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류민단’으로도 불렸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10월3일 64주년을 맞았다. 올해는 한일강제합방 100년이 되는 해여서 이들의 감회는 남다르다고 한다.
- 기자는 최근 일본 도쿄에서 정진 단장을 만나 재일교포들이 지난 64년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도쿄 아자부에 있는 소바(메밀가루로 만든 일본의 면 요리) 음식점인 ‘사라시나 본점’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자주 찾던 곳이다. 김 전 총재는 1962년 한일청구권 협상의 주역으로 일본과는 관련이 깊은 정치인이다.
사라시나 본점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의 정진 단장, 허맹도 부단장, 한재은 부단장, 정몽주 사무총장, 하정남 기획실장과 점심을 함께했다. 민단의 중앙본부 빌딩이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기자는 ‘냉(冷)소바’와 ‘새우 덴뿌라’를 시켜 먹었다. 면이 탄성이 있고 새우도 살이 차 있고 바삭해 맛이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정 단장 일행은 한국어에 일본어를 가끔 섞어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 부단장이 오사카의 재일교포 양로시설을 방문해 최고령 동포인 강옥이(105세) 할머니 등에게 5만엔씩 ‘장수축의금’을 전달하고 왔다는 이야기였다. 오사카의 양로시설은 원래는 조선인 학교였으나 학생이 줄면서 지금의 복지시설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100세 이상인 교포 28명이 생존해 있는데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한일강제합방을 맞이하면서 가장 먼저 근·현대사의 질곡으로 빠져든 세대인 셈이다.
정 단장은 “이분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여기 일본에 와서 식민지의 백성으로서 온갖 차별과 가난의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켜 재일교포사회의 초석을 쌓았다”고 했다.
식사가 끝나자 ‘소바유’라는, 소바 면을 고아낸 따뜻한 차가 나왔다. 간장을 조금 타서 마시는데 우리의 숭늉과 같은 구수한 맛이 났다. 민단 본부까지는 걸어서 갔다. 아자부는 에도 막부 시절 지배계층인 무사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으로 가는 방향의 오른쪽으로 나 있는 10번가 골목은 고급 쇼핑가로 통한다. 특히 이 곳은 서울의 광화문 사거리나 한남동처럼 도쿄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 공관과 관저가 밀집되어 있다.
“조국 돕겠다며 줘버렸다”
한국대사관도 아자부에 있는데 지금은 기존의 공관과 관저를 뜯어내고 새로 짓는 중이었다. 대사관 터는 3000여 평 정도로, 세계적으로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 중심가인 점을 감안하면 단일 시설물의 면적치고는 꽤 넓은 편이었다. 현지 부동산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대사관 터의 현 시세는 버블 붕괴 이전보다는 떨어졌지만 여전히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의 액수였다. 정 단장은 “도쿄에 있는 모든 외교 공관 중에서 위치와 면적에 있어 미국대사관 다음 규모로 꼽히는 곳이 한국대사관”이라고 설명했다.
이 한국대사관은 한국과 일본이 1965년 수교하기 이전 대표부 시절부터 사용되어왔다고 한다. ‘1960년대 가난한 한국 정부가 어떻게 당시에도 도쿄의 외교중심지였던 이곳에서 다른 선진국 공관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정 단장의 설명은 좀 놀라웠다. 한국대사관 터는 일본의 귀족이 살던 곳이었는데 재일교포로 판본방직의 사주이던 서갑호씨가 ‘조국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사들여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줘버렸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한국대사관 외에도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나고야, 고베, 후쿠오카, 삿포로, 센다이, 니가타, 히로시마 소재 10개의 한국영사관이 있는데 이들 영사관의 부지도 거의 대부분 재일교포가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오사카 영사관과 나고야 영사관은 1970년대 초반 이 도시의 민단이 중심이 되어 재일교포 경제인들의 모금으로 마련됐다고 한다. 민단 측에 따르면 고베 영사관은 재일교포 황공환씨가 메이지시대 유명한 료칸(일본의 전통 숙박시설)이던 곳을 사들여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고베 지진 때 바로 옆 NHK지국은 무너졌으나 이곳은 무사해 화제가 됐다고 한다. 히로시마 영사관은 교포들이 도움을 준 시모노세키 영사관을 팔아 건립한 것이다. 역시 교포들이 조력해 지어진 한옥풍의 후쿠오카 총영사관은 프로야구 소프트뱅크의 실내돔구장 부근에 있는데 중국 정부가 이 도시의 중국영사관을 한국영사관보다 더 잘 짓겠다며 심혈을 기울였으나 못 미친다는 평이라고 한다.
정 단장은 “재일교포들은 갖은 차별과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이름과 한국 국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로, 본국을 향한 애국심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642명의 재일교포는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다. 이들이 전후 일본으로 돌아와 민단의 중심이 됐다고 한다. 민단 측에 따르면 광복 후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정부의 예산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사회 인프라 구축, 새마을운동의 추진에 재일동포의 지원이 컸지만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100억엔의 올림픽 성금을 내놓았고,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땐 엔화 보내주기 운동으로 870억엔을 송금했다고 한다. 한 부단장은 “제주도 출신 교포들은 고향 각지에 전기, 상하수도를 깔고 길을 놓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했다.
야만과 광기로부터 지켜냈기에…
재일교포에 대해 일본에선 한국인으로 여기고 한국에선 절반쯤 일본인으로 보는 ‘경계인’이라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정작 교포들 본인은 오랜 차별 속에서 민족적 주체의식을 더 단련해온 측면이 있고 이러한 점이 본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표출되어왔다고 한다. 한반도 이외의 세계에는 약 750만명의 한인(韓人)이 흩어져 살고 있다. 미국, 호주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교민들은 ‘한인회’를 만들어 활동한다. 유독 재일교포들만 ‘한인회’ 대신 ‘민단’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정 단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나라의 교민들과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죠. 한일강제합방 이전에도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살기 시작했는데 민단의 기원은 그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단’에서 ‘민’은 ‘국민’을, ‘단’은 ‘단결’을 의미합니다. 즉, ‘국민의 단결’이라는 뜻이죠. 한민족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만주 등 여러 곳에서 싸우면서 수많은 ‘단’을 만들었어요. 흥사단도 그중 하나고요. 함께 뭉치지 않으면 민족의 이름으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민단이라는 말 속에는 제국주의 압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는 신념이 들어 있어요. 이것은 모든 한민족에게 여전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민단 내에서도 1994년 규약 개정시 ‘재일본한인회’라는 이해하기 쉬운 명칭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국민의 단결’이라는 이름으로 포괄되는, 일본사회에서 한국 국적자로 살아온 도전과 응전의 시간이 너무나 특별했는지 모른다. 민단이란 재일교포의 삶 전체를 관통해온 어떤 공동체적 경험의 총화를 상징하므로 그 이름과 역사를 자신으로부터 끊어낼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단 중앙본부 건물 내의 박물관에는 ‘조선을 먹었다’는 상징으로 백두산 호랑이를 요리해 도쿄 데이고쿠(帝國) 호텔 대연회장에서 공동으로 시식하는 일본제국 지도층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옆으로는 1923년 도쿄대지진 당시 6000여 명의 한국인이 학살당한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폭력과 야만, 광기로부터 지켜낸 것이기에 민족이 주는 의미는 재일동포들에게 남다르다고 한다(정몽주 민단 사무총장).
통상적으로 재일교포는 현재 한국 국적을 가진, 광복 이전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 1세대 및 그의 후손 세대들로 정의된다.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에 남게 된 역사적 특수성이 인정되어 ‘특별영주권’을 부여받는다. 이외 이른바 ‘뉴커머(new comer)’로 불리는, 최근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와 정착하는 한국 국적자들이 있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자는 57만~60만명이다.
조총련계 등 북한 국적자는 3만~1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2004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를 사과한 후 조총련계 상당수가 이에 실망해 북한 국적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금은 조선인학교 졸업생들이 조총련의 주 기반으로 이것이 ‘교육의 힘’이라고 한다.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귀화자’로 불리는, 한국 국적에서 일본 국적으로 바꾼 사람들은 지금까지 31만명 정도다. 민단 관계자는 “국적이 아닌 민족 개념으로 볼 때,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은 130만~1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민단은 1994년부터 재일동포를 국적 개념에서 민족 개념으로 바꿔 일본 국적자인 한민족도 단원으로 받아들여 부단장까지 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뉴커머도 단원으로 수용하고 있다. 민단은 중앙본부, 49개 지방본부, 290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중앙본부 건물 및 각 지방본부 건물, 150개 자치회관 등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민단 관계자는 “운영비는 단원들이 내는 단비, 경제인들의 후원, 한국 정부의 보조금에서 마련한다”고 했다. 단장, 의장, 감찰위원장은 대의원 및 선거인단(550명)의 선거로 3년마다 선출되는데 선거 열기가 뜨거운 편이라고 한다.
45만 재일교포, 차기대선에 투표
민단은 한일강제합방 100년이 되는 올해 11월 서울에서 대규모 심포지엄을 열 예정이다. 매년 1만명 정도씩 한국 국적자가 줄어드는 것은 재일교포사회와 민단에는 위기로 받아들여지는 정황이다. 반면 2012년부터 재일교포 등 재외국민이 한국 대선과 총선에 투표할 수 있게 된 점은 새로운 기회가 된다.
민단 측에 따르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재일교포는 45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재미교포 유권자는 이보다 더 많다. 한국 대선에서 40만~50만표 안팎으로 당락이 갈리는 사례가 잦았던 점을 감안하면 재일·재미교포 유권자는 무시하지 못할 변수가 될 수 있다. 교포사회에선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10만표 이상만 나와도 본국에서 크게 놀라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문제는 투표율. 일본 밖으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재일교포는 투표를 위해선 한국 여권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권 관계자는 “재외국민은 해당 국가의 한국 영사관에서 투표하게 되는데 투표율은 본국에 대한 재외국민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지는 정 단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교포사회에선 한국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연간 20만명의 재일교포가 본국을 왕래해요. 이들 거의 대부분은 한국 국적기를 이용합니다. 본국에 대한 애착이 강해요. 그러나 우리는 무권리 상태에서 권리 상태로 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본국이 참정권을 부여해줌으로써 비로소 권리를 갖는 존재가 됐어요.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에요.”
일본 정부가 만든 말, ‘귀화’
▼ 일본에 대해선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투표권은 아니더라도 지자체선거의 참정권은 달라고 요구하고 있죠?
“오래전부터 요청하고 있는데 아직 가시적 성과가 없어요. ‘일본이 이렇게 폐쇄적 환경인가’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일본이 아시아의 리더 국가가 되기 위해선 마음을 더 열어야 한다고 봅니다.”
▼ 한국 선거의 참정권을 얻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매년 한국 국적자가 1만명씩 줄어드는 건 어떻게 보나요? 지금 60만명 정도이니 이런 추세라면 60년 뒤에는 거의 사라지게 되는 건가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감소 추세는 멈출 것으로 기대합니다. 한국 국적에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대개 ‘귀화’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안 써요. 귀화는 일본사회 내에 이미 존재하는 한국인의 민족성을 부인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처음 사용한 뒤 한국 정부도 받아쓰면서 한일 양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국적을 옮긴 뒤엔 한민족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많았죠. 우리는 사실 그대로의 의미로 ‘일본국적취득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엔 일본국적을 취득해도 한민족이라는 민족정체성은 그대로 남는다는 함의(含意)가 있죠. 그래서 일본국적취득자도 민단에 가입해 함께 교류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요.”
▼ 한국에선 한국국적 취득을 두고 ‘귀화’라는 말을 잘 안 쓰는데….
“그만큼 한국사회가 일본사회보다 변화와 개방의 속도가 빠르다는 의미죠. 다만 한국사회가 글로벌화하는 과정에서 ‘민족’을 낡은 개념으로 폄하한다든지 하는 분위기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회의 글로벌화는 전세계의 한민족을 더 공고히 엮어 민족 통일과 번영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로 나아가야 해요.”
▼ 재일교포의 감소 추세가 진정될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뭔가요?
“한국의 국력이 크게 신장하면서 2004년부터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수가 줄어들고 있어요. 손자가 한국 이름으로 학교에 다녀도 전혀 위축되지 않아요. 우리도 지부 회관을 이용해 한국어 강좌를 열고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글 교실만 200곳이 넘습니다. 지금은 한국국적 여성이 일본남성과 결혼해 그 2세가 일본국적자가 되는 게 교포 수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어요. 한 해 일본남성과 결혼하는 교포 여성이 5000명 정도에 달합니다. 한국국적 남성이 일본여성과 결혼하는 경우는 그 반대가 되어 문제될 게 없지만요.”
▼ 사랑에는 국경도 없으니…. 그래도 민단 입장에선 재일교포 간 결혼을 장려해야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올해부터 일본 전역의 민단 조직 내 청년회를 활성화해 남녀 교포가 자연스럽게 만나 교류하는 장으로 만들고 있어요. 이래저래 민단이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정 단장의 말을 들으면서 한인 교회가 미국 교민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것이 교회의 형태이든 민단의 형태이든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되는 공유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 최근 일본 등 아시아 전역에서 불고 있는 한류(韓流)현상도 재일교포들에게 영향을 주나요?
“물론이죠. 일본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자주 방영하고 있고 인기도 좋아요. 많은 교포가 TV드라마 등 한국의 대중문화를 즐기려고 합니다. 한국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높여주는 데 기여하고 있죠. 민단 각 지부에선 저렴한 가격에 한국 TV프로그램을 대여해주고 있어요.”
“한국 드라마 영향 정말 커요”
▼ 드라마의 영향력이 크죠.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조국에 대해 정서적으로 멀어져 있던 사람들도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아가 더 크게, 더 넓게 관심을 갖게 합니다. 또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리감을 급격하게 좁혀주고 있죠. ‘한국 드라마 뭐, 뭐 봤다’라고 하면서 대화를 하게 되죠.”
그러나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문화적 차이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 드라마에서 아내가 남편을, 혹은 여자친구가 남자친구를 심하게 질책하거나 심지어 때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한 교포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일본 가정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입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선 아내가 남편의 체면을 세워주는 경향이 강하죠. 그렇게 상대를 몰아붙이는 걸 보고 놀라워해요. 일본인이 갖고 있는 한국의 예전 이미지가 ‘예의, 양반, 유교사상, 양보’ 이런 것이었는데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을 보고는 ‘한국이 언제 저렇게 되었지?’라고 말합니다. 여성이 남성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런 일이 간혹 발생하기는 하겠지만, TV로는 거의 방영하지 않는 편이죠.”
민단은 지속적인 민족차별철폐 요구로 지금까지 260여 개의 일본 법률에서 국적조항을 없애는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지방공무원의 문호는 개방됐다. 그러나 여전히 고위공무원, 교사 등 특정 직업인이 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에 비해 재일교포는 취업과 승진에서 상당한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재일동포 중에 사업가, 대학교수, 의사, 간호사가 많은 것은 이런 직업에선 국적에 따른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최근엔 한국 성씨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일본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도 늘고 있는데 일본 정부는 김·이·박·한씨 등은 허용하지만 정·손씨 등은 제한한다. 재일교포에 대한 이러한 불평등하거나 불합리한 사회적 처우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정 단장은 “일본 내 교포사회의 위상 강화에 당사자인 우리는 물론 본국 정부도 좀 더 노력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재일교포의 존재는 한일 우호관계의 증진 및 일본이 한국의 한반도 정책을 지지해주는 데 긍정적인 환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일본의 외교정책은 일본의 유권자를 의식하면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일교포가 일본의 유권자가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중요해요. 본국 정부도 이점을 이해해 재일교포의 참정권 획득 문제를 대일(對日)외교의 우선순위에 올려주기 바랍니다.”
그러나 재일동포사회에선 한국의 움직임이 이런 기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한다. 한국 교육과학기술부가 지원하는 일본 내 한국교육원은 과거 40여 곳에서 지금은 20여 곳으로 줄어들었다. 올 들어서도 두 곳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정부는 소관부처를 재외동포재단으로 옮기려 하는데 이 역시 정부 의지의 약화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일본 내 한민족의 진지(陣地)
한국에서 유학하는 재일교포 학생이 연간 6000명을 넘어서는 가운데 최근 한국 대학의 문호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한다. 민단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삭감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공정한 사회’ 프레임을 적용해 전세계 각국의 한인회를 똑같이 공정하게 대해야 하며 일본의 민단에만 더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한 재일교포는 “60만 재일교포사회와 민단이 ‘해체의 위기’냐, ‘도약의 기회냐’의 분수령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공허한 명분론에 집착해 원래 해오던 지원마저 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일교포사회에 대한 지원은 그 비용대비 국익에 미치는 직·간접 효과가 크다. 재일교포들이 겪어온 고난과 본국을 향한 헌신의 역사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정 단장은 “본국 교과서에 재일교포 등 근·현대 한민족의 해외 이주 역사가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750만에 달하는 재외 한민족에 대한 충분한 조명과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최근 일본국적취득자 중에는 자신이 한민족임을 드러내고 다른 교포들과 교류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돌아갈 곳, ‘상징적인 고향’으로서 민단이 존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민단은 ‘일본 내 한민족의 진지(陣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