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한국을 찾은 ‘벽안의 신부’는 40년간 도시 빈민의 곁에 있었다.
- 국적도, 화려한 교수직도 버린 채 이들을 위한 공동체를 일궜다.
- ‘거리의 사제’ 박문수 신부, 그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이 센터를 이끄는 주인공은 미국 출신의 박문수(70·본명 프란시스 부크마이어) 예수회 신부다. 1969년 한국에 들어온 이래 그는 ‘거리의 사제’로 불리며 빈민구호에 앞장서왔다.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도 20년간 몸담았지만,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예수회 인권연대 연구센터 소장을 맡아, 활동가들을 위한 이론 연구에 집중하는 중이다.
지난 1월 서강대 총동문회(회장 김호연)는 ‘2011년 서강대 총동문회 신년하례식’에서 박 신부에게 ‘올해의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을 수여했다. 그의 헌신적 삶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였다.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2일 박문수 신부를 만났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상대방의 마음을 금세 무장 해제시켰다. 고희(古稀)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제복에 개량한복 저고리를 덧입은 모습은 친근하고 소탈하다. 느리지만 유창한 그의 한국말을 듣노라니 대학 시절 강의실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막 대화를 시작하려는데 박 신부의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서울 강남 지역 비닐하우스 마을 주민들이 그를 곧 방문한다는 전화였다. 빈민운동 현장에서 그는 든든한 조언자다.
‘공동체 정신’의 힘
▼ 그분들이 어떤 용건으로 신부님을 찾아오나요?
“지난해 강남, 서초, 송파구에 있는 비닐하우스 촌을 다니며 공동체에 대해 특강을 했어요. 이후 그분들의 회의에 참석할 때도 있었죠. 오늘은 제게 상의할 게 있어서 찾아온다고 하네요.”
▼ 철거민이나 비닐하우스 촌 주민들에게 주로 어떤 조언을 해주시나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하고, 공동체를 만드는 데 어떤 어려움이 생기는지, 또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그 원칙을 얘기합니다.”
▼ 그 원칙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가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을 한데 모아 자신들의 요청을 관철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목적이 확실해야 하고, 구성원은 ‘이 목적을 위해서 모였다’는 인식을 뚜렷하게 가져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걸 배워야죠. 쫓기며 어렵게 살아온 이들은 아주 강하게 나의 것을 요청하지 않으면 무시당하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변하기 쉬워요. 뽑힌 지도자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걸 요구하고, 그 요구가 그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싸우죠. 이런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소문입니다. 소문이 막 날아다녀요. 그 소문을 그대로 믿지 않고 확인해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방된 의사소통을 배워야죠. 우리끼리 갖고 있는 정보에 대한 이기심도 극복해야 해요. ‘함께해야 더 잘된다’는 정신이 있어야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어요. 욕심만 채우기보다 서로 존중하는 걸 배워야죠.”
▼ 이기심 때문에 구성원들끼리 싸우다가 더 큰 걸 놓치기 쉽죠.
“공동체에서 파가 갈려 끼리끼리 싸우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에, 공동체 정신을 잘 배워야 합니다.”
▼ 외부인이 공동체에 들어가, 구성원을 자극하고 갈라놓거나 폭력 시위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외부에서 그런 전략을 쓰는 경우도 있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건 제가 강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은 조직가가 그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서울 비닐하우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박문수 신부에게 조언을 얻고자 예수회 인권연대 연구센터를 찾아왔다.
박문수 신부는 1941년생이다. 고향은 미국 미네소타주다. 그는 슬로바키아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가족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성당에 가는 것이 중요한 일상이었다.
그의 고향은 체코인과 슬라브인이 밀집해 살던 지역이었다. 이웃끼리 서로 어떻게 생활하는지 훤히 알 정도로 친밀했다.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풀뿌리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미국에서는 2000~3000명만 모여도 자기들끼리 소방서와 경찰서, 교육기관까지 만들어요. 공동체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구성원이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할 것인지 스스로 정해나갑니다. 한국에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됐지만, 경찰과 교육제도까지는 적용되지 않았죠. 반면 미국은 지방자치가 매우 발달해 있어요.”
▼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셨죠?
“초·중·고등학교 모두 천주교 학교를 다녔어요. 미국에서는 어린 학생에게 노는 시간을 많이 줘요. 공부하라고 많이 요구하지 않아요. 가르치는 대로 답을 쓰면 되니까, 성적은 무척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는 좀 분위기가 달랐어요. 배우는 것에 대한 자발성을 중시하더군요.”
박 신부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스프링힐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철학과 생물학이었다. 대학 진학 후 더 넓은 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사제의 꿈을 품었다. 정의를 구현하는 삶에 대한 동경이 무엇보다 컸다.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을 다 바쳐서 세계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평화봉사단을 만들어 개발도상국에 파견했는데 그런 움직임도 영향을 미쳤죠. 인종차별 극복을 주장한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故 제정구 의원과의 만남
1960년 미국 예수회에 들어갔다. 당시 미국 예수회에서는 한국에 관구를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데다가, 미국에 교육받으러 온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주저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나중에 서강대에 가서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1960년부터 이미 하고 있었어요. 당시 1년 선배인 이한택 주교님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한국에 친숙해졌죠. 새 관구가 생기는 한국에 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박 신부가 한국에 온 1969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한 시점이었다. 대학과 노동계 등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폭력이 자행됐다. 언론에는 재갈을 물렸다. 서강대 생물학과 조교로 일하며 한국말을 익히던 그는 ‘사제와 생물학자의 길을 동시에 걷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과학 공부를 좋아했어요. 미국에서는 학문과 정의 구현 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그 꿈이 한국에 오며 깨졌어요. 권력 탄압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한국에서 생물학자로 할 수 있는 시급한 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유전공학과 생명윤리가 천주교에서 중요한 분야지만, 30년 후에야 이슈가 될 것 같았습니다. 생태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한국은 모든 게 개발 위주였죠. 생물학자와 사제 일을 동시에 한다면 제 생활이 갈라질 것 같았어요. 마침 서강대에서 사회학과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어,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죠.”
1974년 그는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제 서품을 받은 이듬해였다. 사회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될 도시사회학을 공부하며 5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빈민운동 소식을 꾸준히 전해 들었다.
“1975년 제정구 선배가 서울 양평동 뚝방동네에 들어가 빈민들과 생활했어요. 1977년 강제철거가 시작되자 정일우 신부와 함께 철거민들을 이끌고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에 ‘복음자리’ 마을을 세웠죠. 그곳에서 한국 빈민운동의 전략이 발생했죠.”
1979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도시빈민의 대부’로 불리던 고(故) 제정구 의원과 교류하며, 처음엔 학자로서 도시 빈민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하지만 나약한 대학교수로서 연구만 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1985년 제정구 선배가 정일우 신부와 함께 ‘천주교 도시 빈민회’를 만들었어요. 저는 대학원생들과 빈민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며 이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깡패들이 대규모로 침입해 아주머니들을 때리고 상처 입히는 광경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빈민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연구가 현실과 유리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죠. 제정구 선배도 제게 ‘연구만 하지 말고 단체에 들어오라’고 권유했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현장에서 뛰기 시작했어요.”
철거 현장 강의
서강대 교수 시절 그는 철거 현장에서 내쫓기는 주민들의 고통과 투쟁을 직접 체험케 한 ‘현장 강의’로 명성을 떨쳤다. 참여 관찰 수업은 주로 대학원에서 진행됐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은 빈민 지역에 들어가 그곳 주민들의 삶을 관찰했다. 도시 계획과 빈민 문제를 다룬 학생들의 리포트는 생생한 현장을 담고 있기에 더 큰 울림이 있었다.
“한번은 서강대 인근 도화동 재개발 지역의 지원 요청을 받고 학생들과 급히 현장에 달려간 적이 있어요. 그때 철거 깡패 수가 많지 않았어요. 학생들이 건물을 부수려는 포클레인 기사를 끌어내리고 기계를 점령해 성공적으로 철거를 막아낼 수 있었죠. 주민들이 고맙다고 수제비도 만들어주고, 학생들과 막걸리를 먹으며 자축했던 기억이 납니다.”
1985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버리고 완전한 한국인이 됐다.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끝까지 한국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박문수’라는 이름은 류장선 예수회 신부(전 서강대 총장)가 지어준 것이다.
“제 이름이 ‘부크마이어’인데 부크마이어(Buchmeier)에서 독일어 ‘Buch’는 책이니까 글월 ‘문(文)’을 썼죠. meier는 책임지는 하인이란 뜻이 있어서 지킬 ‘수(守)’를 가져왔고요. 한국에 ‘북’씨가 없어서 ‘박’씨가 됐어요. 조선시대 정의를 구현했던 암행어사 박문수도 생각나 그 이름을 쓰게 됐어요.”
1987년 천주교 서울교구는 도시빈민사목위원회를 설치했다. 교회가 철거민의 아픔에 동참하며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였다. 그는 도시빈민사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재개발 지역을 찾아다녔다. 그들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고, 때로는 그들이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돼주었다.
박 신부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독립문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이끈 일이다. 1990년 그는 독립문 지역 철거에 앞서 예수회 신부들과 전세방을 얻어 살면서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그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한데 힘을 모은 덕분에 200여 가구의 세입자가 무사히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었다.
“제정구 선배를 비롯해 ‘복음자리’에 머물던 활동가들은 ‘강제 철거가 이뤄질 곳에 미리 들어가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빈민운동은 밖에서 하는 게 아니라, 이웃으로서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
죠.”
박문수 신부는 “상대적 빈곤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교육 운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종교와 정치 구분할 수 없어”
그는 두 번의 주임신부 임기(5년)를 거치며 2009년까지 ‘독립문 공동체’를 이끌었다. 청소년 스카우트 운동, 지역주민의 권익 찾기를 위한 자치회·부녀회 구성…. ‘벽안의 신부’가 펼치는 다양한 활동은 주민들을 감화시켰다. 박 신부가 특히 애착을 갖는 건 청소년 스카우트 운동이다.
“1999년 스카우트에 참가했던 초등학생, 중학생이 어른으로 성장해 이제 지도자로서 조직을 이끌고 있어요. 이 운동이 10년 넘게 지속되고,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뿌듯합니다.”
도시 빈민과 철거민 문제는 비단 1970 ~80년대의 이슈가 아니다. 2009년 1월 용산 철거민 참사는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을 낳으며 큰 상처를 남겼다. 박문수 신부는 용산 참사 현장에서 ‘용산 참사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도시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또 성직자로서 용산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에요. 건물을 철거하면 보증금이나 전세금은 돌려받을 수 있어도,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권리금은 돌려받을 수 없었던 거죠. 권리금이 작게는 1000만원에서 크게는 몇 억원에 달하는데, 그걸 못 받으면 딴 곳에서 장사도 할 수 없고 실업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사실 망루를 만드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에요. 끝까지 협상하겠다는 하나의 상징인 거죠. 그곳을 막으면 음식과 물이 조달되지 않아 오래 버틸 수 없어요. 그런데 24시간 안에 경찰이 공격해 협상이 이뤄지지 못한 거죠. 주민들이 먼저 폭력을 썼다고 했는데, 그건 과장된 보도였어요. 대화와 협상이 아니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가장 큰 문제죠.”
▼ 용산 참사 현장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당시 주민 항의는 너무 많은 제한을 당했고, 언론에도 잘 나오지 않았어요. 구청과는 대화도 없었죠. 그렇게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다가 문정현 신부님이 그곳에 들어가 주민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현장이 생겼어요. 거기서 데모는 할 수 없지만, 미사는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이 다 정의구현이죠.”
한국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은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인혁당 사건이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등을 세상에 알리며 독재정권에 항거했다. 하지만 최근 일각에서는 진보적인 천주교 사제들의 행보에 대해 “정치세력화되고 있다”며 비판한다. 종교는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정치하고 종교는 구별해서 말하면 안 돼요.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신앙의 필수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경에서도 그것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정의구현이라는 것은 정치참여예요. 다만, 성직자가 피해야 하는 것은 정당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정당정치는 정치에 참여하면서 한쪽이 이기도록 하는 게 원칙이에요. 사제는 그런 정당정치를 하면 안 되죠. 억압받는 주민 편에 서는 것은 정의구현이고요. 이것은 정치적이지만 정당정치는 아닙니다.”
지난해 말, 4대강 이슈를 놓고 천주교에서 ‘진보적 사제’와 ‘보수적 신자’간의 충돌 양상도 눈에 띄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한 인터뷰에서 “주교회의 결과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한 게 아니라 자연 파괴와 난개발의 위험을 극복해 4대강을 개발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사제단은 정 추기경의 4대강 발언을 ‘궤변’이라고 일컬었다. 원로 사제 20여 명은 정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직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자 천주교 평신자 단체인 천주교나라사랑기도회가 사제단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현안을 둘러싼 극명한 시각차를 박 신부는 어떻게 바라볼까.
“‘생태에 대한 정의구현’ 측면에서 저는 4대강 개발을 반대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천주교 성직자가 정당 활동을 하려는 게 아니라 원리를 표현한 거예요. 4대강 개발에서 많은 이윤을 얻는 신자는 주교들이 자신을 버린 것 같다고 느낄 거예요. 사제들 입장에서는 그 신자들이 아직 신앙의 정의구현 부분을 깨닫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주교들은 신자에게 (성경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요.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이 자연을 파괴하고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는 안했다’는 추기경님의 말이 틀리진 않아요. 다만, 추기경님이 정의구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신자들과 한편에 서 있는 것 같아서 사제단이 많이 반발한 거예요. 교회 안에서 경쟁이 느껴져요. 추기경님도 자신이 바라고 있는 교회의 모상이 아니라고 느끼며, 마음이 많이 아플 거예요. 양쪽이 모두 아파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돼요. 저는 사제단의 입장에 더 가깝지만.”
▼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이신가요?
“소속과 비소속의 개념은 없습니다. 전국 사제 모두 사제단이죠. 활동과 비활동으로 나뉠 뿐이에요.”
▼ 기독교 쪽에서는 조용기 목사가 최근 ‘이슬람채권법이 통과하면 MB 하야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해 논란이 됐습니다. 이 역시 정치적 발언 아닌가요?
“조용기 목사님의 발언을 정확하게 다 읽어보지 못해 답변하기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배타적인 정신은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21세기 이슈는 상대적 빈곤
시대가 바뀌면 사회운동의 패러다임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화려한 고층 빌딩 숲으로 뒤덮인 도시의 한편에는 여전히 주소 불명의 비닐하우스 마을이 존재한다. 2011년의 빈민운동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6·25전쟁 후 모두 다 가난했고, 절대빈곤 문제가 가장 심각했죠. 산업화를 거치며 이제 절대빈곤 문제는 해결됐지만,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됐어요. ‘상대적인 빈곤’은 의식주의 문제라기보다 ‘교육, 문화, 자존심’과 연관된 이슈예요. 상대적 빈곤으로 가장 크게 상처 입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독립문 공동체’의 활동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많아요. 지역 아동센터를 만들고, 스카우트를 조직한 거죠. 아이들이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만들고,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시켰어요. 야외 캠프를 통해 성취를 느낀 아이들의 자존감도 높아졌죠. 현재 빈민운동의 핵심은 교육과 문화운동이 돼야 합니다.”
‘정의구현’과 ‘사회운동’을 늘 앞세웠던 박 신부에게 인간적 번뇌는 없었을까. 타향에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며 사는 일이 외롭진 않았을까. 그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사제의 길에 접어든 후 사랑 때문에 흔들린 적이 없었냐고. 그는 웃으며 답했다.
“수도 생활에, 또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힘들 때 ‘아는 여성과 같이 생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내 길은 사제였어요. 실망하면서 모든 사람의 나약함에 대해, 나의 나약함에 대해 잘 알게 됐어요. 감정의 동요는 20대 시절 모두 다 지나갔죠.”
인터뷰가 끝날 무렵 비닐하우스 촌 주민들이 센터 사무실에 도착했다. ‘주거권실현을 위한 비닐하우스주민연합’ 홍승순 공동대표는 기자에게 박 신부와의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을 들려줬다.
“성수동 철거 현장에서 신부님을 처음 뵈었어요. 용역이 몇 백 명 깔려 있는데 파란 눈의 신부님이 딱 나타나신 거예요. 주변 사람들은 모두 손 놓고 있는데, ‘저분은 뭐가 답답해서 오셨을까’ 싶었죠. 신부님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박 신부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문득 기자 시절의 초심을 떠올렸다.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던 그 열정을 잊고 지낸 건 아닐까. 예리한 각성이 마음을 아프게 꼬집었다.