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살 꽃띠 소녀가 이민 32년 만에 연매출 1000억원대 청소용역회사 CEO로 성장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버지와 함께 상업용 건물 청소에 나섰던 그녀가 호주 최대 한인언론사와 선진 경영기법으로 무장한 회사를 이끌며 호주 사회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는 혈관 속으로 냉정과 열정이 동시에 흐르는 전형적인 CEO형 인간이다. 하긴 그런 결단력과 뜨거움이 없다면 한국계 이민자 출신 여성 기업인이 어떻게 2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오세아니아 주를 누빌 수 있을까?
‘제마이홀딩스그룹’의 2010년 매출액은 7500만호주달러(약 830억원)다. 2011년에는 대망의 ‘매출액 1억호주달러’(약 1100억원)를 향해서 하루하루 정진하고 있다. 창업주인 아버지 이재경(78) 회장과 함께 기업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일궈온 결과다.
지난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뉴사우스웨일스(이하 NSW) 주정부가 제정한 ‘올해의 NSW 여성상(NSW Woman of the Year Award)’ 최종 후보자 10인 가운데 아시아계로는 유일하게 호주 한인동포 1.5세 이숙진 CEO가 포함됐다. 호주의 대표적인 정론지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이숙진 CEO가 가족 우선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유연한 고용 시스템을 개발하고, 높은 수준의 급여 지급이 가능한 경영 시스템을 운용한 것이 높게 평가됐다”고 보도했다.
NSW주 여성 10인에게 수여하는 여성상 트로피를 수상한 날, 당시 케빈 러드 연방총리가 그녀에게 오찬을 제의했다. 1시간30분 동안 이어진 오찬 모임에는 이재경 회장, ‘제마이홀딩스그룹’의 현장 팀장 다섯 명, 김우상 주호주 대한민국대사가 자리를 함께했다. 러드 총리는 김 대사를 통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했고, 김 대사는 당일 아침에 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전달받은 안부를 러드 총리에게 전했다. 호주 언론은 유난히 친밀하게 지내는 이 대통령과 러드 총리를 두고 ‘미들파워 국가의 쌍두마차’라고 부르곤 했다.
러드 총리는 이숙진 CEO의 수상에 대해 여러 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에 감동한 이재경 회장이 “딸의 수상을 축하해줘 고맙다”고 인사하자, 러드 총리는 “정작 고마운 건 나다. 기업을 건실하게 운용하면서 2000여 명을 고용해주신 회장님이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현직 연방총리가 이민자 출신 기업인과 특별오찬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문 사례이고, 한국인 출신으로는 이숙진 CEO가 처음이었다. 당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조금 더 성숙한 기업인이 된 다음을 기약하자”면서 사양했다. 그러던 중 시드니대 관계자로부터 “제마이홀딩스그룹에서 한국학자 양성을 위해 우리 대학에 거액의 장학금을 약정하고 처음 2년 치에 해당되는 6만호주달러(약 6600만원)를 전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한 번 인터뷰를 요청해 만남이 이뤄졌다.
시드니대에 거액 장학금 기부
▼ 최근 제마이홀딩스그룹에서 시드니대에 장학금을 전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호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10만명을 웃돕니다. 고속 성장을 통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한국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고요. 그런데 호주 주류사회에 한국학을 본격적으로 전파하는 학자는 보이지 않아서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중국학과 일본학의 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유독 한국학은 잠잠한 상태여서, 국가 위상에 걸맞은 학자를 양성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젝트인지 감이 잘 안 오는데요.
“시드니대학교에 한국학 박사과정을 개설하고 신청자가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도록 전액장학금을 지급하는 겁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4명 정도의 한국학 박사를 지원한다는 계획이어서 12년 프로젝트(3년×4명)가 될 것 같습니다. 1인당 1년에 3만호주달러(약 33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거지요.”
이숙진 CEO와 존 하워드(오른쪽) 전 호주 총리.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실제로 장학금이 입금되자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지금 전세계를 상대로 신청자를 받고 있는데 아주 쟁쟁한 분들이 응모해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현재 시드니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있는 한국 교수분은 저한테 ‘놀랍고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e메일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호주에는 인터뷰어(기자)가 인터뷰이에게 차나 식사를 대접하는 관례가 있다. 필자는 인터뷰가 끝난 다음 이 사장과 함께 애버리진의 전설이 깃든 바라문디 생선요리를 먹을 작정이었다. 로즈메리 허브를 곁들인 버섯 소스를 듬뿍 뿌려서. 거기에다 ‘포잇 코너(Poet Corner)’ 적포도주를 곁들이면 왕후장상의 식탁이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장은 술 체질이 아니다. 아쉬운 대로 인도의 향기가 그윽한 ‘딜마 티’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유리창 밖으로 오른쪽 눈썹 모양의 그믐달이 보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약속장소에 도착해보니 이숙진 CEO가 도착해 있었다.
“서부호주 퍼스에 갔다가 공항에서 바로 왔습니다. 시드니와 퍼스 간의 3시간 시차를 이용해서 출장 시간을 최대로 활용했습니다. 퍼스가 시드니보다 3시간 늦으니까 그곳에서 3시간 더 활동하고 밤 11시 비행기를 타는 방식이지요. 뉴질랜드 출장도 같은 방식으로 다녀옵니다. 오늘은 예외가 되고 말았지만….”(웃음)
필자의 경험에 비춰볼 때 시드니에서 퍼스 출장을 ‘1박 3일’ 일정으로 다녀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택시-비행기-여러 차례의 미팅과 현장방문-비행기-택시로 이어졌을 출장 일정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보통사람 같으면 파김치가 되었을 상황이었지만 이 사장은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고 내 앞에 앉아 있다. 문득 저런 강인함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궁금해졌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그녀의 과거로 돌아가본다.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
32년 전 ‘지구에 남은 마지막 낙원’으로 불리던 호주에 도착한 17세 소녀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이민은 전적으로 아버지가 결정한 것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에서 고교3년을 다니다 호주로 이주한 그녀는 처음엔 뿌리 뽑힌 나무처럼 여러 가지 결핍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숨 가쁜 나날이었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할 틈도 없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는 늘 발밑에 천길 낭떠러지를 두고 사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단호한 삶의 자세가 절실했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학교에서 직업현장으로 바로 건너뛰었지요. 마치 고대와 중세를 경험하지 못하고 근대와 함께 식민지국가로 출범한 호주처럼.”
그녀는 낮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밤에는 청소일하는 아버지를 도왔다. 그녀는 세인트조지TAFE칼리지(St. George TAFE Collage)에 입학해 비서학과 속기를 공부했는데, 속성으로 영어를 배우고 싶었지만 어휘력이 부족해 많은 고충을 겪었다. 어느 정도 영어가 습득된 후에는 경영학과 회계학을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서 취직시험을 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좋게 해석했다. 그때 자신이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더라면 지금의 경영자 이숙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당시 열정적으로 했던 공부도 지금 그녀에게 가장 쓸모가 있는 ‘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제마이홀딩스그룹 창업자인 이재경 회장은 경기 동두천시의 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 1976년 호주로 이주했다. 서부 호주 댐피어에서 광산노동자로 2년을 일하며 정착 비용을 마련한 이 회장은 한국에 있던 가족을 불러들였다. 광부 외의 다른 직업을 찾고 있던 그는 한국 이민자로서는 처음으로 상업용 건물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업은 이민자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드문 직종이었다. 직업에 귀천을 따지지 않는 호주에서도 이 직업은 3D(dirty, dangerous, difficult) 업종에 속했지만 이민자가 도전해볼 만한 직종이었다. 이 업종은 호주의 역대 이민자 그룹이 아일랜드계-이탈리아계-동유럽계-터키계-한국계-베트남계-중국계 등으로 승계된 분야다.
이숙진 사장이 발행인으로 있는 호주의 ‘톱우먼’과 ‘톱뉴스’.
2000년 기점으로 큰 도약 이뤄
회사가 크게 도약한 때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전후해서다. 당시 호주는 금광이 발견된 1850년대처럼 나라 전체가 들끓었다. 이 사장은 그런 변화의 물결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역사를 되짚어보자는 영감이 떠올라 지인들과 역사 포럼을 열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가늠해보자는 취지였다. 어느 날은 혼자 숲길을 걷다 특이한 의문이 한 가지 떠올랐다.
‘호주 대륙에 왜 아시아인이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유럽인이 먼저 정착하게 됐을까? 즉위 12년을 맞은 조선의 정조는 무얼 했으며, 융성기에 접어들었던 청나라와 화려한 에도시대를 구가했던 일본 막부(幕府·무사정권)는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거룻배를 타고도 건너올 수 있는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는?’
이 사장은 역사를 공부한 지인으로부터 그 답을 들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오스만터키에 의해 멸망하면서 동서교두보를 잃은 유럽이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그 결과 신대륙을 발견했고 호주대륙도 거기에 포함된다. 발상의 전환과 과감한 결단으로 얻은 결과였다.”
이 사장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임을 직감했다. 2000년을 기점으로 호주 전국 단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새로운 경영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처음에는 이재경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전처럼 반대하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그는 일시적인 구조조정 작업도 했다. 본사 직영시스템을 대폭 완화해서 현장 위주의 팀장 시스템으로 바꾼 것.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화,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등 세계화 바람이 호주에도 거세게 불어닥쳤을 때 제마이홀딩스는 이미 구조조정을 마친 뒤였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기회로 작용했다. 시드니 일대에 국한되었던 사업장도 호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2006년부터는 뉴질랜드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팀장 시스템은 매력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경영자와의 신뢰가 바탕에 깔리지 않으면 성공 가능성이 낮다. 그래서 이 사장은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팀장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선발한다. 팀장에게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한다.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사람은 아무리 관리능력이 뛰어나도 팀장 직을 유지할 수 없다….
주 총리가 참석한 신사옥 입주식
“고객은 간단명료한 것을 원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인터넷으로 일을 처리하는 시대입니다. 제마이홀딩스그룹이 그런 시대적 요구를 미리 간파하고, 사전에 자동화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두었기 때문에 타 회사와의 입찰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지요.”
2009년 7월9일 창사 30주년을 맞은 제마이홀딩스그룹은 대지 7500㎡의 신사옥을 마련해 입주했다. 이때 네이슨 리스 NSW 주총리가 참석해서 ‘오픈 테이프’를 끊고 축사를 했다. 그의 첫 한인 행사 참가였다. 이민자 소유 회사가 첨단시스템을 활용해서 획기적인 고용창출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제가 없어도 회사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시스템화하는 것이 숙원이었습니다. 사실 상업용 건물 청소용역 분야의 관리를 시스템화한다는 건 불과 10년 전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지요.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아무 걱정 없이 한 달 동안 휴가를 떠나도 될 정도입니다.”
CEO이기에 그녀는 짧은 휴가 중에도 ‘비즈니스 마인드’를 작동한다. 5년 전 뉴질랜드로 사업영역을 넓히게 된 것도 휴가지에서 얻은 영감이 계기가 됐다.
“이곳저곳 관광을 하는데, 문득 그곳이 비즈니스 현장과 겹쳐졌습니다. 돈으로 보인 거지요.(웃음) 그래서 그곳에 제마이홀딩스그룹을 소개한 브로슈어를 남겨두고 왔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형제 나라(Bro-ther Country)’다. 두 나라는 1973년 ‘타스만 조약(Trans-Tasman Agree-ment)’을 맺어서 긴밀하게 교류한다. 하나의 통상권을 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두 나라만의 특별한 이민법을 제정해서 간단한 절차만 거치면 이주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호주로 직접 이민 오기 힘든 한국인들이 뉴질랜드를 징검다리 삼아 호주에 영구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회사 간부들 사이에서 뉴질랜드 진출을 놓고 찬반이 갈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된다’와 ‘안 된다’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보았어요. 저는 항상 ‘된다’는 쪽으로 마인드컨트롤을 합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는데 3개월 후에 뉴질랜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뉴질랜드로 달려갔지요. 남섬과 북섬의 현장을 오가느라 이틀 동안 비행기를 6번이나 갈아탔습니다. 첫 출장에서 1박2일 동안 5개 비즈니스 거점을 확보하고 돌아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거지요. 지금은 40개의 현장으로 늘어났지요.”
“삶의 중심은 신앙”
이숙진 CEO와 세 차례 인터뷰하는 동안 ‘신념에 찬 인간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의 저 강철 같은 신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은 ‘철저한 신앙생활’이었다. 그래서 그가 출석하는 시드니성결교회(담임목사 고준학)를 방문해 별도의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도중에 호주한인교회 여성 장로 1호인 박미자씨를 만났다. 이 사장의 어머니다. 딸 숙진씨 역시 교인 90% 이상의 지지를 받아서 4월3일 장로 임직식을 갖는다. 한국 교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모녀 장로’가 시드니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나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녔습니다. 강권적인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어머니의 신앙이 워낙 순수하고 깊어서 자연스럽게 동화됐습니다. 지금은 신앙이 전적으로 제 삶의 중심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서울신학대학원에 ‘박미자 장로 장학금’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머니의 평생 숙원사업이었습니다.(웃음) 그런데 연세가 많으셔서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후원하나 하고 고민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그 일을 이어가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지금도 항상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어머님께 보답하고 싶어요.”
▼ 주일학교 교사를 22년 동안 했다고 들었습니다.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웃음) 원리원칙만 따지는 선생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 그건 좀 곤란한 것 같은데요.
“아이를 낳은 다음에 180도 바뀌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의 어린이들이 다 예뻐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원리원칙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라는 큰 진리를 깨달은 거지요.”
이 사장의 큰딸 은혜양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있고, 둘째 이례양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교 3년생이다.
▼ 호주에 거주하는 한인동포 절반 이상이 교회나 성당에 출석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32년 동안 한국 출신 이민자로 살면서 얻은 결론인데요, 세속적인 측면에서도 교회나 성당만한 공익 위주의 공동체를 갖기 힘듭니다. 한인동포가 몇 천 명밖에 되지 않던 시절에는 한인교회가 대한민국의 분신이었습니다. 거기서 정보도 얻고, 직업도 구하고, 친구도 만났지요. 제 두 딸도 교회에서 한국어와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숙진 CEO(가운데)가 ‘산우 골프대회’에서 회사 팀장들과 함께 골프 라운딩에 나섰다.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시드니한인회장, 체육회장 등의 직분을 맡으셔서 봉사하셨고, 저도 최근까지 한국 여성부가 주관하는 코윈(한민족여성네트워크)의 호주지역본부 담당관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한인단체가 서로 협력하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사 20주년 맞은 ‘톱 미디어 그룹’
호주에는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 여러 개의 한인 언론매체가 발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이숙진 CEO가 발행인으로 있는 주간지 ‘톱뉴스’는 주간지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올해로 창간 21주년을 맞이했다. 아울러 한인여성을 위한 월간지 ‘톱우먼’도 6년째 발행하고 있다.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것도 ‘톱미디어 그룹’의 몫이다. ‘톱뉴스’는 창간 3주년 기념으로 ‘미당 서정주 시인 초청 문학회’를 열었고, 2005년에는 ‘박완서 초청 문학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2009년 11월엔 이명박 대통령의 호주 국빈방문에 맞춰 NSW아트갤러리에 ‘한국민화전시회’를 개최했고, 세계 한국어 웅변대회 호주 예선대회도 15년째 이어가고 있다.
▼ 호주 한인동포가 10만명 남짓한데, 언론 비즈니스를 통해 수익을 제대로 올릴 수 있습니까?
“지난 20년 동안 흑자 창출에 결코 연연하지 않았다고 얘기해도 될까요?(웃음) 솔직히 처음부터 수익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동포언론이 호주 한인사회의 얼굴이 된다는 점에서 호주한인들의 위상을 올릴 수 있는 한글매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 보람이 있었나요?
“큰 보람을 느낍니다. 특히 인터넷이 활용되기 전에는 대다수 교민이 교민 언론매체를 통해서 고국사회의 정보를 얻고 교양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저작권을 제대로 준수하면서 한글로 호주사회의 뉴스를 제대로 전하는 매체 가운데 하나라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많은 독자가 그런 격려를 해주십니다.”
▼ 각종 문화관련 사업에 투자하는 금액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적은 액수는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게 기업과 언론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문화를 돈으로 측량할 수는 없지만 투자하는 것 이상의 보람을 느낍니다.”
1994년 2월 ‘톱뉴스’ 창간 3주년 기념으로 열린 ‘미당 서정주 시인 초청 문학회’는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행사였다. 서정주 시인은 친일 등의 문제로 한국에서 비난받는 시기에 자신의 문학세계를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톱뉴스’에 큰 고마움을 느꼈던 것 같다.
서정주 시인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후배시인인 필자한테 소포꾸러미를 보내왔다. 소포를 뜯어보니 붓글씨로 쓴 ‘산우(山友)’라는 글씨가 있었다. 이재경 회장의 호였다. 산(山)처럼 믿음직스러운 친구에게 감사의 표시로 시인이 직접 쓴 것이었다.
은빛 소녀여, 계속 항해하세요
‘기후 변화(climate change)’ 탓이었을까? 이번 여름(호주는 갓 여름을 지나고 있다)의 시드니는 연일 40℃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가 이어졌다. 다행히 시드니는 바다와 강을 끼고 있는 물의 도시다.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진 강변을 거닐다보면 두고 온 산하(山河)도 어른거리고 유년의 추억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2월27일 파라마타 강변에 있는 ‘벤조 페터슨 공원’에서 이 사장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랬다. 언덕 아래로 맹그로브 숲이 펼쳐지고, 페르시안 블루 빛깔의 강물 위에는 하얀 돛을 매단 요트들이 떠다녔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사이먼과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녀가 특히 즐겨 듣는 곡이다.
케빈 러드(왼쪽) 전 호주 총리와 이숙진 CEO.
“우선 이 노래를 들으면 제가 먼저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 다음에, 노래 가사처럼 제 인생을 눕혀서 호주이민 1세대와 2세대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제가 딱 그 중간에 있는 1.5세대잖아요.”
▼ 이민 1세대와 2세대를 잇는다는 걸 이숙진 CEO 가족에 대입하면 부모님과 두 딸을 연결해준다는 의미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저 없이도 두 세대 간에 잘 어울려요. 오히려 제가 방해될 때가 더 많습니다.(웃음) 제가 소망하는 건 한인동포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끈끈한 접착제 역할을 하겠다는 겁니다.”
▼ 언뜻 이해가 안 되는데요.
“우리 아버지 세대는 우선 살아남는 게 중요했잖아요.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민 2세대는 호주를 제대로 배워서 당당하게 주류사회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생기는 동포사회의 간극이 커요. 제가 나름대로 사업도 하고 언론매체를 발행하는 입장이어서 감히 그 일을 감당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 그런 생각을 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요?
“팔순을 앞두신 아버지가 가끔 허공을 바라보고 계실 때가 있어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대한 동경을 갖는다고 하잖아요. 아버지한테 시간은 이민을 떠나오기 전의 추억이고, 공간은 고향 산하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한테도 사랑과 우정이 빛나던 시절이 있었던 거지요. 그걸 얘기해주지 않으면 이민 2세대들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억지로 듣게 만들 수도 없고. 그 대목에서 문화와 예술의 공간이 열리는 것 같아요. 어머니들이 쓰시는 자서전으로, 문학작품으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뮤지컬 등으로 이민 1세대의 얘기를 전해주는 거지요.”
▼ 그래서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좋아하시는군요. ‘톱우먼’ 2월호에 이숙진 발행인이 쓴 ‘세대적 변화를 향한 시대적 조류’라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거기에서 ‘대외 활동 능력과 리더십’‘견고한 내공 축적’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업과 대외활동을 어떻게 조화롭게 하느냐는 고민인데요, 먼저 저 자신의 견고한 내공 축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를 ‘인문학의 해’로 정했습니다. 역사에서, 특히 한국과 호주 역사에서 영감을 얻고 싶습니다. 인문학 전반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답니다.”
▼ 저는 한때 인문학도로서 깊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불멸을 향한 인간의 헛된 욕망과 그로 인해 더욱 고독해지는 현실의 늪에 빠진 겁니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피아니스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에서 쇼팽이나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소나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현실 안주나 자만에서 벗어나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시각을 얻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 노력이 이민 1세대와 2세대를 이어주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고요.”
고백하자면, 사업가와 마주 앉아서 인문학을 논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이숙진 CEO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의 3절을 불러주고 싶어졌다. 자랑스러운 한국 여성의 미래가 더 밝아질 수 있도록.
“은빛으로 물든 소녀여, 계속 항해를 하세요/ 눈부시게 빛나는 당신의 시대가 왔습니다 / 당신의 모든 꿈이 현실로 변하고 있습니다 / 얼마나 밝게 빛나는지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