎏ 정도. 제 생일도 다르게 나와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